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범 칼럼> ‘괸당’정치와 세대교체

제주 정치판에 밑천을 들이지 않고 대박을 터뜨리는 장사가 있다. 이른바 괸당 정치다. 본래 경조사를 함께 돌보는 친인척을 뜻하던 ‘괸당’이 우리 지역의 기성 정치인들에 의해 선거에서 필승을 보장하는 ‘전가의 보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혈연도, 연고도 없이 경조사 집이나 기웃거리며 괸당의 끈끈한 친족 감정을 심는데 성공하기라도 하면 선거 때 짭짭한 재미를 보는 게 이 ‘괸당’ 정치다. 일부 정치인들이 공사다망한 와중에도 만사를 제쳐두고 큰일을 치루는 집이면 무턱대고 찾아가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몇 시간이고 진을 치고 앉아 있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보노라면 과연 제주도에서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일면식도 전혀 없을법한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깊은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을 보면 괸당 정치인들은 부처님이나 예수님 혹은 공자님에 버금가는 성인들이거나 아니면 ‘악어의 눈물’을 흘리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군자는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지 않는다는 옛말도 있지 않는가.

괸당정치의 폐해

극단적인 괸당정치는 선거판에서 사이비 괸당들과의 얄팍한 감정만 제외하고 후보를 선택하는 중요 기준인 정책공약과 인물 그리고 도덕성 등을 모두 빨아들여 버리는 이른바 블랙홀로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본질적 기능을 원천적으로 마비시켜 버린다. 

단지 우리 집의 경조사에 어느 후보가 더 많이 왔다 갔는지 여부가 유일한 판단기준이 돼 버리면 정치인들은 지역의 미래 구상과 정책 개발 등 만사를 내팽겨 치고 선거민들의 집에 달려가 날이 새도록 함께 술잔이나 기울이며 환심을 사는 게 더 중요한 일이 돼 버린다. 이쯤 되면 21세기 선진제주 도정의 대표를 뽑는 선거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서 삼국시대 초기에나 있을 법한 부족장 뽑기에 다름없게 되지 않을까? 

기존 정치인들의 재직시절 공과를 논하기 이전에 우선 사(私)가 들어간 패거리 정치의 폐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정실인사에 의한 측근 챙기기와 편 가르기, 지역분열 및 지역감정 조장 등 이들 정치인들의 행태는 공정성을 기본적 의무로 규정하는 공무원의 행동강령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린다. 또 “공무원들의 줄 세우기 관행이 횡행하는 수직사회의 구조 속에는 사회의 다양한 부분들이 자율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토양이 이뤄질 수 없다”는 한 정치학전문가의 비판도 새겨들어야 한다. 

괸당정치가 아무리 스킨십 정치이니 밑바닥 민심을 위한 정치이니 강변해도 정치인의 시야가 괸당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다면 ‘나무를 보지만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요원한 세대교체

가장 큰 폐해는 괸당정치가 능력과 자질에 관계없이 지역에서 오래 공직에 활동한 정치인일수록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제주도가 전국에서 정치인들의 세대교체가 가장 더딘 것도 바로 이런 점이 큰 몫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방자치제가 실시 된지 벌써 이십년이 다됐다. 강산이 변해도 두 번이나 바뀌었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제주 정치판의 시계바늘은 아직도 1990년 중반의 자리에서 한 눈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서 있다. 그 위세가 언제나 영원할 것 같았던 중앙 정계의 거목이었던 ’3김들‘도 정계에서 물러 난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 지역에서만큼은 민선 초기의 올드보이 세대들이 노령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현직을 굳건히 지키고 있거나 차기까지 넘보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전직, 현직 도지사들의 업적을 폄하하거나 그분들의 물리적인 나이만을 갖고서 정계은퇴를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분들이 지금까지 보여줬거나 현재 내세우고 있는 정치철학과 기본정책들은 모두 8,90년대의 철지난 개발지상주의와 성과중심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대착오적 개발지상주의

