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무장대의 유적지 '한수기곶'을 다녀와서

▲ 한경면 청수리 평화동을 지키고 있는 팽나무. 4.3에서 현재에 이른 역사의 씨줄과 날줄을 촘촘히 엮어주는 듯 하다.

새해가 시작된 병술년도 보름이 지났습니다.
바빴던 일상 속에서  모처럼 제주4.3연구소((소장 이규배)와 함께 한경면과 대정읍에 걸쳐있는 4.3 유적지 현장을 다녀올 기회를 가졌습니다. 

▲ '4.3 재평가 여전히 진행 중'

15일 오후에 찾았던 한경면 산양리 산 번지의 한수기곶은 4.3 발발 초기 무장대가 주둔했고, 그 후에는 군.경 토벌대를 피해다니던 주민들이 은신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평화동을 지나야 갈 수 있는 이 곳은 곶자왈 지대여서 주변이 온통 잡목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특히 대정 면당 무장대가 주둔했다는 알곶(대정읍 신평리와 무릉리, 한경면 산양리 사이)도 잡목과 수풀이 우거져, 용하다는 길라잡이가 나서기에도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마치 핍박당한 역사 만큼이나 메말라 있는 앙상한 나무가지만이 일행을 반기는 듯 했습니다.

곶자왈 주변엔 불을 붙여도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맹게낭(청미래덩쿨)이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 아마 무장대에겐 유용하게 쓰여졌을거라 여겨집니다. 근처 한수기 오름은 58년 전 설산(雪山)을 누비며 국가권력과 싸웠던 빨치산의 그날처럼 더욱 험해 보이더군요. 4.3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 방호벽(돌벽)도 저항의 역사 처럼 탄탄했지만 한편으론 감춰진 역사만큼이나 쓸쓸해 보였습니다. 좀 더 조사가 이뤄져야 할 곳입니다.

   
(사)제주4.3연구소에서는 올해 30억원의 큰 예산을 들여 화북 곤을동 일대 5곳에 대한 희생자 유해발굴과 모슬포 섯알오름 등 3곳에 대한 유적지 보전 등 복원 및 정비 사업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날 찾은 한수기곶도 2009년 복원을 목표로 1억원을 들여 마을진입로와 길목 10곳에 이정표를 설치하고 무장대가 식수로 사용했던 '봉근물'의 원형을 복원할 예정입니다. 아울러 진입로에서 무장대 주둔현장까지(오찬이궤와 봉근물 사이)의 관람로 200m를 정비해 누구나 쉽게 드나들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물론 무장대의 자취가 남아있는 흔적만 복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군.경토벌대가 주둔했던 '수악주둔소' 역시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역사의 교육장이자 복원의 현장입니다. 학살 암매장지역에 대한 희생자 유해 발굴은 행불자 유족의 DNA를 채취하고 분석해 발굴된 유해와 유족들을 이어주는 것으로 기존의 4.3연구에서 한층 더 나아간 과학적 연구로 진일보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4.3에 대한 제대로된 진상과 그 정신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정확한 역사의 진상규명이 더 이뤄져야 한다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또 이러한 일련의 4.3 후속 작업들은 그 중요성을 비춰볼 때 비단 연구소 자체만 국한된 일은 아닐 겁니다. 모두가 올곧게 평가되어야 할 역사적 평가가 아직도 이런 저런 어려움과 한계에 가로 막혀 발을 동동 굴렀던 현실을 직시하고 다함께 뛰어넘어서자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 '역사 복원'은 '진실의 복원'

57년 전 '역사 속 오늘'로 거슬러가면 1949년 1월 첫날은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가 발족돼 올곧은 역사의 복권을 꿈꾸었던 날이기도 합니다. 1월에는 신탁통치 반대 국민대회(1946년), 5.1 민간수비대 파견 독도 영토 표지판 설치(1954년), 유엔총회 및 유엔 감시하의 통한(統韓)총선거 결의(1957년)가 이뤄졌습니다.
그 뿐인가요. 진보당 사건으로 위원장 조봉암 등 간부 7명이 간첩혐의로 구속(1958년)되고 국가보안법 시행에 따른 보안법 반대 데모가 전국으로 확산(1959년)되는 등 역사적 사실들이 알곡처럼 매달려 있습니다.

