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현 칼럼> 대통령 사과가 ‘외면’하는 것들 (2)

<이 글은 김동현의 박사 학위 논문 『로컬리티의 발견과 내부식민지로서의 ‘제주’』의 보론이다. 김동현의 논문은 ‘로컬리티’와 ‘내부식민지’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바탕으로 식민지 시기부터 1970년대까지의 제주의 지역성이 ‘발견’되는 양상을 규명하였다. 이 보론은 제주의 ‘지역성 발견’ 양상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제주 4․3, 특히 대통령의 공식 사과문을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최근 제주 4․3 추념일이 제정되는 가운데 대통령의 사과문의 의의와 그것이 담고 있지 않는 것을 규명하는 이 글은 제주 4․3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본인의 동의와 양해를 얻어 이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

  사과문에서 눈에 띄는 것은 ‘희생’의 언어이다. ‘희생’은 짧은 사과문에서 7번 반복된다. ‘무고’가 3회, ‘진상’이 3회, ‘사과’가 2회 반복되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희생’의 반복은 다분히 수사적 반복이 아니다. 대통령은 4․3 진상보고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주도에서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그리고 1954년 9월 21일까지 있었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다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제주 4·3을 정의할 때조차 권력의 언어는 ‘역사적 실체’를 ‘희생’으로 수렴하며 ‘희생’의 무고함과 그것의 비극성을 강조한다. 즉 ‘희생’의 무고함은 역사적 비극의 전제이며 그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희생’들을 단일한 ‘희생 담론’으로 추상화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추상화의 효과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추상의 외부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 것인가. 

이를 논의하기 위해 잠시 진상조사보고서의 내용을 살펴보자.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제주 4·3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된 희생자 현황을 살펴보면 행방불명자와 후유장애자, 사망자를 포함한 희생자는 총 1만4028명으로 이를 가해자별로 나눠보면 토벌대에 의해 1만955명, 무장대에 의해 1764명(기타 및 가해 불명 등의 공란 각각 43명, 1266명) 등이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389쪽) 

  (4․3) 발발원인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제주사회에 긴장 상황이 있었고, 그 이후 외지출신 도지사에 의한 편향적 행정 집행과 경찰․서청에 의한 검거선풍, 테러, 고문치사사건 등이 있었다. 이런 긴장상황을 조직의 노출로 수세로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 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서청 단원들은 ‘4․3’ 발발 이전에 500∼700명이 제주에 들어와 도민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그들의 과도한 행동이 ‘4․3’ 발발의 한 요인으로 거론되었다. ‘4․3’ 발발 직후에는 500명이, 1948년 말에는 1,000명 가량이 제주에서 경찰이나 군인 복장을 입고 진압활동을 벌였다. 제주도청 총무국장 고문치사도 서청에 의해 자행되었다. 서청의 제주 파견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이 후원했음을 입증하는 문헌과 증언이 있다.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 진압작전은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하였다. 강경 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4․3 사건으로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는데, 대부분 이때 방화되었다. 결국 이 강경 진압작전은 생활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2만명 가량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이 무렵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피해마을은 세화, 성읍, 남원으로 주민 30∼50명씩 희생되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577~579쪽)

위에 따르면 제주 4·3은 1947년 3․1절 발포사건 이후 지방 관료의 편향적 행정과 경찰과 서청에 의한 가혹한 도민 탄압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남로당 제주도당이 4월 3일 무장봉기한 사건이다. 또한 진압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의 암묵적인 후원 아래 자행된 서청의 과도한 행동과 9연대의 초토화 작전이 수많은 인명의 희생이라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다.

조사보고서라는 성격상 이러한 규정은 국가적 승인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공인된 언어로 이야기된 사건의 개요만 들여다보더라도 지방 관료의 편향적 행정집행, 서청의 탄압,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라는 사건의 얼개가 드러난다. 물론 이러한 사건 규정 자체에 대한 비판 의견도 제기된 바 있지만 여기서는 이러한 규정 자체가 역사적 진상규명에 얼마만큼 다가갔는지를 문제 삼지 않는다. 그것은 정밀한 사적(史的) 탐구의 영역일 터이다. 여기에서는 진상조사보고서가 언급하고 있는 경찰과 서청, 남로당 제주도당이라는 사건 전개의 주체들이 어떻게 언급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과문은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그리고 1954년 9월 21일까지 있었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이라는 수사에서 충돌의 한 축인 남로당 제주도당은 등장하지만 그 반대의 존재-그것은 곧 진압의 주체일 터인데-는 대괄호 속에 묻힌 채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것을 단순히 수사적 실수라고만 봐야 할 것인가.

