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의 숨, 쉼] 한가위 파노라마

너무나 무더웠던 여름을 견뎌낸 후의 바람이라 참 달다.  가을바람!!!
해마다 가을이면 부는 바람이니 새로울 것도 없지만, 올해는 참 가을바람이 반갑고 좋다.
거기에 길고 긴 연휴가 주렁주렁 달린 추석이다.
아... 정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적어도 외적인 상황은 그렇다.
그러면 뭐? 뭐가 어쨌다고?
어쨌다는 것이 아니라 오랜만에 우리가 한가위를 보낼 ‘집’을 안팎으로 한 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쉴 날도 많으니 여유도 좀 있지 않은가.

우리의 전통 명절 추석에 ‘집’을 이야기하며 내가 떠올린 사람은 저 멀리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라는 사람이다.
근대 디자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모리스.
(너무나 대단하고 유명한 그의 작품, 문화사적 의미는 관심 있으면 직접 찾아보세요.)
내가 윌리엄 모리스를 처음 만난 것은 몇 년 전 파주 헤이리에 있는 한길사 북카페에서다.
거기서 나는 윌리엄 모리스가 디자인하고 한국도자기가 만든 커피 잔을 샀다. 지금도 그 커피이 나의 아침을 열어준다.
그 후 내가 다시 만난 것은 '집을 짓자'고 결심한 뒤 도서관에서 집을 제목으로 내건 책을 열심히 찾아 읽다가 지난여름 다시 만났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오진 않았다.

‘커피 잔 모리스’와 ‘레드 하우스 모리스‘가 따로 따로 내 머리에서 놀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 지점에서 만난 것은 한 달여 전 아침 이었다. 윌리엄 모리스의 역작 ‘레드하우스’가 실마리였다.

좋은 집안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윌리엄 모리스가 사랑한 여인은 가난한 마부의 딸 제인이었다. 레드하우스는 모리스가 제인과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며 건축가 필립 웹에게 의뢰해 지은 집이다. 레드 하우스의 내부는 모리스가 디자인한 아름다운 커튼 타일 가구 벽지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지만 레드 하우스의 사랑은 아름다운 해피엔딩을 맺지 못했다.

그의 미술적 재능을 깨워준 당대 최고의 화가 로제티도 제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상황이 꼬이기 시작한다. 이후 영국 최고의 이상한 스캔들이 말 많은 사람들을 오랜 기간 심심하지 않게 해주었다. 윌리엄 모리스가 불륜을 눈감고 제인, 로제티와 한집 살이를 한 것이다. 레드하우스를 나와 인적이 드문 메너하우스에서 말이다. 과연 윌리엄 모리스에게 ‘레드 하우스’는 어떤 의미를 가진 집이었을까?

외적으로는 너무나 아름다운 레드 하우스... 그러나 그 속은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채우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집을 채워나가는 것은 겉모양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인가. 집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인가?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다. 지금도 레드하우스의 아름다움은 많은 방문객들에게 ‘아름다운 즐거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끝이 슬프다고 모든 삶이 다 슬픈 것은 아닐 것이다.

집과 사람의 삶에 대한 재미있는 사례가 또 있다. 바로 우리 곁에.

제주에 이주온 청년이 '제주폐가살리기'라는 프로젝트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새싹대장'으로 이번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김영민(34)씨는 5년 전부터 제주에 드나들다가 아예 정착한 건 1년쯤 됐다.

3년 전,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던 김씨는 제주의 이곳저곳을 다니곤 했다. 그러다보니 제주의 빈집이나 폐가가 눈에 들어왔다. 이주민들에게는 제주에서 살 집 구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인데 막상 마을마다 버려진 집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방치된 폐가를 허물고 다시 짓기보다는 조금만 손을 보면 다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일을 벌였다. 지난 5월부터 6개월 동안 도심권을 빼놓고 80여개의 마을을 일일이 조사했다. 제주도 전체 23만 가구 중 1%를 폐가라고 가정해 계산해도 어림잡아 2000여곳. 마을마다 빈집까지 더해지면 숫자는 훨씬 더 늘어난다.

머릿속 구상이 글로 옮겨지고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니 김씨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행 가운데는 부활의 보컬이었던 가수 김재희 씨, 사진작가 이상신 씨 등도 포함됐다.

계획을 뜯어 고치길 여러 차례, 재사용(reusing) 공간(space), 커뮤니티(community), 마을(village), 협동(cooperation)의 개념을 밑바탕으로 깐 '제주폐가살리기프로젝트' 계획안이 만들어졌다. (후략)

제주의소리 6월26일 김태연기자

이 경우는 ‘집’이라는 베이스캠프에서 사람들의 삶, 꿈, 열정 희망이 만난다. 레드 하우스와 다른 느낌이기는 하지만 집에서 사람과 삶이 만나는 것은 같다.

