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의 제주신화 이야기] (74) 강림의큰부인 여성2

강림의큰부인 어머니

이 여성의 일생은 안정적으로 보인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주어진 역할에 순응하고 엄청난 수고에도 화를 내지 않으며 살아가는 이 여성은 차분한, 많은 주부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강림의큰부인 어머니는 아이들을 따스하게 보살펴 주고 그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을 것이나, 아이들이 사회생활에서 중대한 결심을 할 때 큰 도움을 주지도 못할 것이다. 오랜 세월을 안정만을 추구하고 살아오면서 그녀는 독특한 개성이나 자신의 생각을 잃어버리고, 창조적인 문제 해결의 방법들을 경험하지 못 해왔기 때문이다.
관례만을 좇아 살아왔던 그녀는 변화로 인해 오는 충격에도, 변화를 원하는 자녀들의 민감한 마음에도 둔한 대응을 한다. 변화의 길을 가려는 자녀들에게 여러 길을 조언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라면 모두 관계를 중시한다. 그러나 관계의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고 관계의 ‘내용’을 더 중시하는 경우가 있다. 강림의큰부인 여성은 형식을 우선하고 또 절대적으로 여긴다. 형식과 내용이 일치되면 문제될 것이 없지만 불일치할 경우, 내용이야 어쨌건 형식만 유지되길 바란다. 부인의 자리, 어머니의 자리만 유지하면 되는 것이다. 평생을 열여덟 호첩들과 놀아나면서 거들떠보지 않아도 문제가 안 된다. 그냥 자신은 호적에 올라가 있는 부인이고, 그래서 어머니이고, 그 자리에서 쫓겨나지만 않으면 된다.

힘들어도 살맛나게 하는 것이 ‘관계’를 맺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남편 강림에게 배려하면서 같이 가야 할 타자로 인식된 적이 없었던 그녀가 남편과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자녀들 역시 희생과 인내로 살아 온 어머니에게 연민과 부채의식은 느낄 것이나, 솔직하게 삶과 철학을 나누는 사이로 생각할 지는 의문이다.

▲ 두 여자(1977). 마르타 메자로스. 마리아는 남편으로부터 도망친 율리를 도와주고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 신화에는 ‘인간 부부간의 법은 열 아기를 낳아도 조금도 보람 없이 까마득해 지는 게 부부간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열 아이를 낳아도 조금도 보람 없이 까마득해지는 관계가 부부관계라니 슬픈 일이다. 강림의큰부인은 열 아이를 낳아도 조금도 보람이 없이 까마득해지는 관계가 부부관계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열 아이는 고사하고, 족두리 올리고도 제대로 한번 찾은 적 없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열정적으로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이미 주어진 ‘형식’을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의 태도와 기준이 없는 포용력은 여러 형식과 제도와 사고체계들을 그 내용의 왜곡에도 변화 없이 존재하게 하여 사회적 악태로 굳어지게 하기도 한다. 순수하고 착한 그녀일지라도, 사회가 요구하는 최면에 빠지고 이어 계산된 순종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그녀 자신도 알고 있다. 자신의 본질이 왜곡되고 자기소외에 빠지고 있다는 것, 어느덧 딸에게까지도 자기처럼 살라고 시키게 될 자신을 느끼기도 한다.
그녀의 삶의 태도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은 아니지만 한번 쯤 그녀는 아우성, 오열과 같은 원초적인 신체의 소리를 지를 필요가 있다. 우선은 자신을 위해서이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참아오기만 했던 그녀가 내는 솔직한 외침들은 모두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행해져 왔던 것들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와중에 비로소 그녀를 같이 설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남편이나 아이들을, 남을 희생을 먹고 사는, 나쁜 인간으로 놔두는 것도 좋은 선택이 아니다. 상대를 사랑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다만 유지되고 있을 뿐인 그런 가정을 위해 모든 수고로움과 희생을 혼자만 오래도록 감내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 마빈스룸(1996). 제리 잭스. 아버지 마빈이 쓰러지고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언니 베시에게 맡겨둔 채 자신의 삶을 찾아 멀리 떠나버린 리.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삶은 사랑스러운 것일지라도, 이기심과 이타심이 만날 수 있는 자리는 기어코 없는 것일까?(사진 출처:구글이미지-네이버블로그gojiyong2)

강림의큰부인 여성들에게 이혼은 생각할 수도 없다.

남편이 부정을 저질렀을 때 모든 여성들은 화가 날 것이고 분노할 것이지만, 자청비 여성이나 가믄장아기 여성, 백주또 여성들이라면 아무리 충격일지라도 시간이 좀 지나면 나름의 원기를 회복할 것이다.
나름의 원기를 회복한다는 것은 결국은, 자신의 주인은 자기임을 알아간다는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길을 생각해본다는 것이다. 여전히 사랑하므로 지나가 줄 수도 있고, 아이들을 생각해서 이혼만큼은 안하고 넘어갈 수도 있고, 절대로 용서가 안 되어 이혼을 결정할 수도 있지만 그건 차후의 일이다.

강림의큰부인 여성이 유일하게 결정한 것은 어떤 상황이건 절대 이혼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비관적인 남편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는 없다. 관계 개선의 요구는 곧 관계의 종말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걱정에 무턱대고 ‘관계’만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있어도 그냥 지나간다.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고, 이 살림을 더 이상 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도 이혼만은 안 된다고 한다. 버젓이 바람을 피우고 집에 들어와 행패까지 부려도 이혼만은 안할 것이라 웅크린다. 남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어차피 없었고, 인간성의 바닥까지 보고 있지만 이혼만은 하지 않기 위해서 버틴다. 때리면 맞고, 때림이 거세면 잠시 피할 것이다. 집 주위의 어딘가에서 쪼그려 앉고 서성이며 눈치를 볼 것이다.  

잘못이 없는데도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남편에게 용서를 빌지도 모른다. 남편이라는 상대가 없는 자신, 누구누구의 부인이라는 호적의 명부에서 사라지는 일, 어머니로서의 자리를 빼앗기는 일을 그녀는 생각도 하기 싫다. 그럴 바엔 누구든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죽는다는 것은 호적에서 폐출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폭력과 순종이 일어나는 이유는 강림의큰부인 여성처럼 살아가는 게 제도화된 문화가 되어버렸고, 이미 그런 지배적인 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까닭이다. 또 세상의 권력을 구성하는 것에 대해 인지하고 파악하는 능력이나 의지가 강림의큰부인 개인 여성들에게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배논리는 사실 어처구니없는 비인간적인 관례를 양산하는 경우가 많으며, 사회적인 악태임을 인정하면서도 관례에 저항하고 거부하는 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사회에서 조강지처, 양부, 현모양처라는 말들은 그런 함의를 담고 있는 문화개념들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강림의큰부인 여성은 관례를 좇으며 조강지처로 호명되고 또 남아 있기 위해 그녀의 비존재성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모범을 보이면서, 양부와 현모양처, 희생하는 어머니가 된다. (계속) / 김정숙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