“이것은 누구의 범죄인가. 기관총인가. 기관총 사수인가, 사격명령을 내린 장교인가, 무선전화로 처단명령을 내린 대대장인가. 그 위의 연대장인가, 그 옆의 그림자 같은 미군사고문인가. 그 위 또 그 위, 마침내 삼각형의 꼭짓점은 누구인가? 트루맨은 진인이었나?” (현기영, ‘마지막 테우리’ 창작과비평사) 고 물을 때 이 같은 수사는 충분한 답변이 될 수 있는가.

모든 죽음은 개별적이며 구체적이다. 이 말은 그 죽음이 자의적, 자연적 죽음의 경우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다소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제주 4·3 당시 행해졌던 수많은 죽음들은 죽음의 대상과 가해 주체들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죽임에 의한 죽음’들이었다. 누군가는 죽음의 가해자였으며 누군가는 죽음의 피해자였다. 신문 연재물을 엮은 『4․3은 말한다』의 마지막 권에는 「초토화 작전의 실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 중 소제목 일부만 옮겨본다.

“소 한 마리 값에 생사갈려”(송당리)
“폭도 지원자 찾아내라”며 집단학살(행원리)
무장대 대대적 습격, 무차별 학살(세화리)
생후 1주일 영아까지 총살(신풍리)
토벌대, 우익성향의 면장도 살해(표선리)
아버지-아들 양측에 죽는 비극(신흥리)
“사위가 입산했다” 장모를 총살(호근리)
경찰간부 가족도 서청에게 희생(상예리)
우는 아기 입 틀어막다 질식사(상천리)
무장대, 군인 트럭 습격(화순리)
“삐라 신고 안했다”며 교사 몰살(인성․보성․안성리)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5 전예원)

태어난 지 1주일도 안된 영아도, 입산한 사위를 둔 장모도, 경찰간부도, 삐라 신고를 하지 않은 교사도 죽음을 벗어날 수 없었다. 죽음은 그 자체로 비극이지만 그 비극은 개별적이며 지극히 구체적이다. ‘희생’의 수사는 이렇게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죽음을 획일화한다. 개체의 죽음이 ‘희생’이라는 상징체계로 수렴될 때 그 죽음에 얽힌 개인적 서사는 사라진다. 여기에서 ‘희생’의 강조는 다분히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대통령의 사과발언이 모든 역사적 실체를 구체적이고 개별적으로 다룰 수는 없으며 이를 문제 삼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다.

또한 국가는 늘 추상으로서만 존재하고 발화한다는 일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희생’의 화용적 효용에 주목하여야 한다. ‘희생’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희생’이라고 대통령-국가권력 집행의 최후 책임자인-이 말하는 순간 모든 죽음은 ‘희생’의 범주로 수렴된다. 죽음이 ‘희생’인 한에서만 그것은 사과의 대상이 되며 무고한 죽음으로 불린다.

하지만 ‘권력-언어’가 항상 추상의 형태로 발화되는 것만은 아니다. 권력은 언어를 선택하며 그 선택의 원심력은 강력하다. 1948년 6월 조병옥 경무부장은 ‘제주도 폭동’의 진상에 대해 발표한다. 이날 발표에서 조병옥은 ‘공산계열’의 ‘폭동’으로 인한 피해를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한다.

