[김관후의 4·3칼럼] (5)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 미국 육군대장, 더글러스 맥아더

#. ‘조선의 주민에게 포고함’ 포고 1·2 발표

‘1945년 9월 8일/ 왠지 인천 앞바다 여틈하게 보이던 날/ 미군의 인천상륙 환영하러 나갔던/ 인천노조 지도자 권평권 위원장/ 아직 무장해제가 안 된 일본군에게 총맞아 죽었다/ 이 밖에도 여럿이 쓰러졌다/ 상륙한 미국은 일본군 편들었다/ 왜냐/ 해방군이 아니었으므로/점령군이었으므로/ 맥아더 일반명령 제1호의 점령군이었으므로/ 그 후리후리한 키 뻣뻣이 굳어버렸다/ 그 뒤로 내내/ 이 땅에서는 순정이란 순정은 다 굳어버렸다// 그러나 이 땅 어디에도 어느 골창에도/ 개죽음이란 없다/ 그 죽음 쌓여 오늘의 모순에 이르렀다// 성조기가 가장 잘 보이는 이 땅에서/ 일장기가 가장 잘 보이는 이 땅에서’ -고은의 시 ‘권평권’

‘조선의 주민에 포고함.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으로서 좌기(左記)와 여(如)히 포고함. 일본국 천황과 정부와 대본영(大本營)을 대표하여 서명한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 휘하의 전첩군(戰捷軍)은 본일(本日)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함. 오랫동안 조선인의 노예화된 사실과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킬 결정을 고려한 결과, 조선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 조항 이행과 조선인의 인권 및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음을 조선인은 인식할 줄로 확신하고 이 목적을 위하여 적극적 원조와 협력을 요구함.’

본관은 본관에게 부여된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의 권한을 가지고 이로부터 조선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과 동지(同地)의 주민에 대하여 군정을 설립함. 따라서 점령에 관한 조건을 좌기와 여히 포고함.

제1조 조선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과 동 주민에 대한 모든 행정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하에서 시행함.

제2조 정부, 공공단체 또는 기타의 명예직원과 고용과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공공사업에 종사하는 직원과 고용인은 유급 무급을 불문하고 또 기타 제반 중요한 직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명(別命) 있을 때까지 종래의 직무에 종사하고 또한 모든 기록과 재산의 보관에 임할 사(事).

제3조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하에서 발포한 명령에 즉속(卽速)히 복종할 사(事). 점령군에 대하여 반항행동을 하거나 또는 질서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용서없이 엄벌에 처함.

제4조 주민의 소유권은 차(此)를 존중함. 주민은 본관의 별명이 있을 때까지 일상의 업무에 종사할 사.

제5조 군정기간 중 영어를 가지고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함. 영어와 조선어 또는 일본어 간에 해석 또는 정의가 불명(不明) 또는 부동(不同)이 생(生)할 때는 영어를 기본으로 함.

제6조 이후 공포하게 되는 포고, 법령, 규약, 고시, 지시 및 조례는 본관 또는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하여 주민이 이행하여야 할 사항을 명기함. 우(右) 포고함. 1945년 9월 7일. 어횡빈(於橫濱).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 미국 육군대장 더글러스 맥아더.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포고(PROCLAMATIONS(GHQ, USAFPAC) 제1호, 1945년 9월 7일

 

▲ 동경에서 맥아더와 이승만.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는 해방공간에서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관이다. 미군정(美軍政,military administration) 3년 동안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본 통치 방침은  ‘맥아더 포고’에 집약되어 있다. 

 ‘포고 1·2’는 ‘조선의 주민에 포고함’으로 시작된다. 이는 헌법이 없던 그 시절, 미군정 점령정책의 기본이 되는 법규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그 전문(前文)에서 맥아더는 “일본국 천황과 정부와 대본영(大本營)을 대표하여 서명한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 휘하의 전첩군(戰捷軍)은 본일(本日)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함.”이라고 선언하였다.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한국에 진주하였다는 미국의 의지가 담겨져 있는 문서이다. '인권 및 종교상의 권리의 보호'라는 어구 이외에는 구체적인 점령목적이 명기되어 있지 않다. 
 
