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후 칼럼] 언어 프레임 전쟁을 넘어

벽에 걸렸거나 책상위에 놓였거나 스마트폰에 내장되었거나 올해의 모든 달력은 달랑 한 장만 남았다. 2014년이 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지나간 것, 이제는 다가오는 미래만 생각하자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졌다. 현실의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과거는 빨리 망각속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대상일 수 있다. 과연 과거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가? 과거를 소환하는 이유는 인간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가 되고 있는 올 한해를 돌이켜보면 기억과의 싸움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한다. 기억을 소환하고 마주하면서 금년이 최악인가, 최선인가 하는 이분법적인 평가보다는 담론시장에서 벌어진 언어전쟁이 우선 떠오른다. 흔히 언어전쟁은 정치적 곤경을 헤쳐나가는 유용한 수단으로 쓰인다. 올해 수많은 아젠다들이 공론장에서 백가쟁명식 논쟁의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중에서 보수진영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일방적인 승리로 한해를 마감하고, 진보진영이 내년에도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언어전쟁 사례들이 주목된다.

‘빨리 과거를 잊고 비정상을 정상화’할 것을 강요하는 여론몰이, 자기편에 불리한 말은 무시하고 성장과 민생을 앞세워 건전한 정치적 토론과 합의 과정을 정쟁으로 몰아가는 비민주적 행태, 법치주의 잣대만 들이대며 민주주의의 성스러운 옹호자로 포장하는 기법, ‘뻐꾸기의 탁란’처럼 남의 새를 키우는 어미가 되게 만드는 바꿔치기 등이다.

세월호는 2014년에 일어났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고 피해자들의 아픔과 분노에 공감하며 치유하려는 사회적 분위기를 일탈하여 차츰 진영 간 언어전쟁의 수단으로 변해버렸다. 선장과 유병언 책임론이 정부책임론을 밀어내고, 적폐와의 전쟁, 경제살리기 주장이 유족들의 간절한 소망을 남의 일로 보이게 만들었다. 우리의 기억속에 진상규명은 왜소해지고 ‘비정상의 정상화’가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진실, 책임, 안전은 허구적 용어로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올해들어 담론시장에서  2012년 대선의 최대 쟁점이었던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 복지, 증세는 힘을 잃었고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정부 여당은 ‘대선공약 파기’를 정쟁론으로 물타기하고, 주요 공약사항은 거의 언급을 않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국민들의 피로감을 상승시키는 데 성공했다. 정치권은 이러한 의제를 주장할수록 표만 잃게 된다고 겁을 먹게 된 것이다. 경제살리기와 민생이 담론시장을 압도하면서 성장 일변도의 중독 증세는 좀처럼 치유될 가망이 없어 보인다.

법치, 법에 의한 통치는 민주주의를 지탱시키는 기본적인 장치라고 말한다. 현대 정치에서 법치주의는 늘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법의 운용과 관련하여 정부의 고무줄 잣대와 이해당사자 간의 첨예한 대립이 주된 이유다. 엄격함과 관용은 성숙한 민주사회 법 운용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사회불안이 가중되면서, 공안과 질서를 강조하는 일방적 법치주의로 철권을 휘두를 소지가 커졌다. 실제로 노사문제를 다루는 정부나 기업은 관용보다는 법치를 앞세워 상대방을 제압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지금 국고가 거덜나고 있는데 ‘무상 파티’만 하고 있을 것이냐”고 홍준표 경남지사가 주장하면서 무상복지 논란이 벌어졌다. 2010년 지방선거부터 보편적 복지보다는 무상복지 용어가 시민들에게 쉽게 다가가면서 경쟁적으로 무상복지 정책을 펼쳤다. 올해 보수진영은 무상급식에 ‘이건희 회장도 공짜 혜택, 포퓰리즘’이라는 낙인을 찍어 부정적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중앙정부는 무상보육은 대통령의 공약이고 무상급식은 지방 교육감의 공약사항으로 분리하여 ‘무상급식은 공짜밥’ 논리로 공격하자, 일부 교육감들은 내년도 보육예산을 편성하지 않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에 야당이 여당 몫인 내년도 보육예산을 증액시키는 데 골몰하는 ‘뻐꾸기 탁란’ 같은 진풍경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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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민여론은 심판 받을 자가 심판자로 변신하는 수사적인 언술, 거짓말을 진실로 둔갑시키는 선전술, 자기편에 유리한 것만 강조하며 약자를 억압하는 권위주의적 논리, 남의 것을 차용한 여론몰이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보수진영은 언어전쟁에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언어전쟁은 소비자의 이목을 유인하는 일방적 광고마케팅과 유사하고, 인간의 희로애락에 조응하며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하다. 진보진영은 유권자들이 언어 프레임 전쟁의 진실과 현란한 수사 기법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탓할 것이 아니라, 초심으로 돌아가 왜 국민들의 정서에 부합하지 못했는지 성찰해야 한다. / 권영후 소통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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