그동안 제주도의 현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의 운명까지 좌우할 수 있는 외국자본투자유치나 군사기지 건설 같은 중차대한 정책들을 제대로 된 검증 절차나 충분한 민심수렴 과정도 없이 성급하게 졸속으로 밀어붙인 것만 해도 그렇다. 이로 인한 후유증과 부작용이 만만치 않고 도민들 간 갈등과 대립도 아주 심각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정치인들이 반성하고 자중하기는커녕 오히려 낙후된 지역의 정치의식에다가 이제는 기존정당의 힘까지 빌어서 차기를 넘볼 속셈이다. 주민들로부터 도정 능력과 자질에서 낙제점을 받더라도 한 정당의 ‘묻지 마’ 고정표의 터보엔진을 장착하고 사이비 괸당들을 앞세워 도청을 향해 돌진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개발하지 않는다면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냐“는 현 도지사의 말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개발지상주의는 다른 여러 심각한 문제점들을 차치하고라도 ‘계속 굴러가지 않으면 넘어지는 자전거’와 같이 언제나 위태로운 경제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내실 있는 성장정책을 통해 도내자본을 육성하면서 착실하게 지역경제를 발전시켜나가는 대신, 단기간에 성급한 외형적인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외부에서 무분별한 투자유치를 하다가는 결국엔 경제의 악순환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더욱이 섣부른 투자 유치로 지역경제가 흥청망청하는 동안 외부자본들이 단물만 빼먹은 후 갑작스레 빠져나가기라도 하는 날이면 지역 경제에 잔뜩 꼈던 거품이 빠지면서 현재 일부 개발도상국들의 산업공동화 현상이 미래의 제주도의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또 투자유치를 위한 무차별적인 개발 허가로 제주도민들의 영원한 자산이어야 할 아름다운 자연과 경관이 처참하게 파괴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도민들의 우려와 불만이 커지고 있다.

아름다운 마무리 

사회간접자본이 부족했던 8,90년대까지는 그분들의 ‘밀어붙이기’식 개발주의가 유효했지만 지금은 바야흐로 실속 없는 외형적 성장보다 주민들의 개인적 삶의 질을 더 중시하는 공공정책과 주민복지 시대로 접어들었다. 한라산 중산간의 아름다운 경관도 개발로 파헤쳐지기보다 있는 그대로 보존해서 도민 모두가 대대손손 공유하는 무형의 공공 자산으로 인식하는 시대다. 

개발주의로 현 시대를 선도하는 것은 마치 ‘그물로 바람을 잡으려 하는 격’이 돼버린 것이다.  

결국 필자도 한때 올드보이 세대의 정치인들을 지지했던 한 도민으로서 아쉬운 일이지만 이제 그분들의 시대적 사명이 끝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괸당정치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정치세대로 진행돼야 할 때다. 도정의 새로운 수장은 새 시대의 흐름을 읽고 도민들에게 가장 바람직하고 합당한 미래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인물이어야 한다. 

제주도의 정계 지도자로서 그분들의 마지막 임무라면 제주도민들이 괸당정치의 폐해를 타파하고 훌륭한 인품과 뛰어난 능력을 갖춘 새 인물을 선출할 수 있도록 불출마의 결단을 내림으로써 도민의 선거문화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책임을 다하는 일이다.  

이제 민선 초기의 정치인들은 더 이상 선거를 통해 도민들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미련을 깨끗이 버리고 아름답게 정계인생을 마무리를 해야 할 적기다. 아직 도민들 모두로부터 박수를 받을 수 있을 때 떠나야 한다. 현재의 제주도가 있기까지 그분들의 업적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으며, 앞으로는 그분들이 오랜 경륜을 바탕으로 도정의 후방에서 우리고장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과 조언을 해주기를 바란다. 

▲ 김헌범 제주한라대학 교수협의회 감사·조교수.

그분들이 사심(私心)을 훌훌 벗어버린 훗날에도 경조사 집에서 주민들과 한데 어우러져 격의 없이 폭넓은 연고의 정을 함께 나누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울 것이다. 그때는 필자도 그분들에게 기꺼이 소주 한 잔을 바치고 싶어지리라. / 김헌범 제주한라대학교 교수협의회 감사·간호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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