  '포고 1·2'  전체를 통해서 일본 식민통치를 이어받은 점령군의 고압적인 자세를 가지고 한국인 앞에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그 당면의 정책으로서 미군은 우선 총독부의 기구 및 인원을 이용한다는 방침을 채용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인에 의해 조성된 정부적인 성격의 기관, 즉 좌파성향의 '인공'(조선인민공화국)과 우파의 '임정'(대한민국임시정부)도 일절 인정하지 않고, 미군정부를 '남한에 있어서의 유일한 정부'로 하고 행정·입법·사법권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직접 통치를 시행했다.

 정부 기구면에서는 일본식민지의 유산이었던 총독부의 기존 행정기구를 그대로 활용하는 정책을 취했다. 관리(官吏)면에서 처음에 일본인을 당분간 활용하겠다는 방침으로 나왔다가, 국민의 비등한 여론에 의해 미군으로 임명하고 한국인 고문관을 두었다. 그런데도 1946년 1월 말까지도 일본관리 60명가량이 남아 미군정의 일을 도왔다.

 맥아더의 한국과 일본에 대한 편견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순종적이었던 일본인은 성숙한 민주의식을 가진 국민으로 평가하였고, 저항적이며 자기주장이 강한 한국인에 대해서는 강압통치가 필요한 야만적인 미개인으로 치부하였다.

 맥아더는 “한국인들은 일본인들과 달리, 민주주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독재자는 아니더라도 강력한 지도자(firm hand)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 맥아더 사령관.

‘미제국주의자가 남조선을 강점(1945. 9.8)하는 첫날부터 조선인민 앞에는 아주 간고하고 어려운 과업이 제기되고, 또한 평탄하게 실현할 수 없는 복잡한 정세가 조성되었다. 당시 제주도에 처한 사정은 더욱 곤란하였다. 협착한 섬이 미일군의 싸움터로써 오랫동안 일군병의 발굽에 짓밟혀, 삶의 터전이 일체 상실되었던 도민들에게 자포자기에 빠진 8만 여 일제 패잔군의 무도한 행패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무척이나 많았다.’ -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에서 발췌.

#. 맥아더 ‘포고 2’가 위력을 발휘하다

 ‘조선의 주민에 포고함. 본관은 본관 지휘하에 유(有)한 점령군의 보전을 도모하고 점령지역의 공중치안, 질서의 안전을 기하기 위하여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으로서 좌기(左記)와 여(如)히 포고함. 항복문서의 조항 또는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의 권한하에 발(發)한 포고, 명령, 지시를 범한 자, 미국인과 기타 연합국인의 인명 또는 소유물 또는 보안을 해한 자, 공중치안, 질서를 교란한 자, 정당한 행정을 방해하는 자 또는 연합군에 대하여 고의로 적대행위를 하는 자는 점령군 군율회의에서 유죄로 결정한 후 동 회의의 결정하는대로 사형 또는 타 형벌에 처함. 1945년 9월 7일. 어횡빈(於橫濱).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 미국육군대장 더글러스 맥아더’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포고(PROCLAMATIONS(GHQ, USAFPAC) 제2호, 1945년 9월 7일.

 미군정하에서 제주4·3에 대한 연루자들을 처벌 할 때 적용한 법규는 맥아더 ‘포고 2’이다. 1946년 8월 1일 제주도는 전라남도에서 분리, 도제(道制)를 실시하였다. 경찰조직도 제주감찰청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11월 16일 모슬포에서 조선경비대 제9연대도 창설되었다.
 
