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사는 이야기⑬]

#1 1960년대 말, 제주시 서부두 화력발전소 근처에 있던 남양 여인숙은 내 불알 친구 M의 집이었다. 그 집은 방황하는 10대 소년에게는 지친 영혼의 쉼터였다. 아버지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대학진학 불가)을 듣고 절망의 늪에서 허덕이던 나에게 즈 깁은 ‘구원의 방주’와 같았다. 그 집 식구들은 모범생인 M을 타락시킨 주범이라면서 모두 날 싫어했지만 여동생 영순이(가명)만은 반겨서 술상(막걸리+생두부)으로 우리를 기쁘게 했다. 만약에 그때 술이 없었다면, 우정의 온기(그때만 해도 M은 따뜻한 남자였다)가 없었다면 그 질풍노도의 시대를 극복하고 모진 세월의 강을 건널 수 없었을 것이다. 때로 돼먹지 않은 시(詩) 나부랭이를 거기서 끄적이기도 했는데, 한 투숙객이 그 시를 사겠다고 해서 내 생애 첫 고료(?)를 받았다. “문학이 이렇게 헐값으로 팔릴 수도 있구나...”자기연민과 자기혐오를 느끼면서 나는 내 영혼을 팔았다. 어디 영혼뿐이랴.

#2 1970년대의 어느 날, 서부두 창녀에게 동정을 바쳐 총각 딱지를 떼어버리고 마치 번데기에서 나비가 된 것처럼 우쭐거렸다. 그것은 서글픈 내 인생의 첫 번째 통과의례였다. 남양여인숙에 장기 투숙하는 여인이 있었다. 나와 동창생 K는 시시때때로 베니다 칸막이 너머에서 그 여인이 내지르는 교성을 들었다. 작은 구멍을 통해 그녀의 요분질을 보다가 참지 못한 K가 급히 화장실로 간 사이, 나도 마른 침을 삼키며 ‘육체의 향연’을 보았다. 아! 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을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3 1980년대의 어느 날, 지명수배가 내려진 운동권 대학생이 제주도로 도피해서 남양 여인숙에 묵었다가 분신 자살하는 바람에 그 집이 불탄 적도 있었다. 아까운 청춘이 그 집에서 산화했고, 그 후로도 이 땅에서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죽음의 굿판’은 멈추지 않았다.
 
#4 1990년대의 어느 날, 40대의 K가 폐결핵으로 되를 토하며,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M의 아버지도 그 집에서 돌아가셨다. 사라져버린 건 단지 그들만이 아니다.

#5 2000년대 이후, 도시계획 시행으로 도로가 신설되면서 반 세기의 전통(?)을 지닌 그 집도 헐렸다. 이제 남양 여인숙의 흔적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 법. 내 ‘마음의 좌표’에 그 집은 뚜렷이 남아 있다. 푸르디 푸른 청춘시절의 온갖 기쁜과 슬픔을 간직한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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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일홍 극작가.

내 청춘의 폐허 위에서 빛나던 모뉴앙! 남양 여인숙은 아나키스트에다 테카당이었던 내 젊은 날의 가슴저린 추억으로 길이 남으리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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