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시장, 걸으멍 보멍 들으멍](10) 45년 역사 ‘서문고추’ 박옥순 할머니

<제주의소리>의 주말 코너 ‘걸으멍 보멍 들으멍’에서 제주 곳곳을 누비며 할망 하르방들의 소박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온 인터뷰 작가 정신지가 이번엔 제주 전통시장에서 걸으멍 보멍 들으멍 글을 쓴다. 그녀는 일본에서 12년간 유학생활을 했고, 그 사이 유목민처럼 세계 17개국을 떠돌며 사람과 사회, 지역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일본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지역연구학) 과정을 수료한 그녀가 타고난 역마살을 내려놓고 지난해 초 고향 제주로 돌아와 할망 하르방들을 만나는데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왔다. 이제 그 발길을 잠시 전통시장으로 돌려 올해 문화관광형시장에 선정된 제주서문공설시장에서 상인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펜 끝이 전하는 시장사람들의 사람냄새 진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 인생이 고추 덕분에 행복하고 고추 때문에 불행하다는 '서문고추'의 박옥순 할머니(76), 제주에서 고추, 하면 이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는 못 말리는 고추 박사님이다. 서문시장에서 45년째 계속 되고 있는 할망의 서문고추는 가족경영회사로 그이의 아들과 며느리, 남편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내 인생은 고추 덕분에 행복하고 고추 때문에 불행해.” 고추에 쓰는 신경의 십분의 일만 자식들에게 썼었어도 지금보다 훨씬 훌륭한 어머니가 되어있을 거라며 할망은 가끔 고추가 얄밉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늘 빨갛고 예쁘게 잘 여문 고추를 보면 하루 일진이 좋고, 고추를 들여오는 날이면 과연 어떤 물건이 올까 전날 밤부터 잠을 설치곤 한다. 서문시장에서 고추를 팔기 시작한 것이 벌써 45년째. 박옥순 할머니(1938년생)는, 제주도에서, 아닌 대한민국에서 고추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못 말리는 고추 박사다.

“난 일요일에 장사 안 해.” 말해 놓고도 할망의 가게는 휴일에도 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가게와 살림집이 한 건물 안에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 놓는 거라고 하지만, 그러다가 손님이 말린 고추를 들고 찾아오기라도 하면 어떤 물건을 가져왔는지가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기계를 돌려 갈아낸 고춧가루를 손님에게 건네면서도, 그냥 아무 말 없이 건네는 법은 거의 없다.

“이 고추는 말릴 때 잘못 말렸거나, 비 오는 날 처리를 잘 못했거나 해서 조금 곰팡이 냄새가 나요. 내가 원래 일요일은 장사 안 하는데 특별히 그냥 해드렸어요. 냄새난다고 먹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음부터는 말리고 나서 그냥 두지 말고, 날 좋은 날 바싹 말리거들랑 바로 갈러 오셔야 해요.”

▲ 서문고추 박옥순 할머니는 고춧가루에 관한한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일년을 두고 먹을 고춧가루인 만큼 할망은 손님들이 가져오는 고추에도 관심이 많다. 좋은 건 좋다고 나쁜 건 나쁘다고 일침을 넣는 역할도 그이의 몫. 자신이 아는 지식을 손님에게 나누어주며, 진짜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유해왔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박옥순 할머니는 너무 너무 솔직하다. 맨눈으로 봐도 아무런 이상이 없고, 손님이 아무리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보아도 그것은 평범한 고춧가루 냄새일 뿐. 그렇다면 말없이 갈아주고 돈만 받으면 될 것을, 일일이 어떻게 말리고 어떻게 보관하고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성심성의껏 강의(?)를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미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고추를 갈러 오는 손님도 매한가지. 다른 가게에 오는 손님 같으면 ‘내 고추 내가 갈러 왔는데 무슨 잔소리?’하며 기분 나빠할 수도 있지만, 할망이 고추에 관해 하시는 말씀이라면 뭐든 귀담아듣고 ‘네, 사장님. 다음부턴 꼭 그럴게요.’ 하신다. 마치 잘 못 해 온 숙제를 지적해주는 선생님과 말 잘 듣는 학생을 보고 있는 듯한 이 광경은, 오로지 서문고추에서만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풍경이다. 그나마 할망이 갈아주겠다고 하면 합격이지만, 때때로 할망에게 불합격당하는 고추를 가져오는 손님들도 있다.

