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26) 김석범·현기영 선생과 동경 웃드르에서의 하루

수장굿과 세월호의 슬픈 죽음들을 위무하고 떠난 날

▲ 4․3 때 쥐도 새도 모르게 수장당한 칭원한 넋들을 달래기 위해, 66년 만에 산지항 제2부두 방파제에서 벌인 수장해원상생굿. 세월호 사고로 분위기는 더욱 무거웠다.

하늘이 온통 슬픈 날이었다. 폭우는 아니었지만 시작과 동시에 뿌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제법 굵어지더니 비옷을 입어도 몸을 적실 정도가 되었다. 특히 제주의 비는 언제나 바람을 타고 뿌려대는지라 나이 드신 유족 어르신들이 크게 고생했다.

산지항 제2부두 방파제에서 치러진 굿판. 계속 불어대는 바람이 훅훅 긁어 올리는 갯것이 특유의 짠맛과 비릿한 칙칙함이 범벅이 된 ‘4․3수장해원상생굿’이었다. 오래전부터 수장굿을 한번 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올해는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 가장 은밀함으로 해서 가장 비열하며 잔인한 죽임, 수장(水葬)이었다. 물론 이 표현은 분명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장사 지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용어가 이 은밀한 죽임을 표현하는 공식용어인지라 그리 사용했을 뿐이다. 어쨌든 물에 잠긴 건 마찬가지다. 사실, 물에 빠져 죽은 이의 넋을 달래는 굿은 혼을 물에서 건져 올리는 의식이다. 한데, 이 굿을 준비하는 동안 갑자기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그로 인해 진행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이 깊었던 굿판이었다. 어쨌든 굿이 끝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한듯하면서도 옆구리 한쪽이 허전하다.

오후 3시, 행사를 마치자마자 집으로 와서 어젯밤에 챙겨둔 백팩을 들쳐 업고 공항으로 나섰다. 동경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동경’과 ‘도쿄’, 이는 마치 ‘북경’과 ‘베이징’의 어감상의 차이처럼, 읽기가 다르다는 것 빼고는 같은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늘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어감은 단순히 음성학적 차이가 아니라, 어감이 간직한 어떤 시대적 기억들과도 연관이 있다. 일테면 동경이라는 말 속에는 일제라는 식민지의 시간과 기억, 즉 서사가 존재한다. 물론 그 기억들은 내가 체험한 기억이 아니라 전수된 기억이다. 하지만, 도쿄나 베이징은 역사와 기억이 탈각된 이국의 수도일 뿐이다.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동경의 웃드르(우에노, 上野)로 향했다.

▲ 우에노(Ueno)가 ‘웃드르’인 것은 이번 여행에서 처음 깨달았다. 일본의 선조들도 우리처럼 자기 마을을 두고 위아래의 지리적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우에노는 예전에 관동에서도 북부지역의 억센 주민들이 살았던 관문이며, ‘촌동네’였던 것이다.

동경의 4․3운동가 조동현 선생

오래전에 약속했던 노정이었다. 이번 바쁜 일정 중에도 동경 방문을 하게 된 건, 깔끔할 뿐만 아니라 특히 일에는 ‘완벽주의적’ 또는 ‘일본적 스타일’을 지닌, 약간은 까칠한(?) ‘조동현 선생’이 전적으로 주범이었다. 제주사람들은 4․3과 관련된 분들 빼고는 잘 모르는 이름일 것이나, 동경의 재일한국인 사회에서 조동현의 이름은 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는 오래전부터 동경에서의 4․3운동을 이끌고 있는 양반이다. 그는 1948년생이다. 4․3이 발발한 그해에 생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서울에서 공부한 엘리트 지식인이면서 좌익사상가였던 조규창 씨다. 그의 생가는 지금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의 부친은 48년에 검거되어 모진 고문 끝에 풀려나자마자, 강보에 싸인 그를 안고 그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그는 일본에서 쭉 성장하였다.

그의 가족사는 남과 북 모두에 걸쳐 있어 민족사의 모순이 한 가계를 관통한다. 문학이나 예술 쪽에 재능이 다분했던 그는 일본의 조선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학생 시절엔 브라스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고, 22세에 입사한 신문사 시절, 합창부의 지휘자가 되어 3년 연속 우승을 안겨주기도 했다. 사회부 기자 시절에도 예술 공연만 있으면 들락거렸다고 한다. 이런 그의 이력은 이후 4․3행사에서, 2부 행사를 공연으로 채울 때 여지없이 발휘된다.

당시 그는 평생의 반려가 된 ‘금강산가극단’의 프리마돈나였던 현재의 아내 고영희 씨를 만난다. 어쨌든 성장한 그는 잘 나가던 소위 조총련계의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그런 그가 문득 신문사를 그만둔다. 그의 나이 36세, 신문기자 생활 13년 삶에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했다. 신문사 내에서도 편집 방향이나 보도지침 등을 놓고 몇 번의 부침이 생기면서, 더 이상 비전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대책 없이 조선신보 사회부기자 생활을 관두었다. 이때부터 자연적으로 총련 일도 그만두게 되었다. 

이제 호구지책으로 먹고사는 일을 해결해야 했다. 전직 기자와 A급 무용수 부부는 우에노에  작은 꼬치구이집을 냈다. 부부가 낮과 밤을 교대로 ‘돗배설’을 썰고 꽂고 하기를 3년, 사업은 슬슬 자리를 잡는다. 지금은 8개의 가게에 직원만 100여 명을 건사하고 있으니 성공한 인생 2모작이다. 이제 뭔가 사회적인 일을 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딱히 어떤 길을 갈 것인가를 정하지 못하고, 일종의 방황이랄까, 여러 길을 놓고 고민하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1997년의 이야기다.

▲ 그의 꼬치전문점 8호점 가게 간판이다.

