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쟁 코리아 100일 순례 마친 도법 스님

"이 땅에서 진실을 묻는 것은 금기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밀양 송전탑, 쌍용자동차, 강정 마을…. 도법스님은 그동안 사회 도처의 '문제적 현장'을 누벼왔다. 그는 어떤 갈등 현장이든 사람들이 둘로 나뉘어 있다고 했다.

"어딜 가도 찬성과 반대, 이쪽 아니면 저쪽이에요. 결국은 어떤 문제든 목소리 크고 힘센 쪽이 아닌 쪽을 끌고 갑니다. 그러면 다시 진 쪽에선 힘을 기르고 그렇게 다시 대결하면서 소모적인 분열이 반복돼왔습니다. 또 다른 길을 찾아볼 수조차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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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법스님(왼쪽)과 박인규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 이사장. ⓒ프레시안(손문상)

걸어서 1000km… 좌우 대립의 현장에 피어난 '화쟁' 정신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화쟁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난 도법스님은 취재진에 시원한 차부터 권했다. 그도 차 한 잔을 음미하고 숨을 고른 다음 말했다. 이날 나눈 얘기는 그렇게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천천히 곱씹어봐야 하는 내용이었다. '본질'에 관한 얘기였으므로.

도법스님이 보기에 대한민국은 상처투성이 국가다.

"나라 곳곳에 온통 반목과 불신이 자리 잡고 있어요. 해방 이후부터 상처와 응어리들이 풀리거나 치유되지 않고 그냥 쌓여 있습니다. 진실을 보지 않은 채 오직 상대를 부정하는 식으로만 문제를 풀어왔으니까요."

진실을 바로 보는 눈을 가리고 반목의 악순환을 만든 원흉은 '진영 논리'다. 한쪽에선 이 사회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친일파', 또 한쪽에선 '종북 세력'의 문제라고 말한다. 진영 논리가 이처럼 공고한 이상, 이 사회에선 어떤 진실도 억압·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게 도법스님의 문제의식이다.

그는 길 위로 발을 내디뎠다. 화해를 위한 걸음이었다. 지난 3월 2일 제주 한라산 백록담에서 첫걸음을 뗀 후 지난 10일까지 그를 주축으로 한 순례단은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다. 독립운동의 현장, 동족상잔의 현장, 민주화의 현장, 산업화 현장을 돌았다. 좌우 대립 희생자를 위한 합동 위령제를 봉행하고, 국민통합 문화제도 개최했다. 순례단이 도보로 움직인 거리만 1000km에 달한다.

순례길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04년부터 '생명평화탁발순례'를 했다. 생명과 평화를 주제로 한다는 점에서 내용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생명평화탁발순례가 '가치'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순례는 좀 더 구체적인 방법론을 고민해보자는 취지가 강했다.

도법스님은 뿌리 깊은 갈등을 해소할 방법의 실마리를 불교 사상에서 찾았다. 바로 '화쟁'이다. '다툼을 화해시킨다'는 뜻으로, 신라 원효대사가 전파한 사상이다.그는 원효의 화쟁 사상을 설명하는 정신으로 '개시개비(皆是皆非)'를 꼽는다. 개시개비란, 다 옳기도 하고 다 그르기도 하다는 뜻이다. 즉, 어떤 입장도 전적으로 옳거나 전적으로 그른 것은 아니며, 각 주장이 부분적으로 맞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깨달음의 경지다.

