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38) 한국군 총사령관 고문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통’ 제임스 하우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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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에게 고함/....(중략)....일본천황의 명령에 의하여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중략),...1945년 9월 9일 태평양방면 미국육군부대 총사령관 미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맥아더 포고 제1호

‘1949년 2월 21일/ 경비대 조사업무 개시/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주한미군 사령관/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 작전: 제주도: 매우 적은 횟수의 활동보고. 게릴라에 대한 작전 계속. 제주도에 대한 경비대의 조사업무가 개시됨./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주한미육군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Weekly Activities) 1948. 9. 13~1949. 6. 27

‘1949년 2월 28일/ 김정식 중령 체포/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주한미군 사령관/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 반대분자: G-2소속 김안일(Kim Ahn Il) 소령은 3개월 동안 애월면에 머문 공산주의자로 의심받는 김정식(Kim Jong Sirck) 중령을 체포하였다.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대위주한미육군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Weekly Activities) 1948. 9. 13~1949. 6. 27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 1918~1996)은 1918년 2월 28일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그는 나이 16세에 형의 이름을 빌어 군에 지원하였다. 5보병 연대에 배치되었고, 1940년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1941년 1월 24일 소위로 진급했고, 아이오와주 데스 모인항에 여성보조군(Women's Army Auxiliary Corps; WAAC'S) 형성의 임무를 맡고 차출되었다. 레오나드 우드 항구에서 활동했던 75보병 사단에 배치되어 벌지전투에서 부상병을 영국으로 후송하는 일을 맡기도 하고, 작전장교로 289보병연대 1대대에 S-3에 배치되기도 하였다. 한국에 오기 직전까지 펜실바니아 군사행정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1946년 7월 26일, 28세의 나이로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도쿄의 맥아더사령부를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는 해방공간에서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관이다. 미군정(美軍政,military administration) 3년 동안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본 통치 방침인 ‘맥아더 포고’를 발표하였다. 그 전문(前文)에서 맥아더는 “일본국 천황과 정부와 대본영(大本營)을 대표하여 서명한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 휘하의 전첩군(戰捷軍)은 본일(本日)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함”이라고 선언하였다.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한국에 진주하였다는 미국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하우스만은  처음, 조선경비대를 창설하는 것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춘천8연대에 배치되어 연대를 훈련하고 조직하고,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베로스(Russel D.Barros) 대령의 보좌관역할을 수행하였다. 남한군대는 경찰예비대(constabulary)로 출발했다. 일본 육사출신이거나 만주군 출신으로 일본제국주의 군대를 위해 복무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우스만은  광복군 출신들을 상당히 무시했다. 그들이 일본군 출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공산주의자를 적대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베로스 대령이 제주도사(島司)로 발령이 난 후, 사실상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누구나 조언을 구하는 '한국통'이 되어 갔다. 그의 마음에 들면 승진할 수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생명도 내놓아야 했다. 하우스만의 마음에 차고 안 차고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가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 가 아닌 가였다. 하우스만이 좋아했다 해도 공산주의자로 밝혀지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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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우스만은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의 최종 명령자인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하우스만은 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미고문단장 등이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에 참가했다.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면서 임시군사고문단이 만들어지자, 군사고문단장과 국군 참모총장 사이의 연락 임무를 맡았고 이승만을 면담하는 일도 잦아졌다. 이승만은 "군대에서 당신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알려 달라, 그를 교체하겠다"라까지 하우스만을 신임하였다. 

이승만은 정일권, 백선엽, 이형근 세 사람을 '내 어금니'라 부르며 국방을 책임질 든든한 사람이라고 여겼고, 정일권을 참모총장, 백선엽을 1군사령관에 임명하고는 이형근에게 줄 자리가 없자, 결국 합동참모본부를 만들어 그 자리에 이형근을 임명했다. 이 세 사람은 이승만대통령의 측근이었지만, 하우스만과 친한 사이이기도 했다.

하우스만은 한 사람의 키 큰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1960년대까지 한국정치의 배후무대에서 정력적으로 활약했다. 일국의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었고, 남한 ‘국군의 아버지’로 자칭했다. 군사쿠테타 세력들 정착에도 관여한 인물, 친일파 장교들을 유독 선호하고 그 출세를 도운 인물, 이승만의 동족 대학살 현장 어디든지 나타나 진두지휘한 인물 제임스 하우스만. 박정희 쿠테타를 미국에 가서 설득한 인물, 전두환 쿠테타를 미국에 이해시킨 인물, 그가 바로 제임스 하우스만이다.

유태인 대신에 한국인을 멸시하는 ‘gook’이라 부른 사나이. 제주4·3당시 동족 토벌에 앞장 선 박진경을 암살한  문상길이 처형당하자 처형대에 다가가  문상길 중위의 머리에다 권총을 한 번 더 쏜다. 군대 좌익 색출작업을 시행하면서, 무고한 양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총살하고 그것을 녹화해 훈련용 교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제주도 양민 20여명의 총살을 지시한 일에 대해 문책하던 미국 대사에게 “몇 개 월 전에는 민간인 200명 죽이는 것도 보통이었는데 20명 죽인 것이 무슨 문제냐”고 대꾸하기도 했다.   