그렇다면 도대체 ‘집’이란 무엇인가?

house와 home처럼 단순하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구분하는 그런 ‘집’ 말고 매년 한가위면 잊지도 않고 형제자매 친인척들이 바글바글 모여드는 그 ‘집’ 말이다.

▲ 한가위 보름달. ⓒ제주의소리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는 아니지만 어쨌든 추석이면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모여든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 살던 형제자매들이 돌아오고 친인척이라지만 평소 얼굴 보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집’을 돌아다니며 추석 제사를 올린다.
그러다보면 절로 각각 그 집안의 이야기가 드러난다. 특별히 많은 말들이 오가서가 아니라 상황이 보여준다.

어떤 집에 가보면 결혼 , 출산 등으로 식구가 더 늘어나 있다. 또 어떤 집에 가보면 취업 결혼에 대한 얘기를 듣기 싫어 슬그머니 무대 뒤로 숨어버리는 식구도 보인다. 한동안 사이가 좋지 않아 입방아에 올랐던 형제가 극적으로 화해해 방긋 웃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병석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인다. 서로에 대한 안부를 묻는 다는 미명아래 상대방과 자신의 삶의 질을 저울질 하는 영리한 사람들도 몇 몇 있을 것이다.
너무나 다양하고 굴곡  있는 삶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하지만 추석 제사의 풍경은 프롤로그다.

진짜 이야기는 그다음 시작된다.
추석 제사를 올리며 파노라마처럼 지켜본 풍경이야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제를 끝내고 각자 집에 돌아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젠 피할 수 없는 내 이야기가 된다.
큰 틀은 비슷하다. 대부분 삼대가 모일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중심으로 형제자매들과 그 배우자, 그리고 자식들. 여기서는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넘침도 부족함도 없는 추석날, 제사를 잘 마치고 모인 집안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다워야 하는데 사실 안  그런 집도 꽤 있을 것이다. 추석 후 아줌마 수다통신을 통해 들려오는 정황을 종합해보면 그렇다.

왜 그럴까,
내 생각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면서 각 세대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문화적 여유가 없어서인 것 같다. 그리고 소통하지 않고 직선으로 내리꽂는 잘못된 권위도 문제다.
내가 살아보지 않아 장담은 못하지만 많은 책들이 전해주는 정보를 종합해보면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삶이 단순했을 것이다. 비슷한 삶의 가치관과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행복을 꿈꾸며 사는 삶.
하지만 요즘은 아니다. 할아버지가 꾸는 꿈하고 손자가 꾸는 꿈이 너무 다르다. 시어머니의 상식이 며느리의 상식과 자주 충돌한다. 가족애를 가장한 일방적인 명령이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한다. 그러다보니 종종 입을 굳게 다무는 경우가 생긴다.
여기서 뭐, 해결책까지는 아니지만 이 상황을 허무는 것은 이것 같다. ‘ 한 집에서 만난 가족들의 사랑, 그리고 소통’ 당연한 이야기지만 상황이 결코 당연하게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 조금 장황하게 집과 삶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추석날을 전후한 집과 삶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이쯤에서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라고 묻는다면 나의 답은 이것이다.
“한가위가 주는 기회의 선물을 받자”

삶은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의 관계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고 상황도 변한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끼리 당연히 갈등하고 반목한다. 하지만 그 갈등과 반목을 계속하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찌됐든 깨고 싶을 것인데 ‘어떻게’가 문제다.
이럴 때 추석이니까, 대보름달이 너무 밝아서라며 슬쩍 넘어가 보자는 것이다. 평소에는 못하지만 추석이니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처음엔 쑥스러울 수도 있지만, 한 번 하고 나면 의외로 상황은 잘 풀릴 수 있다.
아니면 올해는 안됐지만 계속 시도하면 내년이나 내후년쯤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은 넘쳐나는 가족드라마의 명장면 들을 참고 하시라.
드라마니까 일어날 수 있다고 무시하지 말고 .. 있을 수 있는 일이기에 드라마가 된다고 생각하면 쉽다.

그리고 일단 장이 마련되면 본격적으로 이해하고 소통하는 자리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추석 이야기의 에필로그가 될 것이다.

 

▲ 바람섬(홍경희). ⓒ제주의소리

자,
추석이다.
하늘에도 보름달... 마음에도 보름달... 행복의 보름달이  곳곳에서 활짝 웃는 한가위를 꿈꾼다. 바람 맛이 참 달고 단 요즘, 한가위 보름달 맛 좀 봐야겠다. /바람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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