"경상도에서는 '박정희 제일', 전라도에서는 '김대중 제일'입니다. 그러나 박정희와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평가할 때, 각각 산업화와 민주화의 측면에서 공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박정희의 모든 업적이 온전히 공은 아닙니다. 김대중도 마찬가집니다. '저 놈도 다 나쁘진 않구나'라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개시개비입니다. 결국 제 목표는 이런 태도 속에서 '수구 꼴통', '종북 빨갱이'같은 극단적인 언어가 사라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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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법스님. ⓒ프레시안(손문상)
"세월호 참사, 대통령 탓만 해서 해결될 일 아냐"

화쟁, 즉 다툼을 해소하기 위해 무조건 자신의 입장을 굽혀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진실을 드러내고 본질을 찾아야 한다. "외양간을 고치려면 제대로 고치자"는 것이다. 그는 좌우 대립의 문제를 '민족의 눈'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친일(親日)도 반일(反日)도 사실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했기 때문에 생긴 것들이었습니다. 원죄는 식민지로 전락한 상황인 셈이죠. 그렇다면 우린 민족에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친일한 사람도 민족 구성원이었습니다. 민족의 눈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고 풀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어차피 같이 살 사람들이 아닙니까. 문제를 좀 더 본질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그는 세월호 참사 또한 좀 더 근본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풀어야 한다고 했다.

"세월호에 탄 사람들이 다 내 가족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유가족 입장에서는 선장이, 해경이 내 가족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청와대 입장에서도 배에 탄 사람들이 내 딸이고 내 남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건 문명사적인 문제입니다. 따져보면 이 사태가 오기까지 신자유주의 문제, 자본주의 문제가 다 걸려 있다고 봐야 합니다. 생명과 공동체의 가치를 투철하게 짚어야 할 때입니다. 모든 책임이 대통령에게만 있는 건 아닙니다. 전국민적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때입니다. 적어도 이번만큼이라도 과거를 답습하는 않는 방식으로, 범국민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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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손문상)

세월호 선장과 해경을 이해하고, 친일 행적 과거가 있는 이들을 포용하자는 주장. 거칠게 말하면 '가해자도 포용해야 한다'는 태도는 많은 이들의 반감을 일으키는 게 사실이다.

그는 지난 4월 순천에서 열린 합동위령제에서 만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이가 80세가 다 된 유가족이 저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시더군요. '내 부모를 죽인 사람들 충원탑에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길 와 보니 가슴에 엉켜있던 게 녹는 것 같다, 고맙다'고 했습니다. 복수하는 게 자식 된 도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부모님도 잘했다고 생각할 거라며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피해자가 가해자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치유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모든 '화쟁'을 피해자의 선의에 맡길 수 없는 일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찾는 일이다. 일방의 주장만으로 진실은 세워지지 않는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함께 진실을 그려 나가야 한다. 도법스님은 이 점에서 인종 갈등 해소를 위해 '진실과 화해위원회(TRC)'를 만들고 가해자 증언을 다수 이끌어낸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만델라를 다룬 영화를 봤는데, '진실을 드러내면 우린 죽는다'라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만델라는 백인들에게 진실을 드러내도 피해를 받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데 성공했습니다. 만델라도 대통령이 돼서 한 일인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왜 우린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도법스님은 진실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일단 만나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순례 중 틈틈이 '좌우'를 대표하는 이들을 만나 화쟁의 길에 함께할 것을 권유했다.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 홍사덕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대표, 변용식 조선일보 발행인, 정영무 한겨레 대표이사, 송영승 경향신문 대표이사, 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 등을 만났다.

다들 도법스님의 뜻에 수긍하는 눈치였지만 실천으로 이어지기까진 쉽지 않았다. 특히 보수, 우파 쪽은 더욱 어려웠다. 한국자유총연맹 쪽에 좌우 합동위령제 참석을 권유했지만, 김명환 총재는 결국 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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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법스님. ⓒ프레시안(손문상)
순례를 마친 도법스님은 앞으로 1000일 동안, 진실을 밝히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 마련을 위해 '대한민국 야단법석'을 추진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 더 많은 양측 당사자들을 한자리에 모이게끔 설득 작업에 나설 예정이다.

"불교와 직접 이해관계 없는 사회적 의제를 갖고 뭔가를 하는 건 역대 종단에서 처음입니다. 역량이 부족하지만 이미 선언을 했으니, 차근차근 세월호 참사부터 '화쟁'으로 해결해 나가야죠."

*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의 업무 협약에 따라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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