그즈음 지인의 손에 이끌려 다음해 있을 동경의 4·3 50주년 준비모임에 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지금의 4·3동지들인 문경수 교수와 고이삼 신간사 대표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김석범 선생님과 이미 10여 년째 이 일을 해오고 있는 터였다. 그 자리에서 김석범 선생을 처음 만났다. 명성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고이삼은 그러한 그를 참여시키기 위해 설득했으나, 꼭 이 운동에 뛰어들 필요가 있는지를 놓고 장시간의 토론과 언쟁까지 벌이던 어느 날, 고이삼 씨로부터 《까마귀의 죽음》, 《화산도》를 읽어보라는 장문의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읽게 된 소설에서 그는 비로소 김석범이라는 거대한 산맥과 만나게 된다.

조동현 선생은 지금도 어느 자리에서든 김석범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김석범의 사람이 된 것이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그의 표현대로라면 “소설에 감동한 것뿐만 아니라 작가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김석범의 주의주장에 끌린 것이 아니라 인간성에 매료되었다. “선생의 일관성, 흔들리지 않는, 타협해 보지 않았던 그 정신이 가슴에 닿은 거지요.”라는 묘사처럼, 그는 김석범의 문학을 통해 4·3이 제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평화에 관한 철학까지 포괄한다는 지평을 보았던 것이다.

결국 신문기자에서 성공한 꼬치구이집 사장으로 변신한 그는, 다시 동경의 4․3운동가가 되었다. 김석범 선생을 만나면서 필생의 업보를 만난 것이다. 사실 그는 통일운동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4․3은 통일이라는 거대담론에 비하면 아주 지엽적인 것이었거나, 아예 인식 밖의 것이었으나, 김석범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이러한 인식론에 큰 파열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통일 문제는 4․3의 기초이며, 전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4․3운동과 통일운동이 동전의 양면임을 깨달았다. 아니, 통일을 넘어서서 세계적 지평과도 연결된다는 걸 깨달았다.

▲ 조동현, 고영희 부부. 동경 4․3운동의 가장 중요한 일꾼들이다.

물론 그가 이렇게 4․3운동을 할 수 있게 된 건 전적으로 그의 부인인, 한림 출신의 부모를 둔 고영희 여사 때문이었다. 고 여사는 금강산가극단의 잘 나가던 미모의 무용수였다. 그는 “기자한테 시집보냈더니, 곱창이나 다듬게 한다.”라고 장모에게 원망 어린 푸념을 들었던 힘겨운 시간도 감내했다. 어쨌든 그들은 부부이면서 곧 동지였다. 그들이 가세하면서 동경의 4․3운동은 부쩍 활기를 띤다. 그들의 활약으로 동경에선 매년 성황리에 4․3행사가 열린다. 또한 4․3운동의 목표도 재일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 주류사회에 4․3의 진실을 알리면서 4․3의 평화지향성과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쪽으로 확장된다. 

그들의 재정적 후원과 노력으로 동경에는 신간사의 사장 고이삼 선생과 동경대 출신의 수재이자 4․3 일꾼인 김양숙 선생, 유학생이면서 4․3에 관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이령경 선생 등이 뭉치게 된다. 물론 그 정점에 4․3의 원로인 김석범 선생이 위치한다. 그러나 이 행사는 유족들의 추모제는 아니다. 문화행사다. 강연과 공연으로 짝지어 매년 열리는 추모행사다.

그리고 이 행사의 주요 관객층은 대부분 일본인이다. 물론 한국인들도 있지만, 일본인들의 참여가 도드라진다. 이런 역사적 주제의 행사 한 번에 5백여 명이 모이는 풍경을 요즘 동경에서는 찾아보기 힘든데, 4․3행사만큼은 매년 행사장을 꽉 채우니 성공한 행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배면에는 ‘몸빵 발빵’의 숨은 일꾼들의 땀이 배어 있다. 특히 오사카의 위령제와는 달리 동경의 행사에는 NHK기자나 출판인들, 학자, 예술가들이나 한국에 대해 호감이 많은 일본인들이 참여한다. 대부분 일본사회의 지식인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4․3을 통해 한국을 이해하며 제주도를 인식한다. 그리고 한국, 일본,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염원을 공유하고자 한다.

▲ 합창단 뒷줄 맨 왼쪽이 고영희 여사,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조동현 씨다.

작년엔 1년 동안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부르는 모임’을 조직했다. 물론 대부분 일본인들이다. 조동현 고영희 부부도 합창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직접 노래를 불렀다. 이들의 열정은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가 80년대에 합창곡으로 부를 수 있게 편곡한 악보를 구해, 그 악보로 1년 동안 공연준비를 한 것이다. 작년 4·3전야거리굿과 4·3평화공원 위령제의 식전행사장에서 이들은 그동안 갈고 딱은 노래실력을 뽐낼 수 있었다.

올해 동경행사의 주인공은 소설가 현기영 선생이었다. 1부는 현 선생님의 특강, 2부는 재일교포 출신 락커 박모의 공연이 주요 프로그램이었다. 필자는 해원상생굿 때문에 일정을 하루 늦출 수밖에 없어 이 행사엔 참여하지 못하고, 이 행사의 뒤풀이가 이루어진 2차에서 참여했다. 이미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마침 4․3재단팀들과 실무위원회팀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뒤풀이 행사도 끝나고 현기영 선생과 김석범 선생 그리고 몇몇만 남은 채, 이날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4․3이야기로 꽃을 피우다 우에노공원 앞의 깔끔한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잠이 들었다.

▲ 호텔 옆의 거리에서 식사를 마치고 주왁주왁. 이 사진은 전적으로 기삼이 형을 한번이라도 지면에 나오게 하려고 필자가 찍은 서툰바치 사진들 중에서 겨우 찾아 붙인 것이다.

이튿날, 흐린 하늘에 낯선 가타카나와 히라가나로 채워진 간판들이 어지러운 우에노의 아침을 맞아, 마침 호텔 옆에 예약해 둔 코리안레스토랑인 청학동 분점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두 소설가의 대담이 이루어질 장소는 어제 우리가 뒤풀이했던 그 식당의 2층이었다. 마침 주간에는 영업을 안 하기에 대화 나누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우리가 도착하고 보니 어제 비교적 일찍 들어갔던(그래봐야 새벽 1시다.) 김석범 선생이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잡았다. 사회는 양원홍 원장이, 녹음은 후배인 김성현 씨가 맡았다. 그리고 사진을 찍기 위해 김기삼 선배가 예의 그림자인간처럼 똬리를 틀었다.