하우스만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얘기하는 '한국군의 아버지'로서 뿐만 아니라 '학살의 방조자이자 수행자'이다. ‘촌뜨기 같은 언행 뒤에 자신의 기술을 감추고 있는 교활한 공작원’이라는 커밍스의 하우스만에 대한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우스만은 전두환 정권이 안정화되는 1981년 7월 1일 군사고문직을 그만 두고  한국을 떠나면서 "긍지를 느꼈지만, 사랑을 키워온 한국과 친구들을 떠나면서 매우 큰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그가 느낀 긍지는 무엇이고, 그에게 한국은 무엇이며 그의 한국인 친구들은 누구였을까? 하우스만은 1987년 영국 텔레비젼 인터뷰에서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인보다 더...야비한 놈(brutal bastards, worse than Japanese)"이라고 하였다. 백색 미국인으로 야비한 황인종의 나라 한국에 와 적색 공산주의자의 씨를 말리는 법을 가르쳐 준 하우스만, 그는 부시가 태어나고 주지사를 지냈던 '남성의 고향'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1996년에 죽었다.

‘1949년 3월 21일/ 파괴분자에 대해 재판 / 사면계획/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주한미군 사령관/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 반체제분자:/ 파괴분자들에 대한 재판, 기간 1월 1일~3월 15일/ 피고: 장교 78명, 사병 174명, 민간인 1명,  총 253명/ 결과: 유죄 225명, 무죄 27명, 보류 1명/ 선고: 사형 6명, 6개월에서 종신 노역 9명/ 사면계획: 제주도. 기간 2월 26일 현재: 반체제 민간인 2,200명이 제2연대 본부로 인계되었다. 매일 많은 수가 이 사면계획에 참여될 것이다./작전: 제주도: 게릴라 사망 58명, 포로 27명. 한국군 사망 18명, 부상 4명. LMG 2정, M-1 9정, 카빈 8정 회수./한국 해군: 제주도에 대한 경계강화 명령. 4척이 현재 제주도 해역을 순찰중. 해군 함선들이 제주도에 구호물자를 수송하는데 사용되었음. 주요 물품: 신발, 옷감 1,800야드, 다용도 식품 60박스(박스 당 70파운드), 의약품 100파운드./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주한미육군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Weekly Activities) 1948. 9. 13~1949.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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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경 대령 암살사건 조사차 제주에 온 통위부 고문관 로버츠(왼쪽) 준장1948.6.18)    

박진경 연대장과는 절친한 사이

하우스만의 반공주의는 끈질긴 것이었다. 제주4·3 토벌작전 당시 무장대원들을 몇 명이나 체포했는지, 몇 명이나 죽였는지, 부상자는 몇 명인지 등을 체크하는 일도 하우스만의 일이었다. 1948년 6월 18일 새벽, 9연대에서는 문상길 중위가 그의 부하와 함께 박진경연대장을 사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박진경의 장례는 6월 22일 6월 22일 오후 2시 경비대 총사령부에서 부대장으로 치러졌다. 문상길 중위와 그의 부하들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문상길은 "부하들이 암살했다.… 내가 주모자가 됐다. 어쨌든 박대령의 죽음은 당연하다"고 감옥에서 말했다. 

박진경은 영어를 잘 해 미군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군정장관 딘(William. F.Dean)은 그를 총애하여 직접 진급 계급장을 달아주러 제주도로 내려올 정도였다. 박진경은 이에 부응하여 15세 아이를 사살하는 등의 무차별 체포작전을 폈고, 이는 도민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박진경을 쏜 군인은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다"라고 재판정에서 말하였다.  

총살형은 집행되었으며 문상길과 부하들은 총살장에서도 평소와 별다른 점이 없이 하나님께 "우리들의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우리들이 뿌리는 피와 정신이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 드렸다. 그리고 최후에는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한 후 '양양한 앞 길을'하는 군가를 부르면서 형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참관하고 있던 미군사고문단 하우스만 대위가 다가가 넘어진 문상길 시체에다 자기 피스톨을 꺼내 난사했다. 공산주의자는 죽여도 좋다는 하우스만의 반공주의는 끈질긴 것이었다. 하우스만 대위는 경비대 정보책임자로 박진경 대령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에게 박진경을 추천한 장본인이었다.  문상길의 처형은 군 내부 좌익세력 척결의 신호탄이었다.