“글쎄, 어제는 누가 고추를 갈러 왔는데 아무리 봐도 내가 봤을 땐 그것으로는 도저히 고추장을 담을 수 없는 고추인 거야. 그래서 손님한테 이거 다시 가서 바꿔오든지 버리든지 하라고 그랬거든. 양심에 찔려서 도저히 나는 못 갈아주니까. 분명 담가도 맛이 없을 것이니까. 나는 손님한테도 항상 솔직하게 그렇게 말해. 다들 고추에 관해 잘 몰라서 그러니 조금이라도 많이 아는 내가 가르쳐줘야 할 거 아니야? 근데, 그러고 나면 항상 고추 판 사람이 열 받아서 나한테 달려올까 걱정도 돼(웃음). 사실 그 고추를 판 사람은 중간에서 판 죄밖에 없거든. 그래도 말이지, 어떻게 그런 고추를 팔 수 있느냐 이거지 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대충 팔고 대충 먹으려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 고추가 한국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음식 재료인데, 그런 먹거리를 대충하면 안 되잖아?”

진지하신 할망의 고추 철학(?)에 의하면, 고추만큼은 정말 정직한 사람만이 팔 수 있는 물건이란다. 그도 그런 것이 한국인의 밥상에 일 년 내내 평생을 오르는 것이 김치이고, 고춧가루 양념이다. 다른 음식은 먹고 치워버리면 그만이지만, 김치는 한 번 담그면 일 년을 먹어야 하고, 그런 김치의 맛을 좌우하는 것이 다름 아닌 고추이기 때문에 할망은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고.

▲ 묵묵히 고추를 다듬는 박옥순 할망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빨간 고추 물이 들어있다. 저 손을 움직이며 할망은 가족을 먹여 살리고 오 남매를 길렀다. 달인의 길도 멀고 험하지만, 어머니의 길도 멀고 험한 걸까? 할망은 늘 일 때문에 바빠 좋은 엄마가 되어주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지금으로부터 44년 전, 할망과 고추와의 만남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었다. 당시만 해도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김장 문화가 지금처럼 보편적이지 않았다. 따스한 날씨 덕에 일 년 내내 야채를 먹을 수 있는 제주에서는 굳이 김장을 담가 보관해 놓고 먹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고추장도 마찬가지다. 제주사람은 된장을 고추장보다 즐겨 먹었기에 사실상 고추는 제주사람들의 식단에 그리 중요한 재료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를 거치며 냉장고가 점차 보급되고 제주에서도 김장하는 집이 점점 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이 할망이 장사를 시작한 시기와 맞물렸던 것은 우연의 일치였지만,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시작한 고추장사다.

“제주도 사람들은 김장을 잘 안했고, 육지보다 김치를 잘 안 먹었었는데, 우리 집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 때문에 6.25전쟁 전부터 1.4후퇴 때까지 잠시 서울서 산 적이 있었는데, 그리고 나도 시집가기 전에 편물 일을 하면서 잠시 부산에서 산 적이 있어서 우리 집에선 항상 김치를 즐겨 먹었었지. 그래서 처음에는 정말 그냥 집에서 쓰는 고추를 장에 내다 팔았거든.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파는 고추가 좋았는지, 사가는 사람이 있더라고. 그렇게 고추장사를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장사가 잘 되었던 것은 아니야.”