반도와 열도 그리고 섬의 연계점, 두 사람이 두 지역에서 하나의 역사적 기억을 공유한 인생들. 이 지정학은 아직까지 해소되지 않은 또는 청산되지 않은, 아니면 영원히 복구 불능의 역사적 내파인 4․3, 바로 거기에서 기원한다.

▲ 마주 앉은 두 4.3작가(김기삼 사진).

소설가 김석범

김석범(金石範, 1925~ ). 올해 연세가 89세다. 노익장이시다. 그는 얼핏 보면 단아한 목련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미수의 목련(?), 영 아닌 비유인가? 하지만, 풍모와 자태가 그렇다는 말이다. 미수를 지난 백발, 이제는 세속의 인생을 파한 듯한 용모에서 세월이 익으면 또 다른 향기와 자태가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분이다.

그는 재일제주인 2세다. 1세들의 연령대이지만 2세대다. 일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국적은 ‘조선적(朝鮮籍)’이다. 그는 1948년 일본 외국인 등록법이 생겼을 때, 남북한을 통틀어 ‘조선’으로 분류되었는데,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그대로 한국도 북한도 아닌 분단 이전의 ‘조선인’으로 남아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 ‘조선’.

그의 육신은 실존하지만 그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그 국가가 남북으로 쪼개어져 두 나라가 되었으나, 그는 분단된 나라를 그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유민(遺民)인 셈이다. 이 때문에 그는 김대중 대통령 취임 이전까지는 한국방문 시에 늘 순조롭지 못한 절차를 밟아야 했다.

▲ 김석범 선생(김기삼 사진).

김석범 선생의 출생지는 제주도가 아니다. 일본의 오사카다. 오사카 이쿠노쿠(生野區)의 이카이노(猪飼野)에서 태어나 자랐다. 김석범 선생의 본명은 신양근이다. 부친은 제주시 삼양동 출신이다. 1925년 이주한 지 2~3개월 지나서 그를 낳았다. 이카이노는, 일본인들은 1973년부터 ‘모모다니(桃谷)’라는 지명으로 바꿔 부르고 있지만, 재일조선인 또는 재일제주인들에게는 여전히 이카이노다. 그의 출생연도인 1925년은 제주도민의 오사카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의 초기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이카이노는 제주도민들의 집단거주지로, 학교에서는 공식어인 일본어를 쓰지만 생활언어는 제줏말이었다. 땅은 일본이었지만 사회는 제주였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은 뒷날 그가 제주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할 때 큰 자산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번역가 김석희는 그의 소설 《화산도》를 번역하면서 그가 묘사한 제주섬의 풍경과 풍속이 그렇게 사실적인 데 대해 놀라웠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는 나이 열세 살 때인 1940년에야 비로소 생애 처음 제주땅을 밟는다. 그는 제주에서 1년 가까이 생활하였는데, 이 경험은 그에게 있어 내면적으로 엄청난 충격적 변화를 일으킨다. 뼛속까지 반친일파인 것은 이때 이루어진 정체성에 기인한다.

식민지 출신 ‘황국소년’에서 제주섬사람으로 그의 정체를 다잡은 것이다. 비로소 그에게서 제주섬의 풍토는 정체성의 한가운데 자리 잡는다. 그가 소년시절 잠시 경험한 제주섬의 자연과 고향사람들의 언어와 생활상은 이후 그의 제주섬과 사람들을 주제로 한 소설을 써가는 데 장기지속의 원동력이자, ‘원풍경’이 된다.

성장 후의 그의 일대기를 잠시 살피면, 1945년 6월 일시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조국이 해방을 맞았다. 어릴 때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던 그는 국학대학(1947년 개교, 1967년 수도의과대학에 인수합병, 우석대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71년 고려대학교에 합병된 대학) 국문학과에 들어갔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이듬해 8월 그가 태어난 일본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간사이대학(關西大學)’ 전문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잠시 노동일을 하다가 ‘교토대학(京都大學)’ 문학부 철학과에서 미학을 전공한다.

이때 그는 이미 일본 공산당에 입당하고 있었다. 1948년 재일 조선인연맹(약칭 朝聯) 활동에 참여하기도 한다.  1951년에는 일본공산당을 탈당하고, 1959년 재일 조선인총연맹(약칭 朝總聯) 계열의 조선고급학교의 문학교과를 담당하는 교사로 부임하여 교직에 몸담기도 하였다. 또한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의 기자로, 《문학예술》지의 편집자로, 《삼천리》지의 편집위원으로, 다양하고 열정적인 활동을 전개한다. 그는 1968년 조총련을 탈퇴하게 된다. 이후 작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필명을 현재 널리 알려진 ‘김석범’으로 정하고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대표작으로 <까마귀의 죽음>, <1945년 여름>, <사기꾼>, <밤>, <화산도> 등과 조국방문기 <고국행> 등이 있다.

소설가로서의 김석범의 삶은 오롯이 4․3의 문학적 형상화의 삶이었다. 1957년에 발표한 그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인 《까마귀의 죽음 鴉の死》은 그 시작이었다. 그는 4․3을 통해 역사와 인간의 문제에 천착했다. 4․3사건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인간군상의 모습은 그가 이 세계를 이해하는 거대한 뿌리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대하소설 《화산도 火山島》의 마중물이기도 했다. 화산도는 그의 필생의 대작이다. 원고지 총 2만 2천 장. 2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의 수고로움을 더한 노작으로, 1976년부터 일본 《문학계》에 연재를 시작하여, 1997년에 7권으로 완간된다. 이 작품은 1997년 전(全) 7권으로 일본 문예춘추사에서 출간되어, 일본에서 권위 있는 아사히신문의 ‘오사라기지로(大佛次郞)상’과 마이니치신문의 제39회 ‘마이니치예술상’을 수상하는 등 작가적 명예와 문학적 성취를 동시에 이룬다. 

소설가 현기영

▲ 현기영 선생(김기삼 사진).