제28주년 3·1절 기념식에서 제주도 좌파세력이 주도한 시위에서 군정경찰이 발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3·1발포 사건 직후에 사표를 제출한 박경훈 도지사는 "발포사건이 일어난 것은 시위행렬이 경찰서 앞을 지난 다음이었던 것과 총탄의 피해자는 시위군중이 아니고 관람군중이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러니까 불법 피해자가 생겼다는 견해이다.
 
1947년 3월 10일부터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3·1사건을 ‘4·3사건의 도화선’으로 보았다. 제주도에서 3·1사건 및 3·10 총파업 연루자들에 대한 군정재판이 1974년 4월 3일부터 개정됐다. 4월 10일 제주경찰감찰청 총 검거자 500명 가운데 군정재판에 송치된 자가 199명, 앞으로 송치예정자가 61명으로 결국 군정재판 회부 건수는 도합 260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검거령은 계속 발동되고 검속자는 더 늘어났다. ‘포고 2’가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전략) 경무부장 조병옥씨는 20일 군정청 출입기자단과 회견하고 제주사건에 대하여....(중략)........이번 총파업사건의 관계자 150여 명을 체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총파업에 직접 도화선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경찰발포에 대해서는 이를 타당하다고 하고 일부 경관의 발포에 대해서는 무사려의 행동이라고 하여 파면시켰다고 한다......(중략).........

“본관은 3·1절 발포사건에 진상조사위원회를 언명하였던 바.....(중략)...... 불상사건은 북조선의 세력과 통모하고 미군정을 전복하여 사회적 혼란을 유치하려는 일부 책동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것이다. 3·1절을 기하여 폭동을 일으키려는 계획이 있었거니와 경찰을 협박 공갈하면서 3만 명의 군중은 제주성 내에 집결하고 그 일부는 머리에 수건들을 쓰고 모든 행색이 테러행동자의 태세를 갖춘 수백명의 장정 및 시위행렬을 보존할 목적으로 혁대를 전후좌우로 연락시킨 근 1,000명의 학도군을 중심으로 제1착으로는 경찰청 습격태세를 갖추었다가.....(중략)....

군중은 해산을 불응하므로 작년 10월의 쓰라린 경험을 참고로 하여 부득이 발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3·1절 불상사 야기의 계획, 선동, 실행의 주동자 및 총파업의 모략선동 및 실행의 주범자들을 속속 검거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약 150여 명에 달한다...........(중략)........... 그런데 현재까지의 파업상황은 도청 군청 읍사무소 면사무소 12 중 8, 학교 108 중 10, 우편국 12 중 6, 무전국 기타 관공서 10 중 9, 산업기관 13 중 7, 금융기관 9 중 7, 교통기관 5 중 4가 파업을 해제하였다. 군정관리로서 시민과 야합하여 파업을 한 것은 군정포고 2호에 저촉되는 것이요, 경찰관 중에도 시민과 야합하는 추태를 한 자도 있었다.”’ -독립신보 1947년 3월 21일자 기사

#. ‘남의 나라 장수 동상이 있는 나라는’

‘윗것들은/ 밑으로부터 위협을 받으면/ 위협을 받아 재산의 뿌리 권력의 기둥이 흔들리면/ 민중들을 역적으로 몰아붙이고/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그들을 학살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양반과 부호들이 그랬고/ 1950년 앞뒤에 이승만과 그 추종자들이 그랬다/ 이런 것쯤은 알고 있다 먹물인 나는/ 시인인 나는 이렇게 노래할 줄도 안다/ 동전과 권력의 이면에는 조국이 없다고/ 그러나 나는 몰랐다 인천엔가 어디에/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서 있더라는 소리를 듣고/ 그런 것은 미국의 식민지에는 으레 있는 것만으로만 알았지/ 그런 것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줄은 차마 몰랐다/ 그래서 나는 신경림 시인이 '민요기행'에다 담은/ 어느 농부의 노여움을 읽고 그만 화끈 얼굴이 달아올라/ 얼른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남의 나라 군대 끌어다 제 나라 형제 쳤는데/ 뭣이 신난다고 외국 장수 이름을 절에 갖다 붙이겠소/ 하기에 인천 가니까 맥아더 동상이 서 있더라만/ 남의 나라 장수 동상이 서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더만"’ -김남주의 시 ‘남의 나라 장수 동상이 있는 나라는’

▲ 인천상륙 작전 당시 맥아더(가운데).

