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 꽃을 피우다] (4) 현빈의 영화 '역린'과 제주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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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윤애의 무덤이 있던 전농로 거리. 봄이 오면 이 거리에 여인의 향기를 품은 화사한 꽃이 피어난다. ⓒ장태욱

애초에 연재의 타이틀을 ‘유배, 꽃을 피우다’로 정하고 나서, 봄이 오기만 기다렸다. 봄꽃이 화사하게 핀 유배지 절경을 독자들과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꽃잎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어린 생명들이 허무하게 져 버렸다.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대지에 잠든 뿌리를 깨우는 아픈 봄비, 그래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던 엘리엇의 시가 가슴에 사무치는 4월이었다. 한 달 넘게 글을 쓰지 못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지난 4월 30일 개봉한 '역린'은 개봉 첫날 2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2014년 개봉 영화 가운데 최고의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했다. 그리고 몇 주간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더니 400만 관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영화는 정조 즉위 1년(1777년)에 왕을 암살하기 위해 궁궐에 자객이 들었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인기배우 현빈이 정조 이산을 연기한 것이 알려지면서 영화는 개봉 전부터 많은 화제를 관심을 불러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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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역린'의 포스터.

영화 '역린'의 배경, 정조 암살 사건

사도세자의 죽음에 공모했던 노론에게 이산 정조의 등극이란 재앙이었다. 정조가 세손이었던 시절부터 노론은 틈만 나면 그를 죽일 계략을 꾸몄다. 훗날 정조는 “나는 옷띠도 끄르지 못하고 밤을 지낸 날만 해도 몇 달이었는지 모른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불안한 시간을 견딘 세손이 드디어 왕이 되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배후에서 조종했던 홍씨 집안은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급기야 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실행에 옮긴 자는 홍계희(사도세자 암살의 공모자)의 손자인 홍상범이었다. 홍상범은 궁중 사람들도 두루 포섭했는데, 거기에는 정조의 경호 장교 강용휘, 내시 계동과 안국래, 궁녀 월혜 등이 포함되었다.

홍상범은 1777년 7월 28일에 정조를 암살하기 위해 강용휘·전흥문을 궁궐로 침투시켰지만 암살을 실행에 옮기기 직전에 발각되어 두 사람은 자리를 떠야 했다. 그리고 10여일 후에 이들을 재차 궁궐에 침투시키려 했지만 담장을 넘지도 못하고 발각되고 말았다.

이후 피비린내 나는 공초가 이어졌고 왕을 암살하려 모의했던 자들의 전모가 양파껍질처럼 벗겨졌다. 강용희와 전흥문은 물론이고 사건을 배후에서 모의했던 홍상범 홍상길 등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홍상범 등이 새롭게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정조의 이복동생 은전군 이찬도 사사되었다.

조정철도 암살 계획에 연류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모진 공초를 받았다. 그의 혐의는 홍상길(홍상범의 사촌)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홍상범의 여종이 조정철의 집에 드나들며 조정철의 부인 홍씨와 만났다는 단서가 나왔기 때문이다. 부인 남양 홍씨는 자신이 멸문지화를 자초했다는 자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8개월 된 아들을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피비린내 나는 공초, 벗을 수 없던 혐의

조정철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지만 그를 경계하던 홍국영 세력으로 인해 혐의를 벗을 수 없었다. 그는 제주로 유배되었고, 그의 형 조원철도 사건과 연류되어 기장으로 유배되었다. 당시 이 사건에 연류된 무리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치 못했지만, 충신의 가문에 대한 정조의 배려로 조씨 형제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조정철은 화북포구를 통해 제주에 들어온 후 제주사람인 신호의 집에서 적거했는데, 유배 시작부터 시련이 이어졌다. 조정철은 "새로온 목사 김영수가 책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은 볼 수 없게 되었다"며 한탄했다. 유배인이 보수주인과 친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적소를 세 차례나 옮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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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철은 화북포구를 통해 제주에 들어왔다. ⓒ장태욱

관아에서는 점고를 빌미로 그에게 ‘머리를 땅에 쳐박고 꽁무니를 하늘로 쳐들게’하는 수모를 주기도 했다. 사대부로서의 자존심과 체통을 잃고 괴로운 나날을 문장으로 위로하며 보냈다.

그런데 오랜 유배생활 중 깊은 상실과 고독에 빠져 있던 조정철에게 예기치 않던 사랑이 찾아왔다. 상대는 향리 홍처훈의 딸 홍윤애였는데, 어릴 적에 기적에 올랐다가 면천된 여인이었다. 제주에 유배되는 와중에 상처(喪妻)의 고통까지 짊어져야 했던 조정철은 홍윤애와의 사랑으로 수렁에 빠진 하루하루를 지탱할 수 있었다. 홍윤애는 종종 조정철의 적소를 출입하며 빨래와 청소를 거들다가, 급기야 조정철의 딸을 낳게 되었다. 조정철이 남긴 시다.

무수히 피었던 복숭아 꽃나무

비온 후 잎이 무성하네.

속세의 소식 끊기고

무릉에 봄이 돌아온 듯…

꽃처럼 피다만 사랑..

홍윤애와의 사랑은 조정철로 하여금 서울을 속세로, 유배지인 제주는 무릉으로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정철의 가문과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이들의 사랑은 비극적인 파국을 맞았다.

김시구 목사는 판관 황인채와 함께 홍윤애가 조정철의 적거에 출입하는 것을 빌미로 홍윤애를 문초하였다. 그녀한테서 조정철에게 불리한 진술을 받아내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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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윤애가 문초를 당하다 생을 마감한 제주목관아. 옛 일을 기억이나 하는지, 무심한 꽃은 어김없이 피었다 진다. ⓒ장태욱

당시 상황을 조정철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목사 김시구는 출신이 흉악한 남인의 한 사람이다. 배에서 내린 날부터 이미 나를 죽이려는 뜻을 가지고 … (홍윤애를) 강제로 불러다가 나의 적거에 출입한 죄로 특별히 만든 서까래와 같은 매로 70을 헤아리게 때리기에 이르니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찢어져 죽었다. 정조5년, (1781) 윤 5월 15일이다. -'헌영해처감록' 중-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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