현기영 선생은 올해 73세다. 1941년 제주읍에서 한참 떨어진 노형리 함박이굴의 한 농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기에 4·3을 겪는다. 그가 7살 때 노형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1947년 3·1운동 기념집회발포사건으로 4·3항쟁의 블랙홀로 제주사회가 급격히 빨려 들어갈 때였다.

제주도 전체가 혼란에 빠지게 되는 시기가 그의 기억 속의 4·3의 시작이었다. 학교는 물론 제대로 다녀보지도 못했다. 이듬해인 1948년 4·3사건 발발 직전 식구 모두가 제주읍으로 소개되어 피난하게 되면서 그 해 북초등학교에 재입학한다.

아직 세상의 분시를 구분 못하는 나이였지만, 그와 4·3의 조우는 이후 그의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의 낙인이며, 지식인으로서의 역사의 부채 같은 것이 되고 만다. “금기를 덮어두면 덮어둘수록 역사는 전철을 되풀이 할 뿐 한 치도 발전 못한다.”는 신념과  “저승에 안착하지 못한 원혼들을 음습한 금기의 영역에서 대명천지의 밝은 태양 아래 불러내어 공개적으로 달래주”기 4·3심방 같은 역할을 한 평생 떠안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54년 오현중학교에 진학한 그는 이후 백일장에 나다니면서 글쓰기에 대한 동경심 속에 문학소년으로 성장해 간다. 196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 불어교육과에 입학하게 된 그는 군복무를 마치고 전공을 영어교육과로 바꾸고 같은 해 <대학신문> 문예현상모집에 응모한 단편 「산정을 향하여」가 가작으로 뽑히게 되면서 작가의 꿈을 꾼다.

1967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중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창작에 몰두, 1975년 드디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4·3항쟁 때 ‘폭도’에 가담한 아버지를 가진 주인공 소년의 불안한 심리를 묘사한 단편 「아버지」가 당선되면서 등단한다. 등단 이후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가면서 그는 유년기에 겪은 4·3사건을 소설로 형상화하기 시작한다. 전상의 시작이다.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 <순이삼촌> 등 4·3항쟁을 형상화한 소설들을 연달아 내놓으며 한국문단의 문제작가로 주목을 받는다.

1979년 그동안 발표된 4·3단편들을 묶은 소설집 《순이삼촌》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왔는데, 그는 이 책으로 인해, “아, 이 고통스러운 육체를 벗어버릴 수만 있다면! 정신을 배반하는 육체, 제 몸이 이렇게 저주스러울 줄이야.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차라리 죽을 수만 있다면!”이라고 소설 <위기의 사내>의 주인공 ‘한기웅’의 입을 통해 고백하게 되는 생애 가장 참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책이 출간되고 현기영은 당시 재직 중이던 서울사대부고에서 성동경찰서로 연행 당한다. 그리고 며칠 뒤 당시 민주화인사들을 탄압하기로 악명 높은 서빙고동 보안사의 합동수사본부로 인계된다. 그리고 그는 2박 3일 동안 꼬박 고문과 육체적 학대를 당한다. 결국 이때 20일간의 구류처분으로 풀려나지만, 1980년 5.18광주민주항쟁 이후인 8월 다시 종로경찰서에 연행 당해 조사를 받는다. 그리고 《순이삼촌》은 판금도서가 되어 자취를 감춘다. 그러니 필자가 81년도에 대학에 진학한 후 눈을 씻고 보아도 이 책을 구하기 힘들 수밖에 없던 것이다.

제가 40년간 작품 활동을 했는데 그 중 3분의 1에 해당되는 것이 1948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사건에 대한 이야기에요. 제 독자들은 현기영을 4·3작가라고 하는데, 사실 제가 4·3사건만 쓴 건 아니에요. 3분의 2는 4·3이외의 것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저를 4·3작가라고 하는 것을 보면 현기영이라는 작가가 4·3이야기를 쓴 것이 중요했던 모양이에요.(네이버케스트)

그의 말처럼 그가 4·3작품만 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외의 작품들도 오히려 그는 역사학자들이 다하지 못한 역사의 부활, 역사의 복원에 집중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역사적 기억의 앙상한 뼈인 연표와 기록을 넘어서서 살을 붙이는, 심장을 뛰게 하는 일에 매달렸다.

특히 그의 ‘제주사 연작’이라 부를만한, 19세기말 2년 간격으로 제주섬을 뒤흔들었던 두 민란, ‘방성칠 난(1898년)’과 ‘이재수 난(1901년)’을 소재로 장편 《변방에 우짖는 새》(1983, 창비)를 내놓고, 4·3항쟁의 전사에 해당하는 1932년 발생했던 ‘세화리해녀항쟁’을 그린 또 하나의 장편 《바람 타는 섬》(1989년, 창비)을 내놓는다. 사실 이 창착연대기는 제주 4·3을 이해하는 컨텍스트다.

이 두 작품은 그가 4·3의 온전한 모습, 즉, 미군정보고서나 당시 재판기록만으로는, 즉 역사적 시각과 방법론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제주섬에서 반복된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복원함으로써 4·3의 정당성과 국가폭력에 의한 토벌의 부당성을 밝혀내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순이삼촌> 등 단편으로만 그려진 ‘현기영 4·3’의 진정한 결실은 아직 거두지 못했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생애 마지막 대업 즉 4·3의 양측면, ‘봉기의 정당성’와 ‘학살의 부당성, 야만성’의 전모를 오롯이 담은 4·3장편이 언젠간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랬을 때 그의 ‘제주사 3부작’이 완결될 것이며, 그의 인생에서 4·3심방으로서 4·3의 ‘본’을 다 ‘푸는’ 전상도 끝을 맺지 않을까?

제5회 신동엽창작기금(1986)과 제5회 만해문학상(1990), 제2회 오영수문학상(1994), 1999년 한국일보 문학상, 제12회 아름다운작가상(2013년)을 수상했다.

대담, 김석범과 현기영

사실 이 대담이 처음부터 거창하게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전적으로 어디 가나 성실한 우리들의 영원한 프로듀서 양원홍 원장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양 선배는 일을 성사시켜 놓고 전날 1부 대담은 끝낸 상태였다. 여기에 필자가 제주 최고의 사진작가인 김기삼 선배를 투입(?)한 셈이다. 기록의 중요함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4․3문학의 대가들을 이렇게 조우한다는 일이 그리 쉬운 일도 아니고, 어쩌면 다시 이루어지지 못할 일이었다. 하여 욕심을 부렸던 것이다.