 맥아더 장군,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우리는 그를  민족의 은인으로 배워왔고 동상까지 세우며 기려왔다. 그러나 과연 그가 민족의 은인인지, 또는 살아생전에 동상까지 세워 기려야 할 만큼 훌륭한 인물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맥아더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켜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한 것은 사실이다.

 1998년  인천지역 청소년 1170명을 대상으로 인천을 대표하는 역사인물을 조사했는데 여기서 맥아더는 20.3%를 얻어 비류백제의 시조인 비류(沸流)의 4.3%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1위를 차지했다. 양담배를 단속하던 1970년대에는 맥아더를 무속신으로 모신 무당이 맥아더에게 양담배를 공양하다가 단속반에 걸렸다는 웃지못할 일도 있었다.

 한 인사가 4월학생봉기 당시 이승만이 하야하자 시위대 속에서 누군가가 “맥아더 장군에게 가자!”라고 외쳐 인천까지 가서  맥아더 동상에 헌화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 같이 인천 자유공원에 가서 꽃을 바친 그 인사는 뒤에 맥아더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고는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고 고백했다.

  맥아더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는 군인도 없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문민우위의 원칙에 도전했다가 해임된 맥아더는 한편에서는 미국의 시저, 또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심지어 신으로까지 추앙받지만, 그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도 연이어 나오고 있다.

 맥아더의 군사적 업적도 객관적으로 평범하거나 수준 이하인 경우가 많았으며, 인간적으로 볼 때 맥아더는 독선적이며, 이기적 기회주의자이자 자아도취적 소아병 환자였다는 평가도 있다. 선글라스에 옥수수 파이프, 팽팽한 모자에 잘 다린 바지로 상징되는 튀는 옷차림에 대해 트루먼은 70대의 5성 장군이 19살 소위같이 하고 다닌다고 못마땅해 했다.

 한국전 당시 대통령도 무시할 정도의 제왕주의적인 태도와 국제정세에 대한 빈약한 판단력 때문에 결국 강제 전역되었다.  맥아더는 이승만 정권 시절 살아생전에 동상이 건립되었을 뿐 아니라 생일이면 신문에 기사가 실릴 정도로 정권에 의해서 찬양받았다. 

#. 박성환의 노래 ‘맥아더 장군은 살인자’

‘남의 나라 인천바다 바라보며 무슨 생각 그리 하시나/ 망원경을 손에 들고 어딜 그리 바라보고 계속 계시나/ 노병은 죽지않고 사라진다 되뇌이며 암기 하시나/ 고향에선 천대받고 내가여기 왜 서있나 묻고 계시나 맥아더!// 사십오년 구월그날 이 나라를 접수한 날 생각 하시나/ 포고문을 발표하고 시민들엔 발포하던 날 생각나시나/친일파들 앞세우고 이 나라를 동강내던 생각하시나/ 통일독립 염원하던 제주도민 학살하던 생각나시나 맥아더! 맥아더// 노근리의 양민들을 쏴죽이라 명령했던 그자 맥아더/ 신천의 양민들을 기름으로 태워죽인 그자 맥아더/ 핵폭탄을 터트려서 이민족을 다 죽이려했던 맥아더/ 이게 무슨 은인이냐 끌어내려 살인자의 동상 맥아더//(후렴) 맥아더 맥아더 맥아더 동상을 끌어내려/ 이제 더 이제 더 저 거짓 우상을 섬기지 마라/ 맥아더 맥아더 맥아더 동상을 끌어내려/ 학살의 동상을 세우지 마라 끌어내려!’ -가수 박성환의 노래가사 ‘맥아더 장군은 살인자’

 ‘제주도민 학살하던 생각나시나, 맥아더’.  한국전쟁 당시 침몰직전의 ‘대한민국호’를 건졌다고 평가되어온 맥아더가 55년 만에 살인자로 몰려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2005년 민중가수 박성환이 ‘맥아더 장군은 살인자’라는 내용의 가사를 담은 노래를 발표했다.

