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미국 리만 브러더스 증권사의 파산으로부터 만 5년이 지난 오늘, 미국과 독일이 서로 현저하게 다른 점이 눈에 뜨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양국의 경제, 사회 및 정치적 논의의 초점이 독일에서는 실물 시장에, 미국에서는 화폐시장에 모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독일을 보자. 지난 일요일 총선에서 앙겔라 메르켈의 기독교민주당이 야당인 사회민주당에 압승했다. 2005년에 처음 수상이 된 메르켈은 앞으로 4년간 더 그 자리를 지켜 유럽 최장수 수상의 반열에 오르게됐다.

승리를 이끈 그의 치적은 많다. 대내적으로는 취임 초기 12.1%의 실업률을 6.8%로 끌어내렸고 2009년 이후로 발발한 유로존 재정위기에 있어서는 그리스 같은 나라에게도 구제금융 이전에 경쟁력 강화라는 원칙을 고집함으로써 대외적으로도 국익을 잘 지켰다고 평가받았다. 실업률의 하락은 메르켈의 전임자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수상이 2000대 초에 강력히 밀어부친 '아젠다 2010'의 덕을 입었다고 보아야 공평할 것이다.

2010년을 목표로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추구한, 다분히 신자유주의 성격의 개혁이었는바 그의 사회민주당은 이 때문에 2005년 총선에서 참패하게 됐다. 실제로 이 개혁의 결과 2005년 520만명의 실업자 수는 작년 29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야당은 독일의 낮은 실업률 이면에 저임금 및 불안정 고용이 숨어 있음을 지적했다. 독일은 다른 유럽 나라들과 달리 최저 임금이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은 나라다.시간당 5유로(한화 750원 상당)를 받는 저임금 노동과 가정주부와 학생들의 부업에 불과한 일자리들도 고용통계에 포함돼 있다. 이 점을 부각시켜 야당은 시간당 8.5유로의 최저임금을 공약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실물 경제를 이야기하는 독일

그렇게 되어야 저소득 층의 구매력이 향상되어 이제까지의 수출의존형 독일경제가 내수의존형으로 건건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야당측의 의견과, 그렇게 되면 독일 수출상품의 경쟁력이 일거에 상실될 것이라는 여당의 반대의견 등이 TV토론의 장을 장식하기도 했다.

독일국채의 시장금리가 10년 만기물의 경우 연 1.94%로서 3%에 근접한 미국의 그것보다 월등히 낮고 정부재정도 거의 균형을 이루고 있으니 이런 제목들은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미국은 어떤가?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 대통령은 의회로부터 정부부채의 한도를 증액받아야하는데 의회에서는 민주 공화 양당 사이에 2년 전의 벼랑끝 버티기가 재현되고 있다. 하원을 장악하고 있는 야당은 한도증액의 칼을 오바마 대통령의 의료개혁법을 무력화시키는 무기로 사용하려고 작정하고 있다.

한편 양적완화, 즉 시장에서 매달 거액의 채권을 매입해오던 중앙은행은 이 양적완화의 규모를 축소하는 듯하더니 돌연 현상유지쪽으로 돌아서 시장참여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제까지의 양적완화가 금융자산의 가격을 떠받치는 효과만 낳았을 뿐 실물경기를 자극하는 데 미흡했음을 모를리 없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의 결정이 쉽지는 않았을 터이다.

어떻게든 인플레이션 목표 2.5%가 달성되면 실업률 개선이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사이에 역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필립스 커브(Phillips curve)는 하나의 현상을 설명한 것일뿐 어떤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이론은 아닐 것이다.

한 경제학자가 어떤 집을 관찰하다가 굴뚝의 연기와 방의 온도의 관계를 발견한다고 치자.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고 방은 따뜻해진다. 여기에서 아궁이의 불을 지피는 것은 원인이고 연기가 나는 것과 방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은 그 원인이 가져온 두 개의 결과이다. 이 두개의 결과 상호간에는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연기 피운다고 방 더워지나

만일 이 경제학자가 집 주인에게 방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연기를 피워야 한다고 정책제안을 했다면 웃기는 일이다.

인플레이션은 연기, 실업률 개선은 방의 온도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더 많은 공장이 문을 열고 혈기왕성한 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경제활동에 나서게 하는 이른바 실물경제 측면의 일일 것이다.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독일과 달리 미국이 실물경제보다 화폐경제에 매달리는 이유는 개인과 시장의 자율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세계최강 미국에서는 실물경제는 민간에게 맡기고 정부의 개입은 최소화하자는 앵글로색슨 자본주의의 뿌리가 아직도 너무 깊히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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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내일신문> 9월 25일자 '김국주의 글로벌경제' 에 실린 내용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제주의소리>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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