▲ 첫날 이루어진 좌담회 장면. 평화재단 이문교 이사장이 사회를 보고 김석범 현기영 두 선생이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문교 이사장은 오사카위령제에 참가해야 했기 때문에 다음날의 진행은 양원홍 원장이 바통을 이었다. 똑딱이 사진이라 화질이 별로다.

“어떻게 해서 4․3을 소설로 형상화하게 되셨는지요?”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맨 처음 두서없이 김석범 선생께서 말문을 연다. 예의 “4․3은 말이오.”로.

기억이 말살당한 곳에는 역사가 없는 것이오. 역사가 없는 데는 인간의 존재가 또한 없는 것이고. 다시 말해서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사람이 아닌 주검과 같은 존재가 되는 거요. 반세기가 넘도록 기억을 말살당한 4·3은 한국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지. 입 밖에 내놓지 못하는 일, 알고서도 몰라야 하는 일인 것이다 말이오.

나는 이것을 ‘기억의 자살’이라고 불렀습니다.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 자신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쳐서 죽이는 기억의 자살인 것이지. 결코 묻혀서는 안 될 4․3의 기억을 부활하고 싶었던 거요. 《까마귀 죽음》은 이 기억의 부활이오. 아마 이 글을 쓰지 않았다면 절대적 진리나 가치를 부정하는 ‘니힐리스트’였던 나는 자살해서 죽었을지도 모르지요. 결과적으로 내 안의 니힐리즘을 극복하기 위해 이 소설을 쓴 셈이오

▲ 기억의 부활을 얘기하는 대목에서 대쪽 같은 김석범 선생의 눈에도 이슬이 맺힌다.

이어 현기영 선생께서 받는다.

선생님께서는 ‘기억의 자살’이란 말을 쓰셨는데 저는 이것을 ‘기억의 타살’이란 말로 많이 씁니다. 어쩌면 우리 도민들 스스로가 망각하고픈,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이지만, 4·3 이후 막강한 공권력에 의한 금기였으므로 ‘기억의 타살’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매우 의미심장하게 제시한 한 장의 캄보디아 내전 사진이 있습니다. 폭격 맞아 집은 반쯤 허물어졌는데, 현관 앞 계단 아래 민간인 시체들이 여럿이 널브러져 있고 그 계단 맨 위에 한 어린 소년이 처연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거기에 죽어 널브러진 사람들이 살아남은 그 소년에게 그 현장 밖의 사람들을 그러한 시선으로 응시할 의무를 부여했다고, 롤랑 바르트는 그 사진에 주석을 달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현장 밖의 사람들은 그 소년의 처연한 눈빛을 통해 그 비극, 그 떼죽음을 보게 되는 것이죠. 주제넘게 말해서, 그 소년이 바로 나였던 셈이죠. 죽음의 4·3에서 어린 나이에 살아남은 자인 나는 그래서 세상을 향하여 그 소년의 시선으로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4·3의 진상에 대한 기억을 말살하려는 ‘망각의 정치’로 인하여 민중의 집단적 기억은 무참히 깨어져 있었던 시절에 《순이삼촌》은 그렇게 태어났던 것이죠.

《까마귀의 죽음》과 《순이삼촌》은 각각 일본열도와 한반도에서 부활한 4․3의 기억이다. 그들의 최초의 이 고백에서 작가로서의 두 선생에게 4․3은 개인적이면서 총체적이었던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4․3은 저리 절절한 것이었는가 하고 새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1981년 겨울이었을 게다. 당시 현기영 선생의 《순이삼촌》은 이미 판금되어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화석 같은 책이었고 소문이었다. 학내 서클에 가입하거나 운동권학생도 아니었던, 그저 책 읽기 좋아하고 그림 그리며 밤새우는 일이 행복했던 대학 1학년생이었던 필자는, 그 책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1학년 겨울방학 때쯤 복사본을 구하게 되었고, 마치 고고학자가 고대유물을 발견한 듯 한껏 고무되어 현 선생의 《순이삼촌》을 하룻밤에 내처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책을 제대로 된 장정본으로 읽게 된 건 그로부터 오랜 후의 일이다. 그런데 그 책과의 조우, 아니 그 책이 담고 있는 《순이삼촌》의 내력담인 4․3의 이야기는 그 후로 필자의 삶을 통째로 바꾸어 버렸다. 그동안의 의식구조를 통째로 헤집어 버린 것이다. 필자의 성정에 들어있는 반골의 기원이다. 그리고 그것은 화가지망생이었던 나에게 그림은 무엇인가, 예술은 무엇인가,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역사는 무엇인가 하는 깊고 무거운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그

렇게 시작된 ‘질문하기’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나이 50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필자는 그 질문의 노정 위에 있다. 앞의 두 분은 4․3의 시대에 이미 소년이었거나 청년이었지만, 그들이 되살려내고 상상력으로 형상화한 4․3을 만난 나에게 4․3을 실감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순이삼촌》이 그렇게 강렬하게 나를 헤집은 것은 당시까지 우리를 억눌렀던 군사독재의 음울한 사회상과 반작용으로서의 시대정신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 현기영 선생이 김석범 선생에게 《똥깅이》를 증정하기 위해 사인을 하고 있는 모습.
그 사이 대담은 많이 진척되었다. 가만히 앉아서 귀동냥만 하기에는 아까웠던 나는 스케치북을 꺼내어 오랜만에 연필로 두 분의 얼굴을 그렸다. 풀리지도 않은 손길에 그림이 뜻대로 나오지 않는다. 역시 손과 발은 써야 살아 있는 법. 아날로그의 진실은 용불용설이다. 그래도 대담이 끝날 때쯤에선 대충 두 어른의 기념 소초를 마무리했다. “언제 다시 이렇게 그릴 날이 있으리오.” 하는 마음에서였다.

