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우리’가 바로 ‘우리의 지도자’를 키운 토양이다


 나는 ‘지도자’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러는 경멸한다. 요즘 우리고장의 이른바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행태를 볼 때마다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제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그러나 ‘지도자’를 더러 경멸한다고 하여, 그들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의 행태를 지적하는 것일 뿐, 그 말에 숨은 의도는 없다. 지역주민들의 다양한 염원과 욕구를 한데 모으고, 그것을 공식화하고 실행해 나가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라면, 그런 지도자는 반드시 필요하다. 지역사회가 어려울수록 더욱 그렇다.

 오늘도 나는 물음의 형식을 취한다. “우리에게 바람직한 지도자상(像)은 어떤 것인가” 그 답은 쉽지 않다. 사람과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각기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그들의 이미지를 만들어놓고, ‘바른 지도자상(像)’을 그것에 꿰맞춰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환상과 편견’을 문득 유보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판단과 견해, 그리고 정서와 충동을 오염시킨, 그 내부적 결함을 직시하면, 바로 그곳에 정답이 있을 것이라고…틀림없다.

 그것은 현실의 반성에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우리고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일부 지도자들’의 행태를 보라. ‘끼리끼리 작당하여 갈등을 부추기는 패거리이기주의’가 좁은 지역사회를 주름잡고 있다. 그로 인한 ‘정치적 지체현상’도 심각하다. 주민 정서는 안중에도 없는 듯,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혹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정치적 신조쯤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친다. 아닌가? 나는 여기서 연민과 체념 사이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오늘날의 일부 지도자들의 행태는 시대의 산물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걸 어찌 허물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갈대구멍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속 좁음, 고달프기만 할뿐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는 ‘수고로운 빈 상자’, 그때마다 생명 없는 언어로 땜질하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끝내 드러나고 마는 자만심과 허세, 우주를 말아먹을 것 같은 허황된 욕심…경쟁자를 헛잡기에 혈안이고, 그리하여 ‘말의 흐름’을 차단하고…끝내 ‘진실의 언어’를 핍박하고…. 더 이상 거론하는 것은 민망하다.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인다”더니, 내가 바로 그런 꼴인가. 결코 빈정거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게 어찌 우연이겠는가. 거기엔 그들을 키우는 토양이 있다. 한사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걸 인정해야 한다. 그 토양이 바로 ‘우리’다. 우리가 의식했든 아니든, 음으로 양으로 연쇄 고리를 이루면서, 우리 지도자를 ‘그냥 그렇게’ 만들어 왔다. 막말로 “쓰고 난 다음에는 과감하게 버리기도 해야 하는데…” 지금 와서 ‘가슴 칠’ 대목이 있다면,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이쯤에서 혹자는 나무랄지 모른다. “공소(空疎)한 말로 본질을 호도하지 말라”고…. 옳은 지적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을 이야기 하면서, 그것이 가능했던 행위와 그 궤적을 도외시하는 건, 오히려 더 공허하다.
      
 한 지역의 지도자 수준은 ‘주민의 의식수준’이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이 순간에도 우리가 ‘우리의 지도자’를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 ‘바른 지도자’에 대한 인식능력과 의지력이 우리에게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닌지…그리하여 그 병폐가 드러난 즈음, 그들의 허물을 공격하면서, 그들을 ‘그냥 그렇게’ 만든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기변명의 심리기제가 혹 거기에 있는 게 아닌지…나의 발칙한 생각일 터이다.
 
 그러나 분명한 게 있다. 우리 모두는, 분열과 갈등으로 잔인해진, 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들을 ‘그냥 그렇게’ 만든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그걸 깨닫는 게 과거로부터의 전회이자, ‘바른 지도자’를 위한 치유의 시작이다. 그 선상이 바로 우리의 출발점이다.
 
 역시 새로운 출발은 현실에 대한 반동이다. ‘우리’가 ‘우리 지도자’를 ‘그냥 그렇게’ 만들어 왔지만, 그것을 바꾸는 것 역시 분명 ‘우리’다. 모든 것은 지역주민이 결정한다. 요즘 들어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건, 우리가 지금, 그게 가능했던 토양에서 벗어날 준비가 돼 있다는 걸 의미한다. 바로 우리가 ‘바른 지도자’를 세운다.

 틀림없다. 이미 우리는 한 발짝 나아갔다. 나는 여기서 가정법(假定法)으로 말한다. 만일에, 정말 만일에, 그 폭을 조금씩 더 넓히고,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노력을 더해주다 보면, 그것이 거대한 물길이 되고, 그리하여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시선의 혁명적 전환’…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환상과 편견’을 자각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실상에 착목했다면, 이미 일은 거지반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다.

 

▲ 강정홍 언론인

 위기는 항상 기회를 만든다. 우리의 ‘지도자의 실패’도 또 다른 기회일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역사의 가정(假定)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통렬하게 반성하지 않는다면…. 나는 변함없이 믿고자 한다. 과거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하여, 미래마저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상처를 치료하고, 잃은 것을 보충하고, 부스러진 형체를 스스로 복제하는” 지역주민들의 ‘조형력’을 믿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야기했다. “썩은 나무에는 조각할 수 없다”고…. 그렇다. 지도자가 잘못되면 지역사회가 위태롭다. 분명 우리는 지금 중요한 지점에 서 있다. / 강정홍 언론인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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