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레코드] (32) 삼거리에서 만난 사람 / 장기하와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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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일 없이 산다 / 장기하와 얼굴들 (2009)

그곳에 비파나무 한 그루 있었다. 그 나무는 말이 비파나무지 비파는 열리지 않고 회한만 잔뜩 열렸다. 해마다 가을이면 노란 후회가 탐스럽게 익었다. 지금은 비파나무 밑동 위로 자동차가 달린다. 밑동 위로 지나지 않는 게 없다. 일방통행도 아닌데 편도로 가서 돌아올 줄 모르는 자동차. 내가 자동차 속에 앉아있었거나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을 때였을 것이다. 공간이 곧 시간인 삼거리에서 나는 그 사람을 만났다. 정확히는 보았다. 더 정확히는 약 15초 정도 함께 걸었다. 더욱 더 정확히 말하면 머뭇거리다 고개 한 번 돌리는 시간에 그 사람이 내 옆을 지나갔다. 어쩌면 편의점에서 음악을 사고 나오던 때였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사흘 정도 뒤에 또 어떤 사람과 조우를 했고, 그런 방식으로 몇 개월이 흘렀다. 몇 개월이 한 평생처럼 느껴졌다. 다른 어떤 사람이 내게 길을 물었다. 삼거리에서 삼거리를 찾는 다른 어떤 사람 같은 어떤 사람은 종종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대개 대리인으로 여행에 관한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가능한 멀고도 갈 확률이 적은 나라에 관한 여행서적일 가능성이 높다. 그곳에 악기점이 있었다. 때론 오래된 현악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곳에 서점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곳에 철물점도 있었고, 하얀색 카디건을 입은 검정고시 수험생도 있었다. 나는 색목인처럼 쓸쓸하게 삼거리를 걸었다. 무심코 돌아보면 모두 등을 돌린 채 제 갈 길을 간다. 그것이 삼거리의 철칙이다. 태생적 은유다. 언제부터 담팔수나무는 사람 행색을 한 것일까. / 현택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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