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먹고 자라는 식물원] 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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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쭉. ⓒ고봉선

도전이란 졸린 눈 비비고 등산화를 신는 것. 이십 키로 감량 목표 7개월째 다이어트, 목표치 얼마 안 남았다 싶으면 다시 멀어지려 한다. 힘들다. 인제 그만 주저앉고 싶다. 형체도 모를 그 누군가, 자꾸만 그만하라 속삭인다. 에라 모르겠다, 이불을 걷어찼다.

라이트를 켜고 오름으로 향했다. 빗방울이 하나둘 차창에 와 닿는다. 악셀을 밟던 발끝이 잠시 주춤거린다. 머리를 털며 달렸다. 오름 앞 주차장은 텅 비었다.

정상엔 벌써 새벽을 만끽하는 안개가 와 있었다. 그들의 메아리 들리는 듯하다. 부러워하는 눈길을 눈치챘음일까. 조롱하듯이 날름 혀를 내민다. 밑에도 또 하나의 무리가 있다. 그들은  자욱한 팔을 뻗어 오름의 허리를 감싸고 있다. 마치 오름은 자기 거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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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쭉. ⓒ고봉선

숲으로 들어섰다.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가 오잖아. 돌아서야 해.'
 마음 안 어느 구석에서 입안의 초콜릿처럼 감미롭게 속삭이는 소리 들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럴 순 없어. 등산화 끈을 조였다. 숨이 차오를 무렵, 뚝. 뚝. 뚝. 빗물인지 땀인지 발등으로 떨어졌다.

가쁜 숨 몰아세우며 계단으로 발을 올려놓았다. 쭈욱쭉 더듬이를 뻗으며 달팽이 한 마리가 계단을 내려온다. 저는 이미 정상엘 다녀오는 길이란다.
"핑계란 돌고 돌아 결국 자신 안에 있는 거야."라며 일침을 날렸다.
아, 달팽이 한 마리조차 핑계를  경계하는구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곁에 아무도 없음이 다행이다.

정상에 다다를 무렵 나뭇잎을 스쳐 가는 함성이 들린다. 핑계란 유혹을 뿌리친 내게 바람이 보내는 갈채이려니. 꿈보다 해몽이다.

비에 젖은 억새는 이미 흥을 잃었다. 축 늘어진 날갯죽지에 빗물이  맺혀 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나처럼 철모른 꽃이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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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쭉. ⓒ고봉선


가을 철쭉

바람의 박수갈채 해송 잎을 스쳐 간다
억새의 날갯죽지 콧물 줄줄 흘리는데
나처럼 철모른 꽃이 정상에 와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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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쭉. ⓒ고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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