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의 제주신화 이야기] (89) 원강아미 원형 2

원강아미 원형은 ‘관계’에 집착한다. 부모님들 간 ‘구덕혼사’를 하여 ‘관계’를 맺는 데 그녀의 감정과 의사는 별반 개입되지 않았으나 그녀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관계’다. 그녀의 행복이나 불행, 기쁨이나 고통은 자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남편이나 가족, 사회 내에 있다.
그녀의 삶을 규정하는 관계는 어릴 적엔 아버지, 크니 남편, 나이가 드니 자식이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그 ‘관계’가 요구하는 대로 맞춘다. 남편과의 관계를 잘 지켜내기 위해, 자식과의 관계를 잘 지켜내기 위해 그녀는 그녀의 모든 것을 버린다. 그녀의 욕망과 그녀의 만족, 그녀의 안위를 버리며, 신경질 나고 짜증나는 마음도 접는다. 질투도 버리고 늑장도 버린다. 그녀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지속적이고 집중적으로 헌신한다. 원강아미의 이런 모습은, 설령 여성적인 그녀의 개성이 선택한 결과일지라도 결과적으로는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표준여성형(스테레오 타입)이 되어 왔다.

1.jpg
▲ 그녀가 떠날 때(페오 알라다그 감독. 2010. 터키.) 여성이 모든 속박을 감수해내야 가족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 개인과 가족커뮤니티의 충돌 - 그 깊고 오래된 역사

원강아미 여신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 ‘관계’를 위협하는 인물은 제인장자이다. 꽃감관을 하러 가는 남편을 따라 험한 길을 나선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거부인 제인장자에게 자신 원강아미를 팔아두고 남편 사라도령만 꽃감관 관직의 길을 떠나기로 한다.

사라도령을 남편으로 둔 원강아미로서는, 아무리 팔린 몸이라 할지라도 남편을 두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다. 이미 팔린 몸인데 주인 제인장자의 말을 듣지 않고 요리조리 피하니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모진 고문이다. 이미 관직과 돈에 팔려나간 사랑이 그 지고지순함을 유지하려니 ‘희생과 수난’의 길은 예정되어 있다.

원강아미의 남편 사라도령은 그녀가 제인장자의 모진 협박과 고문에 못 이겨 죽어가고 있음을 알지만 꽃감관이라는 그의 지위를 수행하느라 그녀를 죽게 방치한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에 대한,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책임과 사랑을 지키느라 죽어 나가고 있었지만 어린 아이야 그렇다 해도 그런 그녀의 행동에 따라붙는 남편의 행동은 없다.

아들은 그래도 좀 낫다. 아들은 환생꽃을 뿌려, 모진 고난을 당하고 죽은 어머니 원강아미를 살려낸다. 어머니 원강아미는 ‘아이고 봄잠이라 오래도 잤구나.’하며 머리를 긁으면서 일어난다. 원강아미는 아들이 자신을 어머니로 찾아주고 대접하자 나른한 보람을 느끼고 기지개를 폈다.
그녀의 그 행복과 만족감은 그녀가 오랜 기간 희생과 수난으로 ‘관계’를 유지한 결과였지만 남편이나 아들이 그것을 챙겨주는 바에 따라서만 얻어진다. 관직을 쫓으려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찾으려는 아들은, 원강아미의 희생과 배려, 양보의 모습과는 달리,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아내나, 어머니를 위해 포기하거나 때를 보며 뒤로 미루지 않는다.

아들은 아버지를 만나고 꽃감관의 자리에 있는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당한 고초를 들은 후에 죽은 어머니를 살려낸다. 꽃감관의 자리는 아들에게 상속되고, 아들에 의해 환생하고 구제되어서 서천꽃밭으로 간 원강아미는 열다섯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보호하는 여신으로 좌정된다. 결국 애비도 아들도 매한가지인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을 이을 아들을 키우는 수단으로 원강아미를 소모했으며, 아들은 어머니의 희생과 수난의 대가를 보상해 주기는 했지만 그녀를 열다섯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보호하는 일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삶의 보조자로만 존재하게 한다. 그들은 그녀를 삶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들과는 달리 세상 전부를 보지 못하는, 열다섯 살 이하의 비성인, 미완성의 상태에 묶어 놓는다. 한 참 모자란 존재로 보는 것이다. 

