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후 칼럼> 철새 정치인들, 진짜 철새에게서 배워야

올해 들어 철새가 각광을 받고 있다. 우선 조류인플루엔자(AI)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탐조객의 사랑을 받던 겨울 진객 철새들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버렸다. AI가 발생할 때마다 철새를 유입 경로로 추정했을 뿐 정확한 원인 규명에 실패한 것은 올해도 마찬가지다. 철새와 공장식 집단사육 시스템을 놓고 공방만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철새 정치’ 논란이 되풀이되고 비판적 목소리도 크게 들린다. 이 당 저 당 옮기기를 밥 먹듯 하는 사람들을 얕잡아서 ‘철새 정치인’으로 부른다. 정치적 목표나 신념에 따른 행동이라고 반박하지만 비난을 피하기는 어렵다.

조류 학자들은 선거철에 자주 거론되는 ‘철새 정치’는 소중한 생명체인 철새를 모독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철새들의 생태를 제대로 이해 한다면 ‘철새 정치’ 처럼 인간의 행동을 비하하는 말로 함부로 사용해서 안된다는 것이다.

철새는 번식지와 지내는 곳이 따로 정해져 있어 철따라 옮겨다니며 산다. 북쪽 지방에서 찾아오는 겨울철새와 남쪽 지방에서 찾아오는 여름철새가 있다. 철 따라 머나먼 대륙을 횡단하면서 반 정도만 살아 남는다고 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긴 여정에 오르는 것이다.

철새는 생존을 위해서 최적의 장소를 찾아 이동한다. 장거리를 비행하는 철새들의 이동 원리는 탐구대상이다. 전문가들은 무리지어 하늘을 나는 군무는 에너지 소모를 줄여 먼거리 비행에 따르는 희생을 최소화하는 효율적인 장치라고 말한다.

철새는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고 먹이가 풍부한 지역에 모인다. 겨울이면 갯벌, 저수지, 강가, 습지에서 많은 새들을 목격할 수 있다. 한강 밤섬은 퇴적작용이 거듭되면서 철새 서식지로 재탄생되었다. 하지만 4대강 사업과 같은 난개발은 철새들의 살만한 공간을 없애버려 우리나라를 찾는 철새들을 크게 줄어들게 할 수도 있다.

철새들은 자연을 아름답게 만들어 인간의 감수성과 상상력, 창의력을 자극한다. 스토리텔링, 그림, 음악, 사진, 영화 등 빼어난 예술품을 창조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와 같이 철새는 유익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철새를 기다리며 환대한다. 많은 철새들은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다. 철새가 찾는 땅은 인간이 살만한 곳임을 뜻한다.

우리의 거대 정당들은 당적을 옮기는 정치인을 철새에 빗대어 비판에 열중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정치판은 어떤가. 기성 정치권에서 책임감, 균형감, 대의와 신념에 기반한 정치적 소명의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선거 때는 화려한 분장을 하고 유권자들을 유인한다. 선거가 끝나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상실증에 걸리기 일쑤다.

정파 간에 이념과 가치관, 지향점의 차이가 없다. 지역과 연고 의존정치, 일방적 종북사냥, 극단적 대결양상은 기성 정당의 기득권 체제를 더 공고하게 만들고 있다. 거대 정당의 극심한 경쟁이 오히려 자기 진영의 기득권을 강화하고 진입장벽을 높이고 있는 셈이다. 공익보다는 사익을 우선시하는 작태도 엿보인다.

기득권 고수에 집착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기존 정치구조를 타파하고 한층 성숙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패러다임의 전환과 담대한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시기에 ‘철새 정치인’들이 힘을 모은다면 불쏘시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철새 정치인’은 생존과 권력 욕구가 맞물려 만들어 진다. 여기에 강력한 정치적 혁신의지와 추동력이 합쳐진다면 형식적 민주주의를 실질적 민주주의로 전환시켜 우리의 정치 환경을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철새 정치인’들은 대안 세력으로서 질 높은 담론 경쟁, 개인과 공동체가 조화되는 숙의 민주주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

▲ 권영후 소통기획자.

의사소통의 평준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정치권력의 독점적 지위는 거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철새 정치인’은 역사적 사명을 통찰하고 능히 이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철새 정치인’들이 철새들의 생존 능력, 환경 적응력,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모습에서 교훈을 얻는다면 낙인된 오명을 벗을 수 있다.

철새는 목숨을 걸고 자유롭게 자리를 이동하며 생존을 영위한다. 자유로운 영혼의 대표선수인 ‘그리스인 조르바’와 비슷하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인이다”는 그의 묘비명은 권력의 노예가 되어 기득권에 집착하고 있는 정치인에게 자아성찰의 기회를 줄 것이다. / 권영후 소통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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