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의 제주신화 이야기] (71) 강림의큰부인 원형 1

강림의큰부인은 이름이라 생각하여 붙여쓰기를 합니다. 큰 부인은 첫째 부인이라는 자리로 생각하여 띄어쓰기를 합니다. -필자 주

강림은 문밖에도 아홉, 문안에도 아홉의 처를 거느리고 산다.
강림의큰부인은 이 열여덟 중의 첫째 부인이다. 신화의 이 부분은, 가정이라는 곳이 폭력적인 남성지배가 여지없이 표출되는 장소라는 걸, 동시에 가정이라는 공간의 외부 역시도 똑같이 그런 장소가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 ‘인형의 집’ 속 엠마.(루카 구아다그니노/ 아이 엠 러브. 사진출처/ 씨네21포토.)

큰 부인

강림의큰부인 원형은 큰 부인 형이다.
첫째 부인, 호적에 올라가는 여자, 공공연하고도 형식적인 아내로서의 큰 부인이다.

강림에게 염라대왕을 잡아오지 못하면 죽어야 할 위기가 닥치자 동료들도, 열여덟 호첩들도 모두 나몰라라 내뺀다. 막막해지자 강림은 곱게 머리 땋아 시집 올 때 본 후로 안 본 큰 부인 집에나 찾아가보자는 마음이 생긴다.
그렇게 찾아 온 강림에게, 큰 부인은 진지상을 올리고 나주영산 은옥미로 시루떡을 만들어 정성축원을 드리면서, 중요한 일을 하러 떠날 수 있도록 채비해 준다. 강림이 죽자 삼년상에 제일祭日까지 마련하여 도리를 다한다.


그녀는 큰 부인의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으면 된다는 심산인 것 같다. 그녀는 열여덟 호첩들과 아웅다웅 신경전을 벌이지 않는다. 큰 부인답게, 그 자리는 어떤 힘에 의해 주어진 확고부동한 자리이며 여자들끼리의 사소한 신경 싸움 등에 의해 밀려날 자리가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주 본 기억도 추억도 없지만 남편이란 사람이 왔으니 찾아왔으니 정성껏 대한다. 남편이 처한 위기의 상황을 듣고는 요목조목 꼼꼼하게 필요한 것들을 챙겨 준다. 너무나 사랑하는 남편이라서 그렇게 하게 된 것이라기보다는 손님이 왔을 때 주인이 그러듯, 친구가 그러듯 그녀는 별반 감정의 흔들림 없이 큰 부인으로서의 자리에 대응하는 처신을 한 것뿐이다.  

강림도 무심하지만 강림의큰부인도 그에 못지않다. 그런 의미에서 강림의큰부인은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어가며 고생한 본처(本妻)를 이르는’ 조강지처라는 의미는 강림의큰부인에게는 썩 어울리지 않다. 기쁨과 고난을 오래도록 함께, 미운 정 고운 정을 오래도록 나눈 아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사랑으로 존재하고 싶은 엠마는, 자신이 가족이 유지되기 위한 기능적인 한 부분에 불과함을 느낀다. (루카 구아다그니노/ 아이 엠 러브. 사진출처/ 씨네21포토.)

그녀가 지키려하고 있는 것은 다만 큰 부인이라는 자리다.
그녀는 한 남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공인하는 아내, 큰부인의 자리에 자기존재를 이입하고, 그것과 대화를 나누며 용기를 얻고 자기를 조절하며 살아간다. 사랑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아주 자연스러운 생각조차 가져 볼 기회도 없었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그녀의 자리를 지키려면 자기개성이나 이미지의 부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열여덟 호첩들과 놀아나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자신을 함부로 대하며 모욕하고 어쩌면 이따금 손찌검까지 했을 테지만 큰 부인은 거기에 반항하지 않는다. 남편이나 시댁에 어떤 위협도 되어서는 안 되고, 자신에게 불만을 가지게 해서도 안 된다. 대들었다가는 호적에서 내쳐지기 십상이니 도리질이다. 열정을 가지는 것도 위험하게 비치니, 그것도 제어한다. 언제나 착하고 무슨 일에나 너그러워야 한다. 무조건 감싸 안으면서 자신의 감정,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길 만이 열여덟 호첩을 거느린 남자의 큰 부인이란 자리가 유지되고 또 스스로 유지시키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에 대해 어떤 의욕도, 감정도 없다. 속상함과 억울함을 하소연하지도 않고, 마음을 다하여 남편을 돕지도 않는다. 남편은 이미 막강한 구조다. 그 막강한 구조 안에 들어가 자신도 구조의 한 부분이 되기로 작정한 그녀는 사랑에 대해서도, 인생사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다. 다만 큰 부인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을 수행해내면 되는 것이다.