 1998년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인천광역시의 자유공원에 세워진 맥아더의 동상을 비롯, 대한민국 국내에 있는 맥아더 동상의 존치 여부를 놓고 찬반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맥아더를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보느냐, 한국 통일전쟁을 방해한 인물로 보느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2005년 7월에는 맥아더 동상 주변에서 보수 단체와 진보 단체간의 맥아더 동상 사수, 철거 집회를 나란히 개최하였다.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 55주년을 나흘 앞둔 9월 11일 인천 자유공원 일대에서 맥아더 장군 동상의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와 동상 사수를 주장하는 단체의 대규모 동시 집회가 동시에 개최되었는데, 이때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 회원들이 폭력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로 인해 시위대와 경찰 모두 부상자가 속출하고 공원 일대는 난장판이 됐다.

 보수단체와 전국민중연대·통일연대·한총련 등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 회원 4000여명의 충돌이 예상되자 곧 경찰이 투입되었다.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들은 이날 오후 5시15분쯤 자유공원 내 맥아더 동상을 둘러싸는 ‘인간띠 잇기’ 행사를 가지려다 대한민국 경찰관들이 이를 저지하자, 경찰에게 쇠파이프와 2~3m 길이의 대나무를 마구 휘두르고 달걀 수십 개를 던졌다. 시위대가 흙까지 뿌리자 흥분한 경찰이 방패와 곤봉을 휘두르고 소화기를 뿌리며 이에 맞섰고, 양측 간에 투석전까지 벌어지면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동상 사수를 주장하는 단체는  맥아더 장군은 한국을 두 번이나 살려낸 구세주로 평가한다. 일제를 패퇴시켜 식민지에서 해방시키고,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적화에서 구했다는 것이다. 반면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는 한반도 분단을 집행하고, 이로 인해 내전을 초래했으며, 전술적 오류로 피해를 가중시켰고, 대규모 원폭 투하로 한반도를 불모지대로 만들려 했다고 주장한다.

▲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 정막한 '미조리'함상에서 연합군 총사령과 맥아더 장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 대표.

#. 미군정과 3·1절 발포사건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대회’가 열리던 날. 군중 수는 대략 2만5천~3만 명. 경찰은 원래의 제주경찰 330명과 응원경찰 100명 등 430명으로 보강하고 이 가운데 150명을 제주읍내에 배치하였다. 기념행사가 끝난 후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 
 
 도민들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만세!’, ‘입법의원을 타도하자!’, ‘정권은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관덕정 앞에는 응원경찰이 무장을 한 채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경찰이 발포를 한 것이다.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날의 발포는 위험수준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제주4·3의 도화선(導火線)이 되었다.   

 제주4·3은 도민들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일으킨 대규모 무장시위였다. 그런데 사태를 악화시킨 주범은 누구일까? 1947년 3.1절 기념식이 끝난 후  충돌이 있었고 이에 대해 미 군정청은 이를 유혈 진압하여 사망자가 발생 하였다.

 미군정은 3.1절 기념식장의 유혈진압에 반발하여 총파업으로 대응한 도민들 2천 5백여 명 이상 구금하여 그중 3명이 고문으로 사망 하는 등 강경한 정책으로 도민의 반발심을 자극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진압에 나선 경비대장 조차 미군정의 강경대응에 반발할 정도였다.