특히 반민특위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91년 당시에 인기 있던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서였습니다. 일제시대 말부터 빨치산까지의 한국사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영상으로 4.3을 다룬 첫 작품으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학술적인 역사 재평가 작업으로 본격 논의된 것은 「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해방전후사의 인식'권2, 한길사, 1980, 오익환)을 기점으로 「역사에 다시 묻는다」(삼민사, 1984, 길진현), 「실록 친일파」(돌베개, 1991, 임종국),「반민특위 : 발족에서 와해까지」(가람기획, 1995, 김삼웅),「친일파 99인」(돌베개, 1993, 반민족문제연구소), 「(증언 반민특위)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정운현, 1999) 등으로 친일파 청산에 대한 연구가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친일'이라는 단어는 위정자를 중심으로 한국 정치를 지배해오던 작동 기작이었고 결국에는 전국민이 기피하고 금기시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었습니다.

▲ 진정한 '화해' 위해 '진실' 중요...'친일문제' 종국엔 규명돼야


새삼 벽두에 반민특위를 떠올리는 것은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정리가 무위로 끝난 뒤 이들이 해방 후 한국의 역사에서 권력의 횡포와 역사의 왜곡 등 실로 중대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후 상당부분 과거진상규명 차원에서 역사적 정리작업이 이뤄졌지만 아직도 역사를 고민하는 많은 이들은 미흡하다고 잘라말합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남아 사회의 곳곳에서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친일파 문제가 과연 4.3과 무관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재일 소설가 김석범 옹은 지난해 4.3 위령제 현장에서 "앞으로 남아있는 것은 4.3과 친일파와의 관계를 규명하는 문제"라고 일갈한 바 있습니다.
김 옹에 따르면 4.3은 친일파 세력이 정권의 정당성을 갖기 위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란 이름으로 집단학살을 한 전대미문의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앞으로 4.3 보복과 복수가 아니라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도 역사학자 등이 나서 모든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했습니다.

   
▲ 강원산골 선이골의 이야기

며칠전 4.3 운동 초기에 4.3의 정신과 역사적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셨던 김명식 선생(63.강원도 화천 노동리 거주)의 아내인 김용희씨(46)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두분의 삶과 이력이 새삼 지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두 분 모두 제주(애월읍 하귀리와 서귀포시) 태생인데다 범상치 않았던 삶을 산 때문이겠지요.

일부 매스컴이 보도했지만 자연과 어우러져 살던 일곱가족 이야기의 화제 주인공으로 소개하는데 그치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마 2003년 KBS 다큐멘터리 '선이골 다섯아이를 품다'의 주인공으로서, 문명생활을 거부하고 강원도 산골에서 살아가는 일곱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방송의 위력이었을 겁니다. 김씨 가족의 이야기는 2004년 여름 김씨가 자신과 다섯 아이들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낸 책 '선이골 외딴집 일곱 식구 이야기'(샨티)를 펴내면서 더욱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4.3운동과 민족의학운동의 정면에 서서 삶을 불살랐던 그들의 내력을 들여다 보려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김명식 시인은 1980년대 제3세계의 민중사를 조명한 '아라리연구원'를 세우고, 4.3자료집 '제주민중항쟁ⅠⅡⅢ'을 펴내 잠시 옥고를 치르는 등 4.3 민주화 격랑의 한 가운데 있던 분입니다. 부부의 삶의 이력은 결코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저 역시 누군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늘 버겁고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2년 전 4.3 위령제 현장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4.3 한 복판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4.3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재건하자