예나 지금이나 서민들은 싸고 양이 많은 것을 원하지만, 할망의 장사는 늘 변함이 없다. ‘좋은 고추를 제값 주고 농가에서 들여와 제값 받고 파는 방식’이 44년을 이어져 오고 있다. 싸고 많이 주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들은 싼 것 속에 나쁜 것이 섞여 있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간과한다. 그러니 좋지 않은 국산 고추에 중국산을 섞어 대량에 싼값으로 판매되는 것이 당연시된 요즘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진짜’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꼭 서문 고추를 찾는다. 믿음이 쌓이고 손님 층이 다양해지면서 서문 고추는 대를 이어 가족형으로 규모를 확장하게 되었고, 지금은 4남 1녀 중 두 아들과 며느리들이 합류한 가족경영회사가 되었다. 

 

▲ 한국인의 밥상에 일년 내내 평생을 오르는 것이 고춧가루다. 좋은 고추를 제값 주고 들여와 제값 받고 파는 방식이 박옥순 할망의 철학. 그러니 진짜 좋은 고춧가루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예나지금이나 믿음직한 고추할망을 찾아 온다고. 빨갛게 잘 익은 고춧가루 뒤로 고춧가루를 빻는 기계들이 사이좋게 늘어서 있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 휴일에도 부지런히 가게일과 집안일로 바쁘신 '서문고추' 박옥순 할머니가 자신이 파는 고춧가루로 직접 깍두기를 버무렸다. 그의 말에 의하면 맛있는 김치는 고춧가루의 맛에서 승패가 결정나는 법. 시간이 지나도 뒷맛이 깔끔하고 색이 변하지 않는 것이 좋은 김치라는데, 먹어보니 그 맛이 일품이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살림하는 사람들은 알아. 왜 좋은 고추를 제값에 주고 사는 것이 중요한지. 아무리 아껴야 잘 산다고 해도 아낄 게 있고 안 아낄 게 있거든. 김치나 고추장을 담아보면, 우리 집에서 사간 고추로 만든 것이 맛이 좋다고 손님들이 그래. 그렇게 먹어본 사람들이 일 년에 한두 번씩 와서 고추를 사가기 시작한 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일 뿐. 서문시장은 원래 작은 동네시장이니까, 구도심에서 점점 사람들이 떠나가고 시장에 손님이 없어지면서 우리 장사도 안 되려니 했어. 그런데 이사 간 사람들까지 찾아와서 꼭 나한테서 고추를 사가더라고. 육지로 간 사람들은 택배로 주문도 하고…. 고추장사는 원래 그런 거 같아. 그 집 밥상 일 년 치의 맛을 책임져야 하는 거! 그 커다란 책임을 지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아무 고추나 팔수가 있겠어?”

고춧가루가 좋거나 나쁘거나 하는 논란이 아닌, 진짜인지 혹은 가짜인지 하는 것이 논란이 되는 요즘 세상이 할망은 무척 슬프다. 할망 말씀에 의하면, 세상에 가짜 고추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추는 그저 흙을 뚫고 자라난 씨앗이 햇살과 물을 먹으며 맺어놓은 자연의 결과물일 뿐. 거기에 좋고 나쁨, 진짜 가짜를 논하게 된 세상 자체가 그이에게는 이상해 보인다는 말이다. 맛이 없을 것 같으면 수확을 안 하면 되고, 질이 나쁠 것 같으면 정성껏 잘 길러서 좋게 하면 되는 거다. 그러면 되는 것을, 이상한 첨가물을 넣고 섞어서 국산 고춧가루라고 속이거나, 아무렇게나 길러서 파는 일부 못된 장사꾼들의 마음이 가짜라고 할망은 말했다.

“아니, 세상에 고추가 무슨 죄야? 현재의 이익만을 위해서 그런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게 가짜지. 한 나무에서 난 고추도 얘 다르고 쟤 다른데, 어떤 건 진짜가 되고 가짜가 되는 일이 어디 있을 수 있어? 정말 큰 벌을 받아 마땅한 건 사람들의 나쁜 마음이지. 한 배에서 나온 자식을 이놈은 진짜 내 자식, 저놈은 가짜 자식 이럴 수 있겠어? 그런 나쁜 짓 하는 사람들 마음이 가짜지. 사실 그렇게 하는 사람도 그냥 인간일 뿐, 가짜는 아니거든.”

