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파동과 윤치호의 ‘변명’
문창극 파동과 윤치호의 ‘변명’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영후 칼럼] 망언과 변명으로 포장된 친일 논리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들이 자신의 반민족행위에 대해 강변하고 옹호했던 친일 논리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강력한 프레임으로 작동되고 있음이 문창극 파동에서 생생히 드러났다. 친일파들은 ‘일제하에서 생존하기 위해 불가피했다’, ‘대부분 국민들도 일제에 협력했다’, ‘일제의 지배기구에서 한국인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일제가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담론에 힘을 얻고 있는 일부 친일 보수우파는 상식을 벗어난 ‘망언’과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대는 ‘변명’으로 언어를 오염시키고 있다.

현재까지 친일 행위를 역사적으로 정리하지 못하고 친일 변명이 재생산되어 강력한 힘을 갖게 된 이유는 해방 후 친일파들이 지배계층의 다수를 차지한데 있다. 이들에게 친일 합리화 논리와 일제의 식민사관은 주요한 변명의 근거가 되었고 학교 교육에도 스며들어 친일 담론이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었다. 일부 국민들이 친일의 폐해가 무엇이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킨 것이다.

문 후보자는 윤치호를 인용하여 우리 민족성이 게으르고 자립성이 부족하며, 일제강점은 신의 뜻이라고 말했다. 친일과 식민사관의 근원을 알기 위해서 친일 협력의 핵심인물인 윤치호의 발자취를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환기시킨 것이다. 윤치호는 개화기부터 일제말까지 정치가, 교육가, 기독교지도자, 친일협력자로 활동한 문제적 인물이다. 윤치호에 대해 역사학계 일부에서는 개화기의 근대화 운동을 긍정 평가하기도 하나,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의 친일협력 노선과 행동을 한목소리로 비판하고 있다.

윤치호 가문은 조선시대 명문가로 5촌 조카 윤보선 전 대통령, 4촌 동생 윤치영 전 공화당의장이 대표적이다. 윤치호는 일본과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갑신정변․갑오개혁‧독립협회운동 등 개화기의 역사적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했다. 그는 당대의 현실을 기록한 방대한 일기(1883~1943)를 남겼다. 일기는 자기합리화를 위한 의도적 기록이라는 지적처럼 윤치호의 친일 협력 논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자료다.

개화기부터 윤치호는 유교사상을 국가발전을 정체시키는 윤리로 비판 배격하고, 대안으로 기독교를 전면 수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한국 민족의 잠재역량을 불신하여 민족 패배주의에 빠졌고 외부세력이 개입해  ‘병합’ 당할 수밖에 없다는 숙명론을 견지했다. ‘민족의 게으름, 무사안일, 기회주의와 양반들의 사색당쟁, 사대주의, 무사안일은 최악의 정부인 조선의 유산이다’는 인식은 문명국 지배하 개혁론으로 연결되고 친일협력의 토대가 되었다.

윤치호는 구한말부터 독립을 포기하고 일제의 명령과 요구에 순응해야 한다는 일제신민론(日帝臣民論)에 몰입하고 일제의 식민통치가 대한제국의 전제통치보다 낫다는 자세를 취했다. 비관적 역사관과 현실상황론에 입각해서 3.1 운동 직후 기자회견에서 조선독립불능론, 독립운동무용론을 주장하며 약자는 강자에게 순종해야 자기를 보존할 수 있다고 강변했다.  일제 말기에는 황국신민화정책에 적극 협력하면서 조선인은 일제신민으로서 더욱 행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사회진화론의 신봉자였던 윤치호는 약자보다 강자의 사회에 정의가 더 우월하다는 인식하에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것이 신의 정의로 보았다. 윤치호는 일기에 ‘힘은 정의라는 것이 이 세계의 신이다. 국가에 있어서 약한 것보다 더 큰 죄는 없다’고 적었다. 신의 뜻과 힘의 정의론은 윤치호의 친일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윤치호가 미국에서 경험한 백인들의 유색인종 차별과 모욕은 민족주의를 버리고 황인종주의에 매몰되는 원인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개전되자 윤치호는 ‘이것은 백인종에 대한 황인종의 진정한 인종전쟁이다’라고 일기에 썼다. 대동아공영주의를 주장한 일제의 침략 정책을 찬양하고 일본이 승리하기를 기원했다.

윤치호의 논리는 일제에 의해 반도적 성격론, 타율성‧정체성‧당파성 이론으로 날조되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데 악용되었다. 현재 공론장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친미주의, 민족개조론, 종교적 맹신, 최적자생존론, 타율적 경제발전론으로 둔갑하여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

147702_167599_1655.jpg
▲ 권영후 소통기획자.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대상을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다. 역사적 변명이 사고의 프레임을 만들고 지배논리를 내면화시킬 수 있다. 과거를 되살려 각성하고 진실에 접근하여 망언과 변명으로 포장된 거짓의 실체를 확인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역사적 상대주의, 상황론, 불가지론에 근거한 친일변명에 굴복하고 부화뇌동하는 행태를 경계해야 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독립운동의 역사가 부정되고 일제의 식민지배가 역사발전의 정상적 과정으로 포장되어 우리 의식의 내면에 얼마나 깔려 있는지 꼼꼼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 권영후 소통기획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0 / 400
댓글 1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순 추천순 이 기사에 달린 댓글 1
미련곰 2014-07-02 00:16:31
윤치호 같은 회색분자의 주장을 총독부가 쉽게 인용했을지 의문입니다. 아니 어느 체제, 어떤 사회건 반체제자들보다도 회의주의자나 회색분자들을 더 경계하지 않던가요?

윤치호의 주장이 악용되었다기 보다는, 일본의 그런 주장을 궤변으로만 보지 않고 우리 내부의 잘못된 점을 찾으려 했던게 아닐까요? 윤치호가 1940년대 초까지 일본이나 총독부의 각종 행사나 각종 요청을 회피하거나 거부했다는 점도 함께 인식하셨으면 좋겠군요.
21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