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의 제주신화 이야기] (66) 백주또여성 5

백주또 여성은 현실의 생활을 영위하고 살아감에 있어서 세계의 본질적인 가치들을 쉽게 잊어버리고 사사로운 욕심과 감정에 휩싸이며 사는 사람들에게 경외되는 특별한 존재이다.

이 여성들은 인간적인 원칙들을 삶을 살아가는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사리사욕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한다. 자기 남편이라고, 자기 자식들이라고 해서 편을 들어주기보다는 나무라기를 잘하는 백주또 여성을 특히 우리들의 어머니 세대에서 많이 만날 수 있다.

신화에서 남편에게 '소를 잡아먹는 일이야 예사이지만 남의 소를 잡아먹다니, 소도둑놈 말도둑놈 아닙니까? 살림분산합시다.'라고 요구하듯 백주또 여성은 자기에게 엄격하다. 이는 자기 남편에게 엄격하고, 자기 자식에게 엄격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런 그녀는 아내로서도, 어머니로서도 남다르다.
 
그녀는 아이들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몰아세우지 않는다. 백주또 여성은 설령 혼자이고 가난하더라도 묵묵하고 떳떳하게 아이들을 키웠을 것이며 자녀들은 인간적인 원칙들에 충실한 이 막강한 어머니를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했을 것이다.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들을 최고의 것으로 치장해주지도 않는다.

아이들의 성공이 무척 자랑스럽지만 칭찬너스레를 떨면서 돌아다니지도 않고 여전히 묵묵하게 일할 것이다. 성공을 이룬 능력 있는 자녀들은 이것이 모두 어머니 덕분이라 하고, 어머니는 너희들이 부족한 어미를 가지고도 열심히 살아준 덕분이라고 서로에게 한두 번쯤은 얘기할 것이다.

안팎의 수다에 어울리지도 않고 의논을 나누는 편도 아니지만 마을 일에 협조적이며 공정하고 남을 간섭하지도 간섭당하지도 않으며 살아간다. 그 초연함으로 인해 그녀는 타인들에게는 신뢰감을 주는 객관적인 여성이라는 평가를, 가족에게는 완고하고 정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 쉽다.

이 공정성이 때로는 가까운 사람들을 화나게도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의 움직임마저도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면서도 독립적일 수 있는 이 여성의 남편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또 친구와 다투고 들어오면 우선은 자기가 욕을 먹어야 하는 자녀들은, 이 백주또 어머니를 진짜 내 어머니가 아닐 거라고 울먹거리기도 할 것이다.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이웃으로서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철저한, 남다른 이런 모습들은 날이 갈수록 진국이 되는 백주또 원형의 특질이기도 하다.

미래를 대비하는 절약과 부지런함을 지혜롭게 실천해내는 백주또 여성의 어떤 남편들은 무책임하기도 하다. 항상 여분의 해결방책들을 감쪽같이 준비하는 든든한 그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사인 까닭에, 생활력이 강하고 너무 부지런한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기도 한다. 상대를 의존적이게, 게으르게, 책임에 소원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주또 아내를 가진 어떤 남편들은 의도적이지는 않을지라도 가정의 책임져야 할 상당부분을 아내의 자발적이고 부지런한 삶의 자세 뒷전에 밀어놓게 될 수 있다.

제주도의 경우, 여성들이 가정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서울이라면, 파편화되고 경쟁적인 도시의 사회경제 구조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신선한 기획서를 제출해야 하는 직장도 많지 않고, 사 오천 원이면 집에 갈 수 있고, 관계는 심리적 물리적으로 가깝고, 게다가 생활력 강한 아내들이 오늘도 씩씩하게 집을 지켜 주고 있는 제주의 남편들은 사실 가정 내의 여러 책임감에서 많이 놓여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능력 성취를 위한 가믄장아기의 매진이나 백주또의 사회적 도리와 부지런함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무책임한 남편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를 한다는 것은 상대 남성에게도 본인에게도 바람직한 일이 못 된다.