“마지막으로 한마디씩 해주시죠.”라는 사회자의 요청에 김석범 선생이 먼저 입을 연다. “거 평화재단인가 하는 곳에 백비라고 있잖여. 그거 언제 일어설 거라 그거.” 하는 말에 현 선생이 “그걸로 합시다. 그거. ‘이제 4․3의 과제는 이 백비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로 합주.” 이때부터 정연했던 대담이 중구난방으로 치닫는다.

김석범 선생이 말을 잇는다. “거 세우지도 않고 언제 통일이 됐댕 해영 기다려그네 정명해보젠 햄서. 언제까지 살아 보젠.”, “백비 거 정명 못해도 세와불자.”, “게믄 통일도 되어!” 현 선생이 필자를 향해 “아 그거 기냥 세와불자.”, “야, 약간 들듯이 세우라 게, 야! 나 아이디어 하나 제공해쩌이. 아, 세왔다가 딱 떨어지고 세왓따가 딱 떨어지멍 세우는 거지 뭐!” 김 선생님 왈, “하여튼 간에 백비 세와불게!” 마지막 대담은 두 대담자, 필자, 성현 씨, 기삼이 형, 사회 보던 양 원장까지 가세하여, 백비 세우는 이야기로 낄낄대면서 끝을 맺었다. 그렇다. 백비를 세우는 날, 이 지리한 위령과 망각에 대한 두려움과 가슴에 묻어둔 한들도 사라질지 모르겠다. 백비 세우자는 소란 속에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에 따뜻한 기운이 솟아오르는 걸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 대담을 끝내고 뒤풀이 가기 전 기념으로 한 컷. 동경의 또 다른 4․3운동가이며 출판사를 운영하는 고이삼 신간사 대표(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함께했다. 이글에서는 깊게 다루지 못했지만, 서로 말이 안 통해 언제나 인사만 나누게 되는 고이삼 씨는 어쩌면 동경의 가장 중요한 4.3운동가이기도 하다.(김기삼 사진).

다시 저녁이 찾아오자 ‘청학동’으로 깃들다

‘청학동’은 식당 이름이다. 우에노에 있는 한식전문점인데, 7년 전 방문 때에도 이 식당에서 4․3행사 뒤풀이가 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식당은 그대로 세월만 쌓인 듯 낯익고 반가웠다. 이 식당의 주인은 손맛 좋은 인천댁인데, ‘마마(우리말로 주모를 올려 부르는 의미?)’라는 별칭 애칭으로 불린다.

오늘도 역시 예의 한국의 인간문화재 장인의 작품이라고 바닥에 각인된 놋식기를 상 위에 깔더니, 맛깔난 음식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상에 오른다. 필자의 식탐이 아드레날린을 맞은 듯 용솟음친다. 오늘은 편안하다. 사람 수가 단출해서 도란도란 담소도 나누고, 한마디씩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늘 그렇듯 거사(?)를 치른 뒤에는 각자의 소감과 나름의 비평이 따르는 법이다. 이 자리도 어제 발휘했던 각자의 수고로움들을 서로 보듬는 자리였다.

▲ 김석범 선생의 미수 기념 및 4․3동경행사의 뒤풀이 자리. 필자도 대강의 4․3행사를 마친 후의 일본행이어서 이날은 긴장 풀고 함께 어우러질 수 있었다.

사연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 그 사연이 4․3으로 교집합을 이루며 파문을 그릴 때에는 서사의 감성에서만 우러나오는 눅눅한 회한 같은 것, 형용하기 어려운 신묘한 맛이 나온다. 그래선지 각자가 돌아가면서 4․3과 엮인 인연, 그동안 일본에서 4․3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본인은 어떻게 꼬이고 엮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줄을 잇는다. 그리고 제주에선 들을 수 없는 소위 ‘자이니치’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해방이 되고 나서 민족학교를 세우기 위해 일본의 조선인들이 어떻게 투쟁했는지, 자신이 이 나이에 이르도록 일본사회에 뿌리 내리고 살면서도 한국어를 능란하게 구사하면서 이렇게 좋은 날 우리의 말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 인연이 실은 고된 재일조선인들의 투쟁의 선물이라는 이야기 등.

한국에서 유학 온 이령경은 새침데기처럼 앉았다가 말 안 시켜주면 죽었을 듯, 입을 열자마자 그동안 일본에 오게 된 배경과 이곳에 와서도 결국 찾아간 곳은 4․3행사장이었다는 것, 아무런 안면식도 없었지만 지금은 가장 친한 4․3모임의 선후배들을 만나게 된 이야기 등 전상의 이야기들을 따발총 갈기듯 쏟아낸다. 

▲ 김성현 씨가 특유의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자 좌중은 금세 노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결국 내 차례가 되었는데, 나도 ‘구라’ 푸는 데는 둘째 안 가는 스타일이었지만 막상 말을 꺼내려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결국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 이곳에도 4․3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처럼 여기고 사는 분들이 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연대의식 같은 것. 굳이 말이 필요 없는 교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물이 글썽거렸다. 여러 말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행복감이 밀려왔다.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차오르는 따스한 충만감 같은 것 말이다. 

기억의 저장소 현해탄 너머 열도의 땅

▲ 1988년 4월 3일 일본 동경에서 열린 4․3 40주년 추도 기념강연회(제민일보 사진).

돌아보면, 4․3의 부활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첫 4.3작품인 《까마귀의 죽음》이 1957년에 발표되었으니 부활의 최초에 김석범 선생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 더 기원을 소급하면, 4․3 당시 매타작당하고 앉아서 죽을 수 없어 현해탄을 건너온 이쿠노쿠 시장의 수많은 제주삼촌들이 목숨 걸고 전해 준 이야기들이, 뼛속에 각인되어 전해 준 증언들이 기원이라면 기원인 셈이다. 김석범 선생은 그 이야기들을 소설로 살려 쓴 것이다. 그러니 결국 현해탄을 건너 살아남은 입들과 뼈에 사무치는 경험이 이야기를 낳게 된 것이다.