 결국 미군은 당시 악명 높던 우익 단체인 서북청년당을 제주에 투입하였고 서청은 제주에서 약탈과 강간 등의 만행을 저지르며 제주주민의 분노를 자극하였고 결국 제주 전역에서 수 만명이 살상되는 최악의 비극으로 확산되었다. 제주4·3은 1948년 발발하여 완전 종식되기까지 5년이란 기간 동안 제주 전역에 인구가 9분의 1 이상 감소하는 소위 지옥도(地獄道)를 연출하였다.

 동북아시아의 조그마한 섬에서 발생한 제주4·3은 지역적· 국내적· 국제적 차원의 복잡한 성격을 지난 사건이었다.  1945년 8월 15알 해방과 함께 시작된 남한의 국가건설 과정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양분되어 이념대립으로 인한 정치적 충돌이 유혈충돌로 확산되는 경로를 따랐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제주4·3은 미국의 점령정책 실패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미군정은 그 당시 남한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없었던 친일 경찰을 곧바로 그들의 군정경찰의 골간으로 삼았다. 그것은 그들의 점령목표, 즉 남한에 친소정권 수립을 예방하고 이미 전국에 뿌리를 내린 건준이나 인민위원회 조직을 통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기존의 식민지 경찰체제의 유지밖에 없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미군정이 기존 식민지 행정체제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미 1945년 9월 9일에 공포된 맥아더 ‘포고 1’에 언급되어 있다.

#. 일제물품 반입과 모리행위

 해방 직후 제주도의 특수한 사회현상 가운데 하나가 귀환자의 물품반입과 모리행위이다. 전쟁터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 명  가량이 귀환하였다. 그러나 미군정 초기에는 귀환동포의 물품반입 규정이나 신고절차, 이를 취급하는 기관에 대해서도 명백한 구분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1945년 11월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앞으로 자유롭게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소지품 외에 천엔만 소지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했다. 천엔은 담배 20갑에 해당되는 돈이다. 조선인 노동자의  모든 재산은 그냥 남겨 놓아야만 했다.

또한 귀환자들은 고향에 되돌아 왔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제주에는 주정공장·통조림공장을 비롯해 72개소의 제조업 작업장이 있었으나 1946년 현재 가동률은 55%에 불과했다. 1946년 11월 제주도의 실업자수는 15세이상 인구의 15.3%인 3.013명으로 집계되었다. 귀환자 가운데 일자리를 찾아 다시 일본으로 가는 역류현상까지 빚어졌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수많은 도민의 재산을 밀수품으로 규정하여 몰수하였다. 수십 년간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실어오면 세관, 경찰서 등 무수한 관청을 거쳐 나오는 동안에 벌써 손에 남는 것은 없었다. 사설단체원들은 가택수색을 빙자하여 귀중품을 탈취하고 금품을 강요하며 불법구타·폭행을 끊임없이 자행해왔다.

미국은 전후 한국과 일본을 자신들의 군정 아래 두면서도 두 나라의 교역에 대해서는 제한조치를 취했다. 맥아더 사령부는 종전 직후 귀환 조선인의 휴대물품과 금액을 철저히 제한하였다. 이로 인하여 제주에서의 대일교역은 일제시대에는 '합법'이었으나 미군정 시절에는 '불법'으로 변하는 형국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밀무역을 둘러싸고 민중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악화시킨 것은 바로 모리배와 결탁한 단속기관의 뒷거래 행위였다. 밀무역에 대한 단속기관이 엄격히 구분되지 않자 유관기관들이 너도나도 밀무역 단속에 나섰다. 그 당시 밀무역 단속에 나선 기관들은 경찰·세관·해안경비대·항무서·물가감찰서 등이었다. 이들 기관원들은 밀수선이나 귀환선이나 가릴 것 없이 일본에서 배가 들어온다는 첩보를 얻는 데 열을 올렸다. 이들은 밀반입 물품의 적발보다는 그 뒤에 생기는 부수입에 더 눈독을 들였으며,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 배후에는 모리배들이 득실거렸다.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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