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이션이라는 괴물에게 잡혀 먹히지 않으려면 인플레이션 타깃을 세워야 한다." 연초 워싱턴에서 열린 전미언론인클럽에 참가한 크리스틴 라가드 IMF 총재가 디플레이션을 숲 속의 귀신(ogre)에 비유하며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 및 정책당국자들에게 훈수했다.

특히 미국 연준에게는 양적완화 테이퍼링(채권매입의 단계적 축소)을 신중히 진행하라는 당부도 곁들였다. 1930년 세계대공황 때 통화공급을 과감히 못해준 것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반성, 현재 진행중인 일본의 장기 디플레이션을 목격하며 느끼는 두려움을 반영한 발언이었을 것이다. 물러나는 버냉키 연준 의장도 임기 내내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중 더 무서운 것이 디플레이션이라는 말을 했다.

디플레이션이란 인플레이션과 반대로 물가가 내리는 것이다. 현재 미국과 유럽의 물가상승률은 각각 1.2% 및 0.8%로서 엄격히 디플레이션까지는 아닌데도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을 보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그러나 일본이나 미국의 디플레이션 경험을 보면 디플레이션은 항상 주식이나 부동산, 때로는 면화 등의 주요품목의 가격이 한동안 높았다가 단기간에 대폭적으로 하락하면서 발생했다.

일본의 경우 1989년에 3만8000포인트를 기록했던 니케이 지수가 2003년에 7000포인트까지 떨어지면서 경제활동이 위축되었고 이것이 고용과 투자, 그리고 소비의 위축을 불러 디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미국 역사상 4대 디플레이션의 경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818년에는 기상이변으로 수년간 크게 올랐던 면화 값의 폭락, 1837년에도 직전 수년간의 고도성장기에 폭등했던 면화, 토지, 노예 가격의 폭락, 1873에는 남북전쟁 중 남발했던 화폐 가치의 폭락, 1930년에는 1920년대 극도의 호황을 구가했던 주식시장의 갑작스런 붕괴가 각각 그 이후 수년간의 물가하락을 초래했다.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의 산물

이와 같이 디플레이션이란 인플레이션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두 귀신 중 과연 어느 것을 더 무서워해야 할까?

이 관점에 관하여 유럽중앙은행은 미국 연준과 차별되는 행보를 밟아왔다. 미국은 노골적으로 경기부양을 위해 채권을 매입한 것인데 이와는 다르게 유럽에서는 재정취약국의 국채를 매입하면서도 완전소독(full sterilization)의 원칙을 준수했다. '소독'이란 같은 크기의 우량채권을 시장에 매각함으로써 유로 화의 통화량을 일정 수준에서 유지되도록 하는 통화정책 기법을 말한다. 그 용어에는 통화 증발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이라는 병원균에 감염되어서는 안된다는 저의가 깔려 있다. 채권매입의 목적이 재정취약국의 채권가격 하락을 노리는 투기세력을 차단하여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임을 뚜렷이 하는 조치다.

2010년 5월부터 2012년 2월까지 4회에 걸쳐 총 2100억유로의 채권을 매입하여 현재 1800억유로(2300억달러)의 채권이 유럽중앙은행에 잔고로 남아 있다. 미국 연준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2조2000억달러의 미국 국채는 이것의 약 열배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인데 전혀 소독되지 않은 물량이다. 양적완화가 목적인 만큼 소독을 할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유럽중앙은행이 이처럼 인플레이션을 두려워하는 것은 독일의 영향이 크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서 바이마르공화국이 당했던 하이퍼인플레이션의 기억이 사라졌을 리 없다. 전쟁배상금을 석탄 등의 실물, 또는 미국 달러로 지불하면서 한 조각의 빵, 한 덩어리의 고기가 30억마르크, 한잔의 맥주가 40억마르크였던 1923년의 기록이 메달로 새겨져 있는 나라다. 그런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는 독일이 유럽 내지는 유로 존의 통합을 이끌고 있다.

인플레이션을 더 두려워하는 유럽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 주요 언론과 학자들이 양적완화를 섣불리 중단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세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파이낸셜 타임스의 수석 투자칼럼니스트 존 오서스(John Authers)는 최근 HSBC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스테픈 킹과의 대담에서 "지금은 소비자물가의 디플레이션과 자산가격의 인플레이션이 공존하고 있어 문제해결이 쉽지 않다"고 털어 놓았다.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사실상 화폐의 가치는 하락할 대로 하락하고 있다. 다만 소비자물가가 지표상으로 안 오르고 있을 따름이다. 엉뚱하게 디플레이션 타령을 하는 것은 인플레이션으로 상황타개를 하려는 미국식 시나리오에 영합하려는 곡학아세(曲學阿世)가 아닌가 걱정된다.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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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내일신문> 1월 22일자 '김국주의 글로벌경제' 에 실린 내용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제주의소리>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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