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후 칼럼> 단체장·토호세력 ‘동맹·지배’ 합리화...언론은 ‘홍보매체’로 전락

제주도 서귀포시 한동주 전 시장의 ‘우근민 지사에 대한 지지 유도’ 발언이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사회는 물론 전국적인 이슈로 확산되었다. 불법선거운동 혐의로 직위해제되고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한 전시장은 ‘지지를 유도하는 발언을 한 적이 없다’며 자신의 발언을 처음 보도한 <제주의소리>를 상대로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와 함께 10억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조정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번 사태는 공공영역에 대한 언론보도와 이를 전면 부인하고 법정에 끌고가서 시비를 가리겠다는 언론과 공인 간의 전형적인 언론소송으로 치부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지방자치에 적신호가 켜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다중이 모인 자리에서 지방자치를 무시하는 발언을 거리낌 없이 토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점에 놀라울 따름이다. 제주 공동체의 중요한 자산인 ‘괸당’문화를 악용한 연고주의, 패거리 정치와 편가르기ㆍ반대편 배제, 매관매직, 부정선거 획책 등 지난 20년동안 실시해온 지방자치의 누적된 병폐가 낱낱이 까발려졌다.

지방자치가 과연 시민의 참여 확대를 통해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최선의 제도인지 되묻고 싶다. 오래전부터 학계에서는 지방자치와 민주주의의 연관성에 대한 긍정론과 부정론이 맞서왔다. 긍정론은 지방자치가 정치 민주화를 촉진하고 행정의 효율성과 주민의 자율성을 제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반대론은 지방엘리트의 전횡, 주민의 소극적 참여, 행정의 비효율성 때문에 중앙 권한의 지방 이양이 만능이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무리한 발상이라고 강조한다.

서귀포 전시장의 발언논란은 부정론에 힘을 실어 주는 기제(機制)가 될 수 있다. 일부 언론은 과잉자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제주특별법’의 개정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의 풀뿌리 민주주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지방정부의 권력은 선거에서 이긴 단체장에게 집중된다. 지방의회의 견제 기능이 있지만 미약하다. 도지사는 인사와 예산을 주무기로 지역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통령’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방자치가 지역 소수 엘리트와 토호가 결탁한 동맹세력의 지배구조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정계층과 세력이 지방 권력을 장악, 사유화하고 있고, 지역사회가 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모양새다. 그야말로 지방자치는 옛날 영주들의 손안에 정치ㆍ경제 권력이 집중된 봉건시대로 회귀하는 ‘재봉건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새로운 봉건영주를 향한 복종이 강요되는 시대가 도래 했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봉건적 질서로 되돌아가는 ‘재봉건화’ 현상은 지방의 공론장에서 두드러진다. 독일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여론이 형성되고 결집되는 민주주의의 핵심 영역이라고 정의한다. ‘재봉건화’는 공론장에서 정부ㆍ지자체 등 공적 권력의 통제와 간섭이 강화되고, 언론과 시민사회의 자율성은 약화되는 현상을 표현한 말이다. 국가의 비대한 관료주의가 공론장을 장악하게 되면 여론조작과 일방적 선전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공론장은 언론의 자유와 시민의 적극적 참여가 없으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언론의 자유는 정부ㆍ지자체와 기업, 사회 지배집단, 사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야 제대로 보장 받을 수 있다.

작금의 지방언론 환경은 언론 자유를 위협할 정도로 매우 열악하다. 어려운 지역경제 사정 때문에 지역언론의 경영은 더욱 악화되고, 언론으로써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지역언론의 권력화를 고민하는 일은 먼 옛날의 낭만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지역에서 행정기관만이 언론사의 경영 악화를 막아줄 수 있는 젖줄이기 때문에 지자체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다. 자치단체장이 지역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봉건적 구조가 고착화된 것이다.

이러한 결과, 제왕적 권력을 갖고 있는 단체장과 지역언론 사이에 일방적 갑을 관계가 형성되었다. 도지사의 권력이 절대화되면서 홍보예산을 미끼로 언론 보도를 간섭하고, 기자들을 호불호(好不好)로 나누어 차별적으로 관리하거나 언론사 인사에 영향을 미치는 비정상적인 행태가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다. 지역 공론장은 지자체가 담론을 생산, 주도하고 언론은 뒤따라가는 형국이다. 지역 언론은 비판 감시를 소홀히 하고, 지자체에서 생산하는 보도자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홍보매체로 전락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생존에 급급한 지역언론은 지자체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일을 주저한다. 제주 소나무 재선충 확산의 뒷북치기 보도, 강정해군기지 갈등에 대한 방관적 자세 등이 대표적 사례다. 현재 제주는 자연환경의 보존과 개발, 외자유치, 복지확대, 일자리 창출, 내년 지방선거 등 제주의 미래를 좌우할 현안이 산적해 있다. 이러한 과제는 지역 공론장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 특정세력 중심으로 정치적 자원이 독과점되지 않도록 합리적 배분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지역언론이 언론 본연의 기능인 주도적 의제 설정이나 기획 탐사보도 없이 도지사의 치적홍보에 치중한다면 이러한 일이 가능하겠는가.

지역 언론의 생존환경이 매우 열악한 가운데 서귀포 전 시장의 발언을 적극적으로 보도하고 이슈화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공익 우선의 언론보도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지만 이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다. 지역의 주요 현안에 대한 언론의 엄정한 보도는 법정 공방 같은 힘겨운 싸움을 감내하지 않으면 아주 힘든 상황이 되었다. 그만큼 지역의 공론장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재봉건화’가 진척되고 있기 때문이다.

▲ 권영후 소통기획자

지역언론의 견제 기능이 실종된다면 지방자치는 허울만 남고, 특정세력의 전횡은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지역언론을 악용하지 않겠다는 선한 지자체장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한다는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불과한 일이다. 우선 단체장의 권한을 조정하고 견제하는 등 지방자치제도를 개혁하는 일이 시급하다. 지역언론이 독립적인 경영여건과 정론직필의 자세를 갖출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국민이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 지방자치의 붕괴를 보고만 있을 수 없다. / 권영후 소통기획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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