그 후 이는 다시 몇몇 사람들의 모임으로 뭉쳐지게 되고, 책에서 나온 글들이 살이 되고 뼈가 되어 사람이 되고, 사람과 사람들이 뭉쳐, 일본에서는 ‘4․3을 생각하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1988년 한국은 올림픽으로 성시를 이룰 때, 그 모임이 격발한 4․3위령제가 이곳 동경에서 열린 것이다.

지금은 강원도에 정착하신 김명식 선생, 국회의원이 된 강창일, 당시 유학생이던 이규배(국제대교수) 등도 힘을 보태었다. 그렇게 4․3이라는 그 징한 기억의 부활과 진상규명의 역사적 당위의 사회화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989년 드디어 서울에서 열린 4․3 41주기 추모제는 일본에 있던 강창일 등이 서울로 돌아오고 서울에서 일찍부터 4․3을 찾아 나선 제주도 지식인 그룹들과 만나게 되면서 시작된다. 바로 ‘제주사회문제협의회’ 멤버들이 그들이다. 고 정윤영, 현기영, 고희범, 고 김순택 등과 후배그룹 여럿이 함께했다.

그리고 그해 4월 제주, 1948년 4․3사건 이후 처음으로 대중적이고 공개적인 4․3집회가 제주시민회관에서 열렸다. 긴 세월이었다. 41년이 되어서야 섬을 떠난 4․3은 살기 위한 도피처였던 열도에서 반도로, 반도에서 다시 섬으로 귀환했다. 삭제 당하길 강요 당했던 4.3의 기억은 그렇게 부활한 것이다. 결국 일본에서의 4․3과 한국에서의 4․3부활의 노력, 기억의 복원은 기실 한 탯줄이었던 것이다.

사실 섬에서의 봉기는 무모한 전략이다. 제주도만 한 크기의 섬에서의 봉기란, 군사전략적으로 자살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적 차원에서 모든 비정규전의 무장투쟁은 밀림과 산맥을 낀 내륙, 그것도 산악지대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 제주시민회관에서 열린 4․3 41주기 추모식에서 무혼굿을 올리는 고 정공철 심방이 혼 부르는 장면. 애초에 제주의 큰심방인 안사인 심방이 맡기로 했던 굿판이었다. 그러나 굿을 앞두고 안 심방은 종적을 감추었고, 결국, 마당극 배우였던 정공철 학생이 굿을 했는데, 너무 많은 이들이 그의 굿공연을 실제 굿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 굿공연으로 인연이 되어 결국 큰심방이 되는 큰굿 초신질을 발뢌으나, 안타깝게도 2013년에 타계했다.

그러므로 제주4․3의 봉기는 우익들이 공세적으로 쓰는 ‘제주섬의 공산화’를 위한 봉기가 아니다. 이 코딱지만 한 섬에 무슨 붉은 공화국이 가능했겠는가? 조금이라도 세심한 눈치가 있는 양반들이라면 금세 깨달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녕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분명 그렇게 얘기해야 할 필연적인 목적의식이 있거나, 죽음으로 종결될 수밖에 없는 개인적 원한이 맺힌 경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4․3은 더 이상 밀릴 수 없는 생존을 위한 본때를 보인 것이다. 이 역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현기영 선생의 표현대로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의 코를 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당위의 절실함은 삭제되고, 이념의 희생물로 내던져졌다.

4․3 당시 제주지구 미군사령관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다만,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는 언설을 공공연하고 뻔뻔하게 내뱉었다.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니? 제주도민들의 봉기는 바로 원인 때문에 시작된 것인데, 그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학살과 토벌은 준비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즉, 당시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 때 독립군을 때려잡던 친일경찰들을 단지 점령지의 관리를 위한 편리성에 기대어 재기용해 도민을 분노하게 한 미군정의 책임도, 1946년의 대흉년에 따른 기아와 미군정의 쌀 공출과 호열자로 날이 새면 집집마다 사람이 죽어 나가던 흉흉해진 제주도의 상황도, 미군정 경찰의 기마대에 짓이겨진 도민들의 육신도 그들에게는 다 흥미가 없는 것이었다.

다만, 그들은 이 사태를 이유 불문하고 진압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섬은 그들이 바라던 대로 철저하게 진압되었다. 섬 주민의 10분의 1은 육신과 기억마저 그렇게 섬에서 삭제되었다. 그리고 그 진압과정에서 지옥도를 재현했던 광기는 근 40년간 섬을 짓누르는 지독한 공포가 되었다. 저항의 기억은 일소되었다. 하지만, 현해탄이라는 물의 경계가 열도의 땅에 4․3의 유전자를, 그 기억의 원종자를 보관하게 해준 역사의 수장고를 만들어 준 것이다.

현기영 선생과 김석범 선생은 애초에 서로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그러니까 4․3의 삭제된 기억은 반도와 열도에서 각각 부활하고 있던 셈이다. 하긴 30,000의 묻힌 내력이 그리 쉽게 잊힐까? 그 첫 울음소리가 열도에서는 《까마귀의 죽음》이었으며, 반도에서는 《순이삼촌》이었다. 그 시절 4․3의 화산도는 아직 적막했다. 새벽의 여명이 시작되기 전의 적막 말이다. 그러므로 그 여명 이후의 모든 4․3은 다 이 두 대작가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두 분이 역사의 부채의식 때문에 그들의 모진 글쓰기를 시작했던 것처럼, 아니 평생을 4․3전상으로 살아야 했던 것처럼, 모든 4․3의 진상규명과 유족들의 명예회복은 고스란히 이분들의 수고로움의 신세를 진 것임을 유족들과 제주도민들은 잊어선 안 되리라.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단 한 가지, 인류가 그것을 잊는 것이다”

▲ 필자는 이 사진이 제일 재미있다. 꼿꼿한 미수의 김석범 선생과 아직은 낭만과 객기가 남아있는 듯 훨씬 어려(?) 보이는 현기영 선생의 부조화의 조화랄까? 현 선생은 한국에서는 원로에 속하는데 여기서는 반은 디스카운트된다. 진기한 풍경이다.

강력한 트라우마, 즉 육화된 공포의 체험은 인간의 입을 얼어붙게 한다. 목젖은 말을 가두는 창살이 되고, 말은 소리를 잃는다. 최초의 체험자들은 그 처참한 내력을 말하지 못했다. 성인이 되어 4․3을 겪고 살아남은 분들 중에서, 정면으로 4․3을 응시하는 분들이 드문 것은 그 이유다.

