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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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꽃을 피우다] 프롤로그-연재를 시작하며

 

▲ 유배인들은 원악지 제주에서 생활하면서 지방관원들에게 시달림을 받기도 했고, 집을 빌려준 보수주인에게 구박을 받기도 했다. ⓒ장태욱

또 바람이 났다. 마음속에서 다시 제주 땅 구석을 누벼야겠다는 충동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몇 번 경험해본 건데, 대개의 바람이 그렇듯이 기행에 빠져 사는 건 맛있고 흥미롭지만, 생업에는 크게 위태롭다. 그런데 그 일렁이는 바람을 억제할 수 없다. 마지막 바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에는 유배지를 마음껏 누비기로 했다.

유배는 죄인을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귀양 보내는 형벌의 일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삼국시대에서부터 이 형벌이 행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유배인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역성혁명과 왕자의 난 등 조선 초기의 혼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에 따라 반복되던 사화, 동서 붕당의 형성과 더불어 일상화된 당쟁 등 항상 불안정했던 조선의 정치는 늘 승자와 패자를 낳았다. 그리고 그 패배자들에게는 어김없이 유배형이 내려졌던 것.

<조선왕조신록>에 나타난 전국의 유배지와 유배인의 수는 245곳 700여명 정도인데, 그중 가장 빈도수가 많은 곳은 당연 제주도(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추자도 등)다. 조선의 개국에 반대하다 유배된 한천을 시작으로, 일제가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과 연관시켜 제주도에 유배시킨 이승훈까지, 이 섬에 유배된 자는 260여명에 달한다.

제주도는 원악지 중에 원악지였기에, 제주도 유배는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형벌이었다. 제주가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데다 바람이 세차고 먹을 게 귀했기 때문이었다. 제주목에 유배되었던 북헌 김춘택은 “제주는 벼슬하는 수령들조차도 두려워하고 슬퍼하는데 유배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다”고 한데서 이 섬이 외부인들에게는 얼마나 기피의 대상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유배인들은 유배를 명받은 후 한양을 출발하여 육로를 통해 전라도 영암이나 강진, 해남 등지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이들을 태운 배는 중간에 보길도나 소안도, 진도 등을 경유하여 제주에 도착하였는데, 당시 항해 기술로는 풍랑 이는 거친 바다를 건너는 게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유배인은 제주목사에게 인계된 후에 정해진 배소에 안치되었는데, 이후로는 풀려날 기약 없이 추위와 배고픔, 질병과 고독 등과 늘 마주해야했다. 그 와중에 때로는 지방관원들에게 시달림을 받기도 했고, 집을 빌려준 보수주인에게 구박을 받기도 했다. 유배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운 형별이었다.

 

▲ 대정향교. 추사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예술 혼을 갈고 닦았다. ⓒ장태욱

그런데 유배에 반드시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문열이 일찍이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라고 했듯이, 유배 가운데 현실의 절망가운데서도 삶의 성취를 이뤄낸 경우들이 많았다.

유배인들은 불우한 환경을 자신들의 소중한 창작공간으로 만들어 문학과 예술에서 훌륭한 성취를 이루기도 했다. 그 대표적이 예가 추사 김정희다. 추사는 1840년 윤상도의 옥사와 관련하여 대정현에 유배되었는데, 제자 이상적이 노력 끝에 구해준 수많은 서책들을 유배지에서 독파했다. 그가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그렸다는 세한도는 당대 최고의 역작으로 통하고. 추사가 유배 중에 이른 학문적 업적은 훗날 사촌 민규호에 의해 <완당집>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추사체는 그가 유배지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서도에 정진한 결과 도달한 서체의 완결판이다. <완당집>, 세한도, 추사체 등 그의 모든 학문적, 예술적 성취가 제주도 유배의 결실이라 이를 만하다.

또, 유배지에서 후학들을 키워내 제주도에 학문이 전파되는데 크게 기여한 이들도 있다. 1618년에 제주에 유배된 간옹 이익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익은 유배기간 중 제주 여인과 결혼을 했고 현지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익의 제주들 중 고진홍은 65세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는 기염을 토했고, 김진용은 장수당에서 후진을 가르치며 제주 유학의 확산에 기여했다. 그리고 이익이 제주에서 낳은 자손들은 이후 과거에 대거 합격하면서 도내 학맥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유배지에서 아름다운 사랑이 꽃핀 경우도 있다. 1777년에 정조시해 사건과 연류되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제주로 유배되었던 정헌 조정철이 그 경우다. 그는 제주목에 유배되었다가 홍윤애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당시 제주목사였던 김시구가 계략을 꾸며 홍윤애를 매질하여 조정철에게 불리한 진술을 받아내려 했지만, 홍윤애는 끝까지 입을 다물다가 매질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26년간의 제주 유배 생활 못지않게 처절하여 듣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글을 쓰는 계기가 독서에서 마련되는 경우가 많다. 10여 년 전 지금은 고인이 된 양순필 교수의 <제주유배문학연구>(제주문화)를 우연히 접한 것이 제주도 유배에 관심을 잦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틈틈이 유배 관련 서적들을 준비하고 읽었다. 조선시대 유배의 성격은 전웅의 <유배, 권력의 뒤안길>(청아출판사)를 통해 다소 이해하였고, 제주도 유배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김재형 씨가 제주대학교에 석사 논문으로 제출한 <조선시대 제주유배인 실태분석과 특징>이 크게 도움을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제주문화원은 이건의 <규창집>, 임징하의 <서제집>, 조정철의 <정헌영해처감록>, 김춘택의 <북헌집>, 김윤식의 <속음청사> 등 유배인들이 제주에서 썼던 주옥같은 저술들을 한글번역본으로 발간해주었다. 이 책들을 통해서 유배인들의 삶과 애환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 연북정. 제주에 부임했던 지방관들과 유배인들이 북쪽 바다를 바라보며 육지 소식을 기다렸던 곳이다. ⓒ장태욱

이 연재는 조선시대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사람들의 자취를 찾아 가는 유배지 기행문이다. 기행을 통해 사화와 당쟁의 바람이 휘몰아쳤던 과거라는 역사와, 화산섬이자 관광지인 제주의 현재 모습을 동시에 대면하고자 했다. 처음에 글의 방향을 잡는데 애를 먹었는데, 이종묵 등이 지은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북스코프)가 훌륭한 나침반이 되어 주었다.

유배를 소재로  주옥같은 글을 남겨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연재의 제목을 ‘유배, 꽃을 피우다’라고 정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제주 유배는 절망 가운데서도 문학, 예술, 학문, 사랑 등 섬에 찬란한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이번 기행을 통해 제주의 과거와 현재, 인문과 자연의 향기를 동시에 맡을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 가득하다.

다시 바람이 분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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