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사는 이야기⑭]

봄이 여자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다. 가을이 되면 나는 어김없이 사추기증후군(思秋期症候群)을 앓는다. 50대 이상 나이 든 사람들의 감상벽, 괜히 우울하고 슬퍼지는 증상을 말한다.

이 가을에 소나타를 들으며 슬프도록 아름다운 한 여인을 떠올린다. 북구적인 미모에 지성과 재능을 겸비하여 미국영화협회(AFI)가 위대한 20세기의 여배우라고 칭송한 잉그릿 버그만이다. 그녀는 아카데미 주연상을 두 번이나 받은 명배우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버그만과 게리 쿠퍼가 주연한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봤다. 버그만은 맑고 푸른 눈으로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관객을 뇌살시켰다. 어린 눈에도 금발의 싱싱한 처녀의 모습이 어찌나 황홀하던지 오줌을 질금거릴 지경이었다.

어른이 된 후, 나는 <가을 소나타>의 시나리오를 읽었고 이 무덤덤한 시나리오를 명작으로 만든 사람은 스웨덴의 세계적인 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이다. 버그만의 마지막 영화가 된 <가을 소나타>에서 그녀는 ‘예술활동(연주)’에만 열심이고 남편과 두 딸에게는 평생 관심조차 없는 이기적으로 무정한 여자‘로 나오지만 전혀 나쁜 년으로 보이지 않는 게 이상스러웠다. 그래서 어느 평론가는 “버그만이 나쁜 역을 맡으면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영화, 감독, 평론이 아니다. 내 영혼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이 불멸의 여배우를 향한 뜨거운 애모의 정이다. 이탈리아 영화감독 롯셀리니와 버그만의 간통사건이 알려졌을 때 그녀가 헐떡이며 섹스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내 가슴은 터져버렸고 분노와 질투의 불길이 치솟았다. “어떻게 네 년이…!”

간통 사건 후 그녀가 주연한 영화 <잔 다르크>가 흥행에 참패하자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성녀라고 생각했나 봐요. 아니에요, 난 그냥 한 명의 여자, 남들과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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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일홍 극작가.
그렇다! 그녀 역시 구름 위에 사는 천사나 이슬만 먹고 사는 신선이 아니라, 한 마리 암컷-육체의 욕망을 갈구하는 평범한 여자였음을 나는 왜 몰랐던가?

아마, 가을의 우수(憂愁), 멜랑꼴리와 페이소스를 머금은 눈동자, 농익은 미소로 뭇 남성을 홀린 세기의 스타, 잉그릿 버그만은 내 마음의 횡격막에 깊은 화인(火印)을 남긴 여인이다.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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