  폭동이 일어나자 1읍 12면의 경찰지서가 빠짐없이 습격을 받았고 저지리 청수리 등의 전 부락이 폭도의 방화로 타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 살상 방법에 있어 잔인무비하여 4월 18일 신촌서는 육순이 넘는 경찰관의 늙은 부모를 목을 잘라 죽인 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대동청년단 지부장의 임신 6개월 된 형수를 참혹히 타살하였고, 4월 20일에는 임신 중인 경찰관의 부인을 배를 갈라 죽였고 4월 22일 모슬포에서는 경찰관의 노부친을 총살한 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임신 7개월 된 경찰관의 누이를 산 채로 매장하였고,

5월 19일 제주읍 도두리에서는 대동청년단 간부로서 피살된 김용조의 처 김성희(24)와 3세 된 장남을 30여명의 폭도가 같은 동리 고희숙 집에 납치한 후 십 수 명이 윤간하였으며, 같은 동리 김승옥의 노모 김씨(60)와 누이 옥분(19) 김중삼의 처 이씨(50), 16세 된 부녀 김수년, 36세 된 김순애의 딸, 정방옥의 처와 장남, 20세 된 허영선의 딸 그의 5세, 3세의 어린이 등 11명을 역시 고희숙의 집에 납치 감금하고 무수 난타한 후 ‘눈오름’이라는 산림지대에 끌고 가서 늙은이, 젊은이를 불문하고 50여명이 강제로 윤간을 하고
그리고도 부족하여 총창과 죽창, 일본도 등으로 부녀의 젓, 배, 음부, 볼기 등을 함부로 찔러 미처 절명되기 전에 땅에 생매장하였는데 그 중 김성회만은 구사일생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폭도들은 식량을 얻기 위하여 부락민의 식량 가축을 강탈함은 물론 심지어 부녀에게 매음을 강요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등 천인이 공노할 그 비인도적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다.  (경향신문, 1948. 6.9)

 ‘공산계열’의 ‘폭동’으로 임산부와 세 살 된 아이마저 희생되었다. 그들은 사람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생매장하고 여성의 신체를 마구 찌르고 윤간하는 “비인도적 만행”을 저질렀다. 이날 발표에서는 ‘폭동’의 ‘포악’과 ‘잔인함’을 설명하기 위해 “생매장”, “윤간” 등의 자극적인 묘사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신원까지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날의 발표는 5월 1일 일명 ‘오라리 방화 사건’ 이후 미군정과 조병옥 경무부장 등이 제주문제를 무력으로 진압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한 즈음의 일이었다.  (조선중앙일보 1948. 6. 8)

조병옥은 피해자의 무고함과 가해자의 폭력성을 대비함으로써 무력진압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미디어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권력은 언어를 선택한다.

따라서 사과문이 ‘희생’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희생의 수사학’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개인을 지우고 ‘희생’의 상징적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개인적 서사가 사라진 죽음들은 이중의 소멸에 직면한다. 그것은 신체의 소멸과 개인적 서사의 소멸이다. ‘희생의 수사학’은 이러한 이중의 소멸이라는 외부를 상정한 채 발화된다. 이중의 소멸을 통해 개인의 서사 대신 권력에 의해 선택된 사회적 서사만이 유일하게 통용된다.  

여기에서 ‘희생’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의 사과가 진정성이 없었다거나 진상규명 노력이 미약했다는 의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다시 말하지만 당시 대통령의 사과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국가 폭력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민간인의 피해에 대해 사과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커다란 의미가 있다) 또한 민간인들의 무수한 죽음이 비극적인 희생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국가가 ‘희생’의 수사학으로서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죽음을 추상화하는 것과 동일하게 국가폭력에 의해 행해진 가해의 구체성 역시 추상화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구체적이고 확증적인 가해의 주체들이 국가라는 추상성으로 수렴될 때 개별적 주체의 선택은 은폐된다.

피해와 가해의 이항대립은 국가와 개인의 자리로 치환되며 국가는 가해의 책임자이자 사과의 당사자로, 개인들은 희생자이며 사과와 위령의 대상이 된다. 이는 사과의 대상과 사과의 형식도 국가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적 한계를 태생적으로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김동현 박사(국문학)

이러한 한계 속에서 개별적 주체들이 은폐되는 방식은 ‘국가’와 ‘희생’이라는 두 개의 추상 속에서 이뤄진다. 개별성이 지워진 ‘국가-희생’의 구도는 가해의 구체성을 은폐시키는 동시에 개별적 주체의 주체성을 희생에 한해서만 인정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추상의 기원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국가권력 자체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또 다른 추상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추상의 기원 혹은 추상의 작동방식을 고찰하기 위해 대통령의 사과문으로 돌아가 보자. / 김동현 박사(국문학)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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