2.jpg
▲ 그녀가 떠날 때(페오 알라다그 감독. 2010. 터키.)

‘관계’는 상대가 있는 것인데, 원강아미는 일방적으로 사랑을 하고 일방적으로 책임을 진다. 이건 원강아미의 잘못이 아니다. 인간과 사랑에 대한 감수성이 모자란 남편과 아들에 의해 결과적으로 일방적이 되었을 뿐이고 그 예쁜 마음이 희생과 수난이라는 비존재적 상황에 빠진 것 뿐이다.

이 원강아미 원형이 개인적 관계에 매몰될 경우 그녀는 아버지-남편-아들에게 보호받고 그들 내에서 살아가는 삼종지도의 전형이 된다. 어릴 때는 아버지에게, 결혼을 해서는 남편에게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아들에게 의존한다. 그녀들은 이런 전통적인 여성상을 구현하는 일을 당연하고 긍정적으로 여기며 당연한 도리라 생각한다.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 있는 사회라면 내면화된 사회적 폭력을 인지할 것이고 원강아미의 진심을 존중하고 칭송할 테지만 대부분의 사회에서 그녀는 찬 밥 신세, 바보로 전락되었다. 주체적으로 살아 보지 않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린 적도 없고, 권력을 쟁취한 적도 부여받은 적도 없고, 호주머니에 돈도 없는 그녀는 그들에게 버림받고 나면 갈 데도 없고 심지어 먹을 것도 없으니 버림받지 않으려 애쓰고 악쓴다.

사회는 이런 원강아미의 삶을 낭만적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해 왔고 꿈꿔 왔다. 한 번 맺은 사랑이니 어떤 일이 있어도 변치 않을 것이고, 지금은 자기만 알고 나에게 무심하지만  너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참는 나의 이 지극한 사랑을 언젠가는 알아 줄 것이고,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와 더 사랑하고 더 행복해 질 것이라는 낭만적 사랑법은 여자의 위로였고 남자들의 이기심이었으며 사회가 요구하는 지배논리였다. 많은 주체적 여성들과 여성해방가들의 까발림에 의해 쌍방 간 함께 노력하지 않는 사랑이란 허구임을, 일방적인 희생과 수난은  사랑이란 이름아래 행해지는 폭력일 수 있음을 간파하게 되었지만 어쨌건 이런 낭만적 사랑을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약간 우울한 일이기도 하다. 원강아미 혼자만이 아니라 상대 남자도 원강아미와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마주했다면 세상은 소곤소곤, 화기애애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낭만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다.   

그녀의 희생과 수난은 남성들에게, 불쌍한 원강아미에 대하여 연민을 갖게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하거나 그들이 관장하는 제도의 변화를 모색하게 하는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 자신의 정체성과는 별 관련이 없는 일이다. 자신의 욕망에만 눈이 어두워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버린 게 노일저대라면, 원강아미는 자신과 절대 싸우지 않으면서 괴물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욕망은 무엇인 지, 자신은 뭘 원하는 지,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 지, 남편은 뭐하는 사람인 지, 의견을 내세우지도 분노하지도 않고 가만히 참고 따르기만 하는 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괴물이다.

나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끝없이 분노하고, 내 의견만 주장하고, 나의 안위에만 급급한 것이 매력 없는 일이듯, 자신과 타자에 대한 아무런 갈등도 일탈도 없이, 희생과 수난을 홀로 감내하며 세상의 질서를 잘 쫓아 얻고 유지되는 어머니, 아내, 연인의 자리 역시 간지 나는 자리는 아닌 듯하다.(계속/ 김정숙)

152834_172737_0155.jpg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