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의 제주신화 이야기] (79) 문전신화와 노일저대구일의딸

** 이번 글부터는 제주의 문전신화 속에 등장하는 ‘노일저대구일의 딸’에 대한 글입니다. 신화 속에 나타나는 노일저대구일의 딸이라는 여신의 원형을 살피고, 현실에서 이 여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노일저대 유형의 여성들에 대한 글들이 이어집니다.

** 말씀드렸듯 고대 신화학에서 신화 속 이름들은 속성을 나타낸다고 하는 연구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노일저대구일의 딸이 보여주는 것들을 ‘어떤 조건과 속성들’로 생각하고, ‘노일저대구일의딸’로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쓰겠습니다.

노일저대구일의딸 원형1. 신화는 사회의 산물

노일저대구일의딸이 등장하는 <문전신화>는 인간이 몸담고 살고 있는 집의 곳곳을 지키는 신의 이야기로, 집안의 안전과 평화가 지속될 수 있기를 소망했던 신화다.

노일저대구일의딸은 <차사신화>의 과양생이처와 함께 제주신화에 나오는 많지 않은 악신 중의 하나이며 간악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남선비의 첩이 된 그녀는 본처인 여산부인을 주천강 연내못에 등을 밀어 빠져 죽게 하고 남선비의 아들 일곱 형제까지 죽이려다가 막내아들 녹디생이의 지혜로 오히려 죽임을 당한 뒤 변소의 신인 칙도부인이 된다.

우리 제주에서는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간악한 여자에게 실제로 ‘노일저대 같은 년‘이라고 욕을 했었다.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에게 바짝바짝 대들면서 말도 안 되는 떼나 쓰고,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앞으로 봤다 뒤로 봤다 거울이나 보면서 뽄(폼)이나 내고 있을 때면, 어머니께서는 정말 꼴 보기도 싫었던지 휙 다른 데로 가시면서 ’아이고 저 노일저대 같은 년‘이라 중얼거렸던 걸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 ‘노일저대’인데, 하물며 그녀의 ‘딸’이라니 얼마나 더 간악하고 요망스럽겠는가?

한편 ‘남선비같이 마음만 좋은 사람’이라는 말도 있다. 마음만 좋아서 대책 없이 당하기만 하는 사람을 볼 때 하는 말이다. 사실은 이기적인데다 순간적인 재미와 탐욕에만 눈이 어두워 사리분별을 할 수 없었던 남선비인데도, 남자니 설렁설렁 반쯤은 봐주고 지나가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나 현실이나 남성중심적인 우리사회의 문화는 어김없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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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구부녀이야기. The Lady with Nine Husbands. 신혜진. 애니메이션. 2009.)
2011년 제주여성영화제에 상영되었던 영화다. 할머니가 옛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옛 이야기 속의 여자는 자신의 집에 들어온 여덟 명의 남자를 차례로 잡아먹는다. 아홉 번째 남자와는 아기도 낳았지만 그마저도 잡아 먹어버린다. 할머니는 이 여자를 아주 나쁜 년이라 욕한다.

그리스신화에서는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나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열두 으뜸 신으로 꼽힐 때는, 가정과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는 빠진다고 한다. 아프로디테(사랑)나 디오니소스(술)을 선택하면, 헤스티아(가정의 따스함)는 제외되었다. 사랑, 육욕, 술과 같은 본능적인 것들을 선택한다는 것은 가정의 따스함, 배려나 인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라 할까.  

