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기획-규슈올레를 걷다] 고코노에·가라쓰 코스 개장…일본 ‘제주올레’ 열풍

길과 길이 만났다. 길과 길이 만나서 또 하나의 길이 열렸다. 

제주올레길이 일본 규슈(九州)올레길과 다시 만났다. 규슈올레길이 지난 2012년 2월 1차 개장 이후 제주올레가 현해탄을 건너 일본 규슈에 낸 올레길이 이제 모두 10개 코스가 됐다. 총 연장길이만 약 130km에 이르는 치유와 사색의 길이다.

(사)제주올레(이사장 서명숙)와 규슈관광추진기구는 지난 주말(12월 14~15일) 일본 규슈 오이타(大分)현의 고코노에 야마나미(九重 やまなみ) 올레코스와 사가(佐賀)현의 가라쓰(唐津) 올레코스에서 제3차 규슈올레 개장식을 열고 각각 숨겨뒀던 길을 열었다.

▲ 일본 규슈올레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해발 900m 12.3km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아직 아무도 내지 않았던 길이다.

이날 개장한 오이타현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는 해발 900미터 고산 분지 지역을 따라 걷는 전체 거리가 12.3km에 이르는 길이다.

놀다 걷고, 쉬다 걷는 ‘놀멍 쉬멍’ 걸어도 총 4시간이면 넉넉히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그래도 몸 안에 차오르는 숨은 어찌할 수 없었다. 늘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던 버릇 탓인지 드문드문 숨 고르기를 반복해야 했다.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는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교각으로는 길이와 높이가 모두 일본에서 제일인 ‘꿈의 대현수교’에서 시작됐다.

14일 오전, ‘꿈의 대현수교’ 앞에서 마을축제 같은 간단한 개장식을 뒤로하고 아스콘 길을 벗어나 올레표식을 따라 마을 뒤편 산길을 삼삼오오 무리지어 올랐다.

   

▲ 일본 규슈올레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제주올레' 표식인 간세다리와 화살표, 리본 등은 규슈올레에도 그대로 설치됐다. 길을 안내해주는 올레 화살표 표식을 일본에서 만나니 반갑다 못해 뭉클하기 까지 했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일본 규슈올레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길은 동행자가 있으면 더 살갑다. 같은 길을 걷는 올레꾼의 뒷모습이 길 만큼이나 아름답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일본 규슈올레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해발 900m의 고코노에 코스를 걷다보면 곳곳 웅덩이에 얼어붙은 살얼음을 만날수 있다. 살얼음 위로 누군가 먼저 밟고 지나간 발자국이 선명하다. 그 뒤를 따르는 발걸음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걸까.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얼마 가지 않아 산길 어귀에서 만난 반가운 올레 표식과 올레 리본에 잠시 여기가 제주올레라 착각할 만큼 길이 익숙해졌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집필활동을 했던 숙소가 있는 우케노구치 온천과 옛날 이 지역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계곡과 숲속의 좁은 길은 이 지역의 작은 역사까지도 느끼게 해줬다.

등줄기를 따라 적당한 땀이 타고 내릴 무렵, 약 3.9km 지점의 '밀크랜드 팜'에서 맛보는 단돈 300엔 짜리 녹차와 블루베리 아이스크림 맛도 규슈올레길에서 얻는 또 다른 별미였다.

다시 길을 나서면 장대한 고원의 경치가 올레꾼들을 맞았다. 거기서 다시 작은 하천을 따라 농로와 말길(馬路)을 걸어 초목지에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가슴 저 깊숙이에서 심호흡이 절로 올라온다.

▲ 일본 규슈올레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일본 규슈올레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종점 인근의 쵸자바루 주변의 억새밭.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곳이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일본 규슈올레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약 11km 지점에서 만나는 규슈 최고봉 구쥬연산의 설산 풍경 앞으로 펼쳐진 초원의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의 종점 부근인 쵸자바루·다데와라 습원 주변에 다다르자, 하얗게 눈 덮인 규슈 최고봉 구쥬연산이, 그리고 그 앞으로 펼쳐진 너른 억새밭과 초원으로 인해, 어느 계절에 찾아와도 오감이 즐거울 수 밖에 없는 곳이구나 하는 환희가 밀려온다.

무엇보다 여행자들의 지친 피로를 싹 씻어줄 온천과 숙박시설, 음식점이 이 코스의 종점과 출발점 인근에 많이 있다는 점도 크나큰 매력이다.

종점 휴게소에서 융 드립으로 막 내린 신선한 원두커피 한잔과 함께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의 진한 여운도 삼켰다. 

▲ 일본 규슈올레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일본 규슈올레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의 종점 부근. 규슈 최고봉 규쥬연산과 황금빛 억새밭 풍광이 잘 어우러진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모모야마 문화유적 400년 품어온 11.2km 가라쓰 코스

이튿날인 15일,  난리통에 봇짐 싸듯 배낭을 둘러매고 다시 길을 나섰다. 사가(佐賀)현의 가라쓰(唐津) 코스다.

가라쓰 코스는 나고야 성터와 400년간 이어져 온 옛길을 중심으로 일본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총 길이 11.2km의 의미 있는 길이었다. 이 코스 역시 소요시간이 3시간 30분에서 4시간 정도면 알맞은 길이다.