▲ 잘못 말린 고추를 가져온 손님에게 일일이 말리는 방법과 보관하는 방법을 설명해주는 할망. 마치 잘 못 해 온 숙제를 지적해주는 선생님과 말 잘 듣는 학생을 보고있는 듯한 재미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그렇게 말하며 할망은 미소 짓는다. 한순간도 손을 쉬지 않는 그이는 말을 하면서도 고추를 다듬고 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허리도 다리도 아프다지만, 아파도 아프다는 말 한마디 않고 묵묵히 일하는 그이에게 살며시 여쭙는다. “할머니, 이 일은 도대체 언제까지 하시려고요? 자제분들도 계시는데 이제 좀 쉬시지?” 그랬더니 큰일이라도 날 듯한 말투로 나를 빤히 쳐다보시며 하는 말씀.

“너도 이렇게 내 이야기를 듣고 좋은 글을 남기고 싶지? 사람들이 읽어주고 좋아해 주는 근사한 이야기를 쓰고 싶지? 나도 마찬가지야! 하하. 이게 나한테 주어진 일인데 늙었다고 안 하면 어떻게 해? 나는, 내가 죽으면 그때 정년퇴직! 우리 자식들도 그건 잘 알아. 아무리 자기들이 나와 함께 고추장사를 해왔다고 한들, 다들 너무 잘 해주고 있지만, 아직 나만큼 고추를 사랑하진 못할걸? 눈으로 보고 코로 살짝 냄새만 맡아도 고추가 좋은 고추인지, 누가 어떻게 얼마만큼의 사랑으로 기르고 말렸는지, 아직 나만큼은 모를 거란 말이지. 어휴, 그렇지만 단지 장사하는 것의 십 분의 일만 신경을 써서 자식들을 길렀어도 지금보다는 우리 자식들 삶이 많이 달라졌을 텐데. 엄마 때문에 고추 장사나 하고 있고, 그게 정말 후회스럽고 미안해. 나는 이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말이지, 음…, 아무것도 안 하고 아이들만 기르는 그런 진짜 엄마로 살고 싶어. 애들 밥해주고 학교에 보내고 뒷바라지만 하는 그런 엄마…, 정말 엄마로 말이야.”

 

▲ 정신지 인터뷰작가

묵묵히 고추를 다듬는 할망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빨간 고추 물이 들어있다. 자세히 보니 양손에 붙인 파스에도 빨간 물이 들었다. 작은 저 손을 평생 움직여가며 할망은 가족을 먹여 살리고 다섯 남매를 길렀다. 손주들은 저 멀리 바다 건너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마음껏 자신들의 꿈을 펼치고 있고, 할망이 꿋꿋이 지켜온 서문고추는 제주도에서 가장 유명한 고춧가게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을 고추 하나로 이루어 낸 할망임에도 불구하고, 제주 최고의 고추 달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이는 자신으로 인해 애꿎은 가족들의 삶이 힘들어졌다고 미안해한다. 달인의 길 보다 더 길고 험한 것이 어머니의 길이라 그런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 넓은 세상을 두루두루 걸어야 세계관이 넓어진다고 생각하지만, 할망을 보며 생각건대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한 지역에서, 오로지 한 가지의 물건에 평생을 걸고 외길을 걸어오며 그이는 고추 하나로 생을 통달하지 않았는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상인의 길과 어머니의 길을 동시에 걸어오며 잠시도 쉬지 않았던 할망에게 참 많은 것을 배운다. 진정한 고추 박사, 박옥순 할망의 앞길에 늘 건강함과 즐거움이 가득하기를!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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