1988년 3월 그가 발간한 '제주민중항쟁1'(소나무 출판.아라리 연구원 펴냄)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948년 4월. 미 점령군 경찰, 경비대 그리고 이승만 집단의 우익 테러에 항거하다 스러져간 제주도 민중의 혼은 깊은 한과 염원을 간직한 채 , 현대사 40년간 긴 어둠의 시대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해 왔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제주도 민중학살에 앞장섰던 자들이 지금도 이 땅의 민중을 지배, 수탈, 착취하는 자들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제주도 민중항쟁의 기록은 왜곡되어 있고, 드러나 있지 않다. 아니 오히려 지배자들은 이를 역사기록에서 의도적으로 지우려하고 있다.'

당시 '아라리연구원'(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서 잇따라 3권을 내며 4.3을 '항쟁'이란 이름으로 끄집어낸 40대의 4.3 선동가는 이후 이순(耳順)을 훌쩍 넘길 때까지도 4.3을 한시도 놓지 않았습니다.

디아스포라(Diaspora) : 그리스어로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인들 중에 팔레스타인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산(離散) 유대인' '이산의 땅'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유배지에서 유다땅으로 돌아온 공동체를 뜻하는 '팔레스타인 공동체'와 달리 팔레스티나 이외의 지역, 특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공동체를 '디아스포라 공동체'라고 부른다

수년째 시(詩)작업에 몰두하고 있다는그는 4.3의 세계화를 위해 '4.3의 디아스포라(Diaspora) 공동체'를 강조하며 "제주도민들이 힘을 결집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재건한 것처럼 4.3으로 흩어진 디아스포라를 한데 모아 4.3을 재건해내고 튼실한 역사의 장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또 그는 "4.3의 세계화는 전 세계적으로도 상당한 관심거리"라며 "4.3이 동북아 전후 역사의 첫장을 열 수 있는 역사 교과서가 될 수 있도록 남을 생을 바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습니다. 이는 제주도민들이 좌우(左右), 상하(上下)가 아닌 또 다른 차원의 4.3공동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목소리로 들립니다.

4.3원혼 앞에서도 어떤 마음으로 꽃을 들고, 향을 피울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어머니다운 역사를 사는 지혜와 더불어 상생하라는 자연의 뜻이 4.3에 담겨 있습니다. 진정한 상생과 화해를 위해서는 우리가 끌어 안아야 할 것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사의(私意)보다 대의(大意)를 좆았던 무장대의 활동이나 이념과 정치, 권력앞에 총과 칼을 쥘수 밖에 없었던 군.경들, 아직도 진상규명이 안된 억울한 4.3 수장(水葬)인과 수형인의 주검들...물론 그 안에는 명백한 진실과 진상규명이라는 명제가 있습니다.

제주의 소리
는 앞으로 '평화와 인권',  '화해와 상생'이라는 대전제 안에서 4.3 역사의 복원과 상생의 기록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4.3 공동체 복원'를 위해 좀 더 고민하고, 도민의 눈과 귀를 모을 것을 약속합니다. 역사의 뒤켠에 있었던 약자와 민초의 입장에서 눈높이를 맞추고 조용히 귀 기울일 것을 다짐합니다. 그리고 좀 더 올곧은 역사가 살아 숨쉬는 해가 될 수 있기를 진정으로 소망합니다.

'...민중은 풀과도 같은 것이다, 밟아도 베어도 잘라도 찢어도 쏘아도 오히려 땅속 아래서 아래서 엉키며 부둥켜 안으려 아침해와 더불어 슬며시 일어서서 드디어 푸르름을 지니며 꽃을 피우고 열매맺는 생동하는 존재이다. 이제 제주도 민중은 40여년의 어둠과 짓밟힘을 헤치고 다시 딛고 일어서는 아침의 해를 마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주도 민중은 일어서고 있다. 슬며시 슬며시....' (1988. '제주민중항쟁Ⅰ' 서문에서)

▲ 세월 속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한수기오름 정상에 있는 묘비. 비문의 마지막줄에 '보성리경변 소계악'이라는 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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