▲ 획일적인 미소, 말 잘 듣고 예쁜 아내 로봇만이 사는 마을 스텝포드. (프랭크 우즈 감독/스텝포드 와이프)


구조악

마땅히 여자는 절대 남편에게 거역하지 않아야 하며, 행여 부정이나 탈까, 군소리도 없이 게다가 정성껏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가부장제 문화가 이런 큰 부인을 탄생시켰다.

사회는 큰 부인을 ‘선’으로, 열여덟 호첩들을 ‘악’으로 끊임없이 호명하면서 구조화, 제도화시킨다. 선과 악의 판단에 ‘구조’는 제외되고 망각된다. 그 구조 안에 이미 포함된 ‘남성’ 역시 선악의 판단에서 제외되고 망각된다. 여성들과 여성들끼리 일어나는 현상들만 그 평가대상으로 남겨 놓는다. 그렇게 첩은 내몰아야 하는 절대악이 되었고, 큰 부인은 절대선의 행동지침이 되었다.

첩으로 들어간 어떤 한 여자가 절대적으로 악 일수도, 절대적으로 악 일리도 거의 없다. 거듭거듭 눈여겨보아야 할 절대악은 ‘첩’이 아니라 ‘첩’과 ‘큰 부인’을 만들어 낸 구조와 그 구조가 만들어 낸 가부장제라는 것이다.  


계산된 순종, ‘관례’대로 살아가는 일

강림이 염라대왕을 잡아오는 엄청난 일을 맡게 된 것은 ‘문 안에도 아홉, 성문 밖에도 아홉, 열여덟 여자를’ 거느리고도 용케 잘 살아가는 일이 똑똑한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림이 하늘의 옥황을 잡아와야 하는 엄청난 일을 처리해야 하자 모두들 도망가 버린다. 강림의 똑똑함은 허상에 불과한 셈이다. 큰 부인이 여러 방도로 도와주고 정성껏 채비해주는 일들을 하지 않았다면 강림은 옥황을 잡아오는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강림의큰부인은 모든 집안의 대소사를 깔끔하게 처리하고, 어지러운 주변을 정리하고, 똑똑하고 시의적절한 계획과 몸과 마음을 다한 도움으로 남편의 성공을 이끌어내지만 그녀의 똑똑함이나 수고, 인내는 당연한 것으로 치부될 뿐이다. 누구도 큰 부인의 지혜로움이나 수고를 기억하지 않는다. 성공은 강림만의 것이다.


대부분이 그러하고, 강림의큰부인 역시 이런 사회의 ‘관례’를 완벽하게 좇는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입 한 번 뻥긋 하지 않고 화도 내지 않는다. 편안하고 당연한 마음으로 예를 다하고, 관례를 좇는다. 큰 부인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계산된 순종’이기 때문이다. 
계산된 순종은 구조를 더욱 단단하게 하는 데 복무하며, 구조악을 자연스러운 것 인양 존재하게 하고 그것들에 눈감고, 보지 못하게 한다. 결국 강림의큰부인은 온 몸을 바쳐, 아니 온 마음을 바쳐 나쁜 강림/구조악을 위해 복무한 것 뿐이다.


지배와 그 지배의 최면적 힘, 폭력과 순종은 아주 가까운 관계이다. 많은 강림의큰부인들이 자신들의 큰 부인 자리에 내리꽂힌 폭력을 무시하려 든다. 지배에 순종해야 자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걸 배워왔기 때문이다.


강림의큰부인이라는 한 여자는 없다. 그녀는 큰 부인이라는, 강림을 구성하는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개체로서의 강림의큰부인은 없다. 그런 강림의큰부인에게, ‘구조’ 속의 강림이 아주 자연스러운 폭력을 일삼고, 사랑이라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지 않음은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일방적인 상대의 부정과 폭력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개체들의 존재와 개성이 부재하는 사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모순을 노정시키게 된다. 결국 세상의 반쪽들은 큰 부인이라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계산된 순종’이라는 자기소외의 길을 걸어가면서 그에 대한 비용을 어떻게든 치러내야 한다. 빗겨나갈 것 같지만 나머지 반쪽들에게도 그건 마찬가지다.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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