어이없게도, 가정 경제, 육아, 가사, 부모 공양 등 모든 일을 혼자 도맡아 해서, 너무 잘 해내서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관계 속에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도 건조한데다 표현까지 더디고, 무표정하게 일만 하는 그녀는, 처음에는 당당한 권위와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오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남편과 이웃들은 그녀의 노력과 고생을 당연시하게 된다. 그래서 아내는 한 푼이라도 절약하려 애를 쓰고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는데, 백주또 여성들의 어떤 남편들은 그녀 옆에서 한가하게 세월이나 넘기는 광경들이 많이 만들어져 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 백주또. <홍진숙 그림 >

그녀는 할 수 있어도 미뤄두기도 하고, 못한다고 넘기기도 하고, 힘들다고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 편하기 때문에 곧장 습관이 들어버린 상대에게 회의를 느끼고 점점 멀뚱멀뚱, 무늬만 부부가 되는 것은 백주또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그녀의 원칙과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주변과 강한 유대를 가지는데 이런 경우에도 서로 간의 다정함이나 열정 같은 것들은 배제되어 있다. 단단한 인간적인 신뢰로 맺어져 있기 때문에 별다른 표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애교스러운 여성의 매력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말과 행동이 간소하여 비판 한마디에, 칭찬 하나에도 비중이 실린다. 내성적이라기보다는 꼭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말을 삼간다. 온 몸에 땀이 나도록 밭을 갈고 왔을지언정, 티내는 것은 싫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열심히 일하다 왔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묵하나 한마디 말과 행동의 묘를 알고 있고, 세사에 둔하지 않은 인간적 성숙을 보이는 까닭에 수려한 위엄을 보일 때도 많다. 그녀의 진실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 느낄 수 있고 그래서 더 값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어린 자녀들은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풍부하게 느낌으로써 더욱 안정되고 자신감 넘치게 살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를 무조건 믿어 주고 안아 주는 어머니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하고 행복한 일이다.

가믄장아기의 ‘젊은’ 무심함과는 달리 백주또는 나이든 사람의 깊고 세심한 정을 가지고 있지만, 가믄장아기와 마찬가지로 백주또도 그녀가 가진 마음속의 풍부한 애정을 자주 많이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상대방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고 기대한다는 것을 느낄 때, 그런 그녀에 의해서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은 상상도 못할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피그말리온과 갈라테리아. 1761년경 에테엔 모리스 팔코네. 피그말리온 효과란 상대방에 대해 긍정적으로 기대를 품으면 상대방은 그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리아의 그리스신화에서 유래한다. ⓒGoogle

백주또 여성은 자유롭다. ‘자기’를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방 한 칸, 이부자리 한 채 내로 한정 지어지곤 하는 시공간에서 끊임없이 그녀는 이탈한다.

몸져눕기 전에는 밖으로 나가 일하며, 때가 되면 어김없이 들어오는 밥상은 싫으니, 움직일 수 있는 한 스스로 밥해 먹는다. 자신이 원하고 또 편해서 그렇게 한다. 나이 들어가는 백주또 여성의 모습은 노후의 모습이나 고부간의 갈등, 효에 대한 바람직한 시사점들을 보여준다.

원래 백주또는 농경을 시작하게 한 창조력을 가진 여신이다. 그런데 그녀는 현실적인 삶 자체에 대한 지극한 부지런함과 책임감으로 인해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삶의 다른 영역들을 놓쳐버린다.

백주또 여성들의 현실에 대한 탁월하고도 지혜로운 극복능력과 개척정신, 부지런함으로 인해 풍부한 제주의 민요들과 제주의 애기구덕, 갈옷, 부엌, 장독대와 같은 생활문화와 습속들이 탄생되었지만 동시에 그와는 다른 차원에서 인간 정신을 고양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예술문화에 대한 독창적인 시선을 막기도 했다.

근면절약이 미덕이었던 시대,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정연한 시대는 지나간 듯하다. 그녀가 가지는 의미 있는 삶의 자세는 적극적인 표현, 친밀한 말들, 유머와 애교, 웃음을 통해서 실어 나를 수 있을 때 더욱 의미 있게 확산될 수 있다.

이 여성에게는 웃고 울며 껴안고 수다를 떠는 자세가 필요하다.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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