▲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 굽어 있는 저 길을 돌아가면 나고야 성터를 만날 수 있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 올레꾼들이 동백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한 숲터널을 빠져나가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출발점을 벗어나자 곧 일본 특별사적으로 지정된 나고야 성터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에 쌓은 나고야 성은 일본에 남아있는 모모야마 시대 성곽 중 최대 규모의 성터였다.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는 성곽과 그 흔적들이 남아 있었는데, 천수각에서 바라보는 이키섬과 대마도, 그리고 현해탄의 평온하기만한 풍광이 400여 년 전 조선 침략의 발판이 되었던 곳이란 설명을 들으니 발길이 무거워졌다.

임진·정유왜란은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과 중국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으킨 침략전쟁이다. 전쟁은 약 7년간 이어졌고, 그 피해는 조선팔도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이 왜란의 출병기지가 바로 이 나고야 성이었으니,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에서 모은 다이묘(大名)들을 나고야 성 주변 약 3km 안에 약 130여곳의 진영을 건설하게 해 주둔시켰다. 지금도 주변 곳곳의 진영터에는 성벽과 토루가 잘 남아 있다.

   

▲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 나고야 성터의 무너져 내린 성곽을 따라 걷는 올레꾼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에서 만난 귤밭을 따라 올레꾼들이 걷고 있다. 제주의 한적한 시골풍경과 많이 닮았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의 나고야 성터에서 만난 연지가 성곽의 그림자를 그대로 품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그래서 일본 정부가 이 광대한 유적군을 지난 1976년부터 보존·정비사업을 펼쳐 현재 ‘특별사적’으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다행히 400년이 지나 ‘치유(힐링), 자연과 지역사회의 소통’이라는 ‘제주올레’의 기본 정신을 이어받은 ‘규슈올레’의 한 코스가 이곳을 관통하니 역사의 아픔도 치유하고 침략자에 대한 용서의 마음까지도 낼 수 있어 위안이 됐다.

가르쓰 코스가 의미 있는 올레코스였던 것은 지역주민과 그 지역 문화와 소통하는 길이었다는 점이다. 

나고야 성터를 지나 몸도 마음도 무거워질 즈음 만난, 게이게츠라는 다원에서 잘 쳐낸 ‘말차’(가루녹차)를 넉넉한 다완에 한모금 마실 수 있는 다도체험은 우리들의 지친 일상과 피로를, 천천히 오장육부를 훑고 지나가는 말차의 깊고 진한 차향 속으로 녹아내리게 만들었다. 

   

▲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의 다도체험 다원 '가이게츠'에서 만난 말차 한잔은 그대로 감로수였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의 나고야 성터. 흡사 제주의 팽나무 처럼 넉넉한 모습으로 뿌리내린 고목 한그루가 역사의 상처까지 품고 있는듯 했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의 종점 인근인 하도미사키 해안 부근에서 길을 걷던 올레꾼 한쌍이 탁트인 바다를 배경으로 재미있는 기념포즈를 취하고 있다. 길은 좋은 벗의 인연을 더욱 단단하게 맺어 준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그뿐인가. 이 길에선 예부터 다인을 비롯한 많은 일본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가라쓰도자기를 구워내는 가마도 만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인질로 잡아온 조선 도공들이 빚어내기 시작했다는 ‘히나타가마’와 그곳에서 소나무 장작으로 구워낸 분청자기들을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도 지친 걸음을 잊게 한다.

코스 후반부에는 일본 북서부 끝에 위치한 하도미사키 해안올레가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함을 안겨준다. 특히 제주올레 7코스에서 보던 낯익은 주상절리 해안을 이곳에서도 만나는 행운도 만끽했다. 

몸 안에 적당히 차오르는 가쁜 숨이 낱알 같은 모래사장 끝에서 가볍게 출렁이는 규슈 바다와 함께 취할 무렵, 코스 종점에 다다랐다.

▲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 해안이 가까워질 무렵 울창한 숲 사이로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 주상절리. 하도미사키 해안의 주상절리가 마치 제주올레 7코스에서 만나는 주상절리 해안처럼 정겹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의 별미 소라구이. 종점 해안에 소라구이 포장마차들은 가라쓰 코스의 백미였다. 지글거리는 소라구이가 피로를 씻게 했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길 위에 잠시 머물렀던 사람들이 떠난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 여느 길이 그렇듯 규슈올레길도 누굴 붙들거나 하지 않는다. 지금은 떠나지만 다시 이 길에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일까.

가라쓰코스의 종점인 하도미사키 해안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제 몸에서 지글지글 육수까지 내어주는 구운 소라와 사케 한잔으로 이틀간의 피로를 씻는 것으로 이번 규슈올레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규슈관광추진기구의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규슈올레를 방문한 한국인은 여행사를 통해 약 2만4000여명, 개별여행객 1만여명 등을 포함해 약 3만5000~4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집계된다”며 “여기에 일본인들의 규슈올레 방문도 약 3만여명에 이르는 등 짧은 시간 안에 일본에서도 올레길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고 귀띔했다.

사람과 자연이 통하고, 자연과 문화가 통하는 길, 세상을 향해 열린 길 ‘제주올레’가 일본 규슈에서도 그렇게 길을 통해 세상과 사람을 이어주고 있었다. 그건 바로 제주의 문화를 수출한 ‘제주올레’의 힘이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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