슬픔이란 대체로 눈물로 한숨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말과 글로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4․3의 슬픔은 눈물로도 필설로도 다 할 수 없다. 그 사태를 겪은 사람들은 덜 서러워야 눈물이 나온다고 말한다.(현기영, <목마른 신들>)

슬픔이 너무 깊고 한이 너무 서리면, 침잠된 기억은 결코 원상을 회복하지 못한다. 그나마 말문을 어렵게 여는 이들도 대부분 유년기의 체험자들인 경우가 태반이다. 진정 생애를 관통하는 지옥도를 본 사람에게는 그것을 떠올리는 것조차 생생한 현재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역사의 진실은 우회로를 찾는다. 4․3을 진정 호되게 치른 자들이 그 생생한 진실과 진상을 말하지 못하기에, 그 후대들이 이 일을 해내게 하는 것이다.

마치 어떤 우주적 원리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죽은 자들과 말을 뱉지 못하는 체험자들이 남긴 4․3의 목소리는 결국, 타자 또는 미체험자들에 의해 그려진다. 그리고 그 불분명한 남의 체험을 자기화시킨 불완전한 진실이, 예술적 상상력에 의해 조합되면서 퍼즐 같던 역사는 서서히 부활한다. 살아 있는 역사를 무덤이나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은 역사학이지만, 묻혀 있는 역사를 오늘에 끌어내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문학이며 예술이다. 김석범, 현기영, 강요배가 다 그러하다. 필자를 포함하여 이들의 공통점은 예술가라는 점과 직계 중에 4․3의 직접적 피해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화해와 상생, 아직도 구천으로 떠나지 못하고 곱 가르는 4․3의 기억투쟁.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유대인들의 경구를 떠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4․3에는 아직 용서가 안 되는 일이 흔하며, 벌써 잊자는 사람들도 있다. 과거의 어둠에 사로잡히지 말고 미래로 나가자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과거의 어둠을 그 자체로 빛으로 만드는 일이 진정한 4․3 기억의 부활의 길이요, 기억의 타살이라는 트라우마를 넘어서는 길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선, 여전히 우리는 좀 더 이 길을 가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기영 선생이 대담 중에 한 이야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4·3이 국가추념일로 지정되면서 마치 4·3의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4·3이 어둠 밖으로 제 몸을 드러내자 갑자기 그 빛을 잃어가는 느낌입니다. 끊임없이 4·3을 재 기억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재기억이란 지워졌던 역사적 기억을 되살려 끊임없이 되새기는 일, 대를 이어 미체험 세대가 그 기억을 계승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하나 문제는 4·3의 역사적 기억의 일부만 용납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양민 피해자의 기억은 어느 정도 허용되고 있지만, 항쟁 패배자의 기억은 철저히 부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면, 이제 그들을 감싸 안는 아량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패배자의 기억 또한 회복시켜야 합니다.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투쟁, 그래서 지금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다음과 같은 경구가 쓰여 있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단 한 가지, 인류가 그것을 잊는 것이다.” 불행한 과거를 망각하는 자는 개인이든 사회이든 간에 그 과거를 다시 반복할 운명이 된다는 말이죠. 

▲ 80년대 제주의 대표적인 민중가수였던 김성현 씨. 그의 아름다운 미성을 오랜만에 들을 기회였다. 그는 이날 그의 18번인 동요 ‘화전놀이’와 4․3의 상징곡인 ‘잠들지 않는 남도’, 두 곡을 불렀다. ‘잠들지 않는 남도’는 김석범 선생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 모두의 눈가가 축축해져 있었다.

마치며

김석범과 현기영이라는 4․3의 큰 심방들과 짧았지만, 함께할 수 있던 건 다시없을 행운이었다. 2박 3일 간의 이 여행기를 정리하는 일은, 그동안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믿음이 근거 없었다는 것을, 두 분의 문학세계나 개인사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일이었다.

사실 공기처럼 물처럼 세상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큰 자원들의 소중함을 우리는 평소엔 잘 모른다. 너무 가까이 있고 너무 흔해서. 4․3과 관련해서는 김석범 선생과 현기영 선생이 그러하다. 4․3작가로서 너무 유명하기에, 4․3작가를 꼽으라면 “아! 제주출신 현기영!”, “아! 일본의 그 유명한 김석범!”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부러 두 작가의 삶의 궤적을 간략하게 나마 정리해 넣은 것은 4․3유족들이나 제주도민들 대부분이 이름자 빼고는 두 작가의 인생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식의 낯익음이 사실은 그분들이 수없이 많은 밤을 하얗게 새우면서 벼린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직조하는 수고로움을, 영혼의 언어를 다루는 기술자들인 작가로서의 디테일한 고통을 가늠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재일조선인이 식민지 지배자의 언어로 문학을 한다는 것, 이를 생각하면 견디기 어려운 일”, “일본어로 쓰되 조선인의 일본어로 쓰는 것”이라는 경지를 얻기 위해 분투했던 김석범 선생의 고백을 아프게 곱씹는다.

<마지막 테우리>에서 묘사한 “서릿발같이 눈부신 흰 테를 두른 검은 구름이 시야를 가득 채우며 달려왔다. 초원을 쓸며 오는 꼬리 부분에 희끗거리는 눈송이떼가 뚜렷이 보였다. 눈이 내리기 전에 강풍에 날린 억새꽃들이 눈처럼 하얗게 날아올랐다. 마른 잎, 검불들도 휙휙 날아올랐다.

공중을 날던 까마귀들이 바람에 휩쓸려 까마득히 멀어져갔다. 바람은 쉿쉿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무수한 뱀떼처럼 우물쭈물 풀밭을 휘저으며 무섭게 내달렸다.”라는, 제주섬을 휩쓰는 폭풍 전야의 초원의 풍경을 현기영 선생이 아닌 누구의 글을 통해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그 수고로움들이 고맙고 새삼스럽다. 이제 시간을 내어 다시 꼼꼼히 읽어 볼 요량이다.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