반면 우리 제주신화에서는 본부인 여산부인은 조왕신이 되고 첩은 변소의 신이 되어, 본부인과 첩을 한 공간 안에 같이 둔다. 다만 멀리 두고, ‘부엌엣 것 칙간에 안 가져가고 칙간 것 부엌으로 안 가져 오면’, 된다.
삼시 세끼 따슨 밥을 위해서 부엌에는 아내가, 변화무쌍하고 즐거운 삶을 위해서 첩은 변소에 좌정되어 있는 이 부분 역시 다분히 남성중심적인 문화의 코드를 읽을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안정이나 따뜻함에 대한 요구와 열정적인 사랑과 육욕의 본능이란 것은 둘 모두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고 이 둘을 한 영역 안에 두는 제주신화가 오히려 더 인간철학적이라 볼 수도 있다. 가정이나 인간을 음양과 오행, 선과 악, 본능과 이성이 예외 없이 공존하는 하나의 소우주로 생각했던 제주신화의 철학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제주신화의 곳곳에서 묻어나오는 공동체적인 기능과 양성평등의 코드를 이 신화에서는 찾기 어렵다.
가내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남편의 방탕함이라 하는 것이 더 옳을 텐데도 우리 문화는 첩을 몇 안 되는 악신으로 설정하고 가내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의 대표로 삼고 있으며, 남편의 욕망을 위해서만 필요한 이 여성을 인간 가족의 삶에 꼭 없어서는 안 되는 변소의 신으로 좌정시키고 있는 것이다. 분명 남편의 불륜, 육욕이란 것은 분명 가정을 파탄나게 하는 것인데도, 주부들의 고단한 잔손질로 넓어진 거실처럼 그 영역은 환하고 버젓하게 넓어졌다.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지만 신화 속에 나타난 이런 차이를 통하여 인간의 본능과 의지의 문제에 있어 서구와는 다소 다른 우리의 문화를 비교해 볼 수 있기도 하다.
이미 말했듯 그리스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나 디오니소스를 선택하면 헤스티아는 버려야 한다. 이성중심의 오랜 역사와 철학이 있어서 그런지 질투, 사랑, 복수 등 인간 본능과 감정을 극대화하고 이를 추상화시킨 그리스신화에서조차도 그들의 선택은 이성적 인간의 선택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 문화의 경우 남자에게 불륜과 가정은, 그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영역이 아니라 서로 다르게 존재하는 영역이었다. 가정은 아내에게 맡겨두고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거나 술독에 빠져 살았다 해서 그것이 가정파탄의 결정적 원인이 되지는 않았던 게 일반적이었다.
가정과 아내는 이미 남자의 일부에 속해 있는 것이지, 이해하고 배려해야 하는 대상, 자신을 덜어내거나 바꾸는 수고를 감당해야 하는 의미심장한 타자가 아니었다. 여자들의 불륜은 용서될 수 없었지만, 남자들은 불륜의 사랑을 나누다가 문제가 되면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머리 몇 번 긁적이며 돌아오면 그만인 것이었다. 여자들은 상처를 받으면서도 혼자 힘들게 아이들을 기르고 어떤 일이 있어도 참고 제자리를 지켰으며 그렇게 조강지처가 되었다.

가정도 지키고 싶고 다른 여자도 취하고 싶은 것. 둘 모두 진심일 수 있다. 진심의 욕심 말이다. 인간이니 이해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부인도 사랑하고 다른 여자도 사랑한다면 어떤 게 진실일까? 물론 여기서도 사랑과 가정 둘 모두 진실일 수는 있는 것도 같다. 다만 두 개의 진실이 양립되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경우, 힘들지만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이 진정 진실이 아닐까 한다. 그립고도 그리운 마음을 접고 가정으로 돌아가든가 그 믿음직스러웠던 가정을 잘 깨는 것. 그렇게 피눈물 나는 것이 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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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스틸 출처/ 다음 이미지)
인간의 본능을 욕망하는 것과 인간적 도리를 다잡는 것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우리는 롤리타를 각자 다르게 읽을 것이다.

둘을 놓고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때, 또는 시비의 판단을 내릴 때 우리의 경우는 둘 다 그럴 수 있다고 또는 둘 모두의 잘못이라고, 부드럽고 지혜로운 중립의 자세를 내세우며 호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쩌면 이런 의식들이 바탕이 되어 우리는 잔혹한 살상의 전범들마저 용서하고 말았던 것인지 모른다.

진실이라는 것은 사물과 인간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것인데도 우리에게 진실은 이미 고착화되어 어른들의 말씀으로 전래되어 오기조차 한다. 부모와 자식은 종속과 효도라는 고정적인 관계로 정해져 있다. 한번 맺은 결혼은 결코 깰 수 없으며 사랑의 여부와 관계없이 가족은 유지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자식, 아내, 며느리. 시어머니와 같은 새로운 관계들이 생겼다면 그만큼 뭔가 보태지거나 빼내야 할텐데 ‘남자가 부엌에 들어서는 거 아니다’, 시어머니는 말하며 아들은 가만히 있다. 관계는 새로 구성되어졌는데 아무것도 새로운 관계에 맞추어 달라지지 않는다. 

모든 감정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고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된다.
나 혼자만 살아가는 게 아니라면, 나의 탐욕과 이기는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슬픔과 체념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나의 감정과 욕망 역시도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판단으로 선택되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

개인의 욕망은 말할 필요 없이 소중하다.
사랑이나 술이라는 건 인간 개체에게 재미있고 즐겁게 살아가는 계기임에 틀림없다. 다만 문제인 것은 그 계기가 남자에게만 주어진다는 것, 남선비 혼자 즐겁고 노일저대구일의딸이나 여산부인은 서로 머리채나 붙잡고 싸우며 자기부정과 환멸에 빠진다는 점이다. 많이 보아온 풍경이다. / (김정숙/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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