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의 제주신화 이야기] (82) 노일저대구일의딸 원형 4

뻔한 아줌마.

‘아줌마’, ‘아줌마 부대’는 노일저대 원형이 가장 대중적으로 발현되면서 희화화되어 가는 경우다. 당당함의 의미를 일부 가졌던 ‘아줌마’는 지금은 방정맞고 뻔뻔하다는 기의를 가진 단어가 된 듯하다.

‘나는 나이고, 세계의 중심‘이라 외치는 새로운 세대와 그 성향의 일부가 시간이 지나 노일저대 아줌마가 되었다.
’종잡을 수 없이 자기 멋대로‘인 채 세상의 대세가 되지 못했던 새로운 세대의 성향은 시간이 지나자 비로소 대세가 되었다. ‘지만 알고 지 멋대로 군다’는 비난과 꾸지람에 늘 노출되어 있다가 시간이 지나 쓸데없는 잡담이나 늘어놓고 자기 가족만 아는, 이기적이고 뻔뻔한 아줌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인데, 그게 대세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부분 역시 우리의 ’질서‘라는 것이 각각의 개성, 정체성을 찾아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정체성만을 가지도록 요구하는 질서라는 생각을 거듭 들게 한다.
우리 사회는 그녀가 그녀 자신을 죽이면서 가족들을 위해 밥을 짓고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고 아파트 평수를 늘려가는 데만 재능을 가지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그 대세를 거스르는 생각, 행동들을 가차 없이 처단해왔던 것 아닐까. 새로운 세대의 개성을 일탈이라 비판하고 기성세대들의 재능을 관례로 옭죄면서 유지하고 강고히 하는 지배적 질서 말이다. 

백마 탄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기를 꿈꿨던 일부 노일저대의 공주병은 나이가 들면서 그나마 한두 개의, 나름의 장점도 유지하지를 못하고 너무나 매력 없는 모습으로 진화되어 버렸다. 예쁜 얼굴과 날씬한 몸매가 사라졌고 동시에 철없고 뜬금없을 지라도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이 나을 것인, 그녀들의 욕망, 도도함, 발칙함도 같이 사라졌다.
그렇지 않았던 나머지 노일저대들도 시간이 지나자 똑같아졌다.
돈이나 학력 등이 삶의 조건이 되는 사회로 전체주의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가치들, 돈, 명예, 지위는 한정되어 있고 그런 것을 취하지 못한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아이들에게 투영시켜 죽어라 다그쳐 좋은 대학에 보내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일에 혈안이 되면서 그녀들은 너도나도 똑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으로 살고, 계급적인 차이, 학력의 차이, 지역적인 차이, 직업의 차이, 사회에 대한 인식방법과 철학의 차이까지도 뛰어 넘어 너나 할 것 없이 무색무취해졌다.

어느 순간 그녀들은 강력한 긍정의 힘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별다른 기회가 없었던 우리 사회에서, 아줌마들의 적극성 타인과의 경쟁심 꼭 해내고 말려는 욕망에의 집착 서너가지를 동시에 진행하는 다면성 최고를 향한 집중성 그리고 이를 위한 삭막할 정도의 노력들은 따로 떼어놓고 보면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처음 아줌마들은 당당했다.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니 자신의 개성과 스타일이 없어져도 그녀들은 당당했다. 교양을 엮어가고 재미있게 삶을 즐길 수 있는 취미의 기회도 없는 사회와 가정의 공간에서 그녀들은 분홍색 비닐을 허리에 두르고 허리살고 빼고 남의 말도 하며 깔깔거리는 사우나 문화에 빠지면서도 시원호탕했다. 코 아래, 턱이며 목까지 감싸는 마스크로 얼굴 반 이상을 가리고 썬글라스에 스카프와 모자까지 써서 나머지 반도 가려 콧구멍만 겨우 나오게 하곤 엉덩이를 쭉 빼고 팔을 수직으로 힘차게 흔들면서 활기차고 빈틈없이 살아갔다. ‘너희들도 이렇게 따라해~’, 고어텍스의 아웃도어와 기능성 신발을 기필코 갖춰 신고 온 동네 산도 들도 가득 채웠다.

사회가 복잡해진 만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사회는 세분화되건만 어렸을 적 그 예민함도, 발칙함도, 도도함도 모두 반납해버리고 그녀들은 그렇게 똑같은 하나가 되어 갔다. 스쿨버스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 층층이 쌓은 도시락을 건네려고 치맛자락 휘날리며 인도건, 차도건 거침없이 뛰어 들어오는 아줌마. 버스에 올라 서있는 사람들의 몸을 이리저리 밀치며 자리에 앉고, 가방을 던져 남편의 자리까지 기어코 차지해내는 아줌마. 일주일 전에 한 봉지 사 간 사과를 이미 두 개나 먹어 놓고 오늘에야 와서 썩은 사과를 팔았다고 돈도 돌려받고, 심지어 위로 상품까지 받아내는 진상아줌마. 아줌마. 줌마. 뻔한 아줌마.

뻔한 아줌마는 뻔한 사회를 표상한다. 

아줌마는 <메타 신체>다. 우리 사회의 성격을 읽을 수 있게 하는 징표다. 아줌마들의 것으로 인식되는 사회적 일반적 속성들이 어떻게, 왜 가능했고, 사회가 지금까지 가지지 못한 것은 또는 가져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뻔한 노일저대 아줌마 원형은 돈과 학력과 다이어트로 치졸한 갑의 사회를 즐기는 뻔한 사회와 시대의 아이덴티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상이다. 그녀를 통해 우리는 세상의 많은 다양함들을 빨아들이고 복무케 하는 사회의 지배적 질서가, 서로를 탓하며 상처를 덧나게 하는 수준 이상의 훨씬 심각한 슬픔을 곳곳에서 새어나오게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 역동적인 아줌마들을 뻔한 하나의 모습으로 만들어버리는 우리 사회의 기류는 비단 아줌마들에게만이 아니라 책상위에 널브러진 고등학생, 범생이, 담탱이, 된장녀, 휠체어 타고 나오는 재벌, 지식인, 연예인, 언론인, 인간 부류들 모두에서 숨겨야 할 정도로 천박함과 뒤엉켜 쩔어 있다. 어디 뻔하지 않은 게 있기나 한가.  

현실을 버린다고 미래가 창연한 것도 아닌 지금, 그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현실을 송두리째 버리고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려 밤낮없이 뛰어다니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그녀들의 재능이 힘일 수도, 매력일 수도 없다. 그런 재능은 기존의 사회에 잘 스며들고 있는, 잘 유지시키는, 뻔한 것이지 사회를 구성해내는 새로운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야 아직 결혼 전이고 쭉쭉빵빵 권력도 있었고 예쁜 얼굴도 있었고 숨은 영역에서 뛰어난 전문 캐리어의 매력도 보여주었었지만, 대학입시에 성공한 아이들이나 넓어진 아파트가 그녀들의 매력일리도 없지 않은가.

노일저대의 톡톡 튀는 젊음이, 그것도 자율적으로 똑같은 모습의, 뻔한 노일저대 아줌마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감각이나 인간에 대한 갈망이 사라진 사회, 개성과 인간성을 동시에 잃어버리는, 뻔한 사회로 가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노일저대 원형 끝’./ 계속.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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