‘1949년 3월 28일/ 포로 279명 체포/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주한미군 사령관/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 한국 육군/ 작전: 좀더 간략한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하여 향후의 작전에 관한 보고는 다음 세 곳의 주요 지역에 대하여 작성될 것이다. 38선, 남한, 제주도/ a. 38선: 이번 주 다섯 차례의 사건에 보고되었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적: 사망 18명. 부상, 실종 및 포로 없음 국군: 사망 1명. 부상 1명. 실종 및 포로 없음/ b. 남한: 보고된 사상자는 다음과 같음. 게릴라: 사망 113명. 부상 및 실종 없음. 포로 36명  국군: 사망 116명. 부상 15명. 실종 및 포로 없음  c. 제주도: 세 차례의 사건에서 다음과 같은 결과보고.  게릴라: 사망 3명. 부상 및 실종 없음. 포로 279명/ 국군: 사망, 부상, 실종 및 포로 없음/ 한국 해군/3월 21일 네 척의 함선들이 한국 육군부대를 제주도 근해의 작은 섬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곳에 피신해 있는 게릴라들을 소탕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 4척의 배가 제주도 근해를 순찰하고 있으나 잠입자들은 없었다.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주한미육군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Weekly Activities) 1948. 9. 13~1949. 6. 27

한국정치와 하우스만

하우스만은 국무회의에 미국인으로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경무대에서 살기도 했는데, 그것은 이승만이 부르면 언제나 응하기 위해서였다. 10여 년이 넘게 이승만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는 최후  통첩을 한 것도 그였다. 

하우스만은 송요찬(宋堯讚)의 고문이기도 했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데모가 전국에서 불붙자 미국정부는 이승만을 더 이상 남한의 통치자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다. 하우스만은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을 통해 미국의 지지 철회를 통고하였다.   

이승만 정권 몰락 후, 장면(張勉)은 하우스만에게 군사자문 역할을 부탁하였다. 하우스만이 장면을 도우면 안 된다는 미국의 결정은 장면 정권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면은 학생과 혁신세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력 또한 갖고 있었다. 바로 등장한 박정희(朴正熙)와 육사8기생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는 미국에게 확실히 새로운 카드가 될 수 있었다. 

하우스만은 1960년 3월 1일, 군부 내의 쿠데타 기도를 상부에 보고했다. 박정희는 여순사건 때  작전참모였다. 그는 여순사건이 진압된 뒤에 군부 내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11월에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었는데, 자신이 알고 있던 남로당 조직체계를 밀고하고 하우스만과 김창룡·원용덕·백선엽 등의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 구명운동으로 생명을 건졌다.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5월 18일 박정희는 미8군 하우스만의 집을 찾아갔다. 하우스만은 박정희와 만난 뒤 바로 자진에서 미국으로 날아가, 미 육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성, CIA에 박정희와 한국 상황에 대해 브리핑했다.  하우스만은 박정희에 대한 훌륭한 정보를 제공한 보답으로 미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공로표창을 받았다. 

하우스만은 1981년 한국 땅을 떠났다. 1946년에 한국에 왔으니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전두환·노태우라는 2세대 군부인맥은 그 후에도 10년이 넘게 남한을 통치했다. 하우스만이 한국 땅을 떠날 때, 노태우 육군중장은 하우스만을 불러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이 들어 있는 기념패를 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임스 H. 하우스만,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 신생국가에서 오늘날 대한민국까지의 부침 동안 옆에서 큰 도움을 준 영원한 친구에게. 1981년 7월 1일" 

하우스만은 한국과 친구들을 떠나면서 매우 큰 슬픔을 느꼈다. 그가 느낀 긍지는 무엇이고, 그에게 한국은 무엇이며 그의 한국인 친구들은 누구였을까? 거기에 또 김창룡(金昌龍, 1920~1956)이 있다. 일본군 부사관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여순 사건의 진압과 한국 전쟁에 참여한 김창룡.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육군 특무부대 지휘관이었으며, 여순 사건과 관련해서 체포된 박정희 소령을 수사하기도 했다. 함경남도 출신이며,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군 부문에 포함이 되어있다.

김창룡은 이승만을 직접 면담하고, 그의 두터운 신임을 얻으면서 군대 내부에 침투한 빨갱이에 대한 사냥을 자행했다. 김창룡의 뒤에는 이승만이 있었지만, 김창룡은 하우스만에게도 직접 보고하고 있었다. 김창룡과 하우스만은 반미·반일 성향을 가진 공산주의 박멸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고, 열성적이었다. 김창룡은 보도연맹원 학살 등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학살을 직접 주도하고 시행한 인물로서 '스네이크 김'으로 악명을 떨친 인간이다.  

제주4·3 현장에서 죽이는 것이 진보인 것으로 믿었던 사람. 이런 심성 때문에 그는 미군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사람'으로 꼽혔다. 김창룡이 '스네이크'였다면, 하우스만은 이 뱀이 활개치고 놀 수 있는 공간과 담력을 키워준 '대사형(大蛇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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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요하지 말라는 신문과 라디오방송과는 달리 정부요인들은 이미 한강을 건너 서울을 떠났고 수많은 시민들을 서울에 남겨둔 채 한강교는 폭파되고 만다. 다리 위에는 4,50 여대의 차량과 수많은 피난민들이 메우고 있었으나 비명지를 틈도 없이 죽음을 당했다.

누가 한강교 폭파를 지시했는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 다음날  오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국회에 출석하여 '서울 사수'를 공언했다. 그 시간 국방부 선무방송 지프차가 서울 시가지를 누볐다. "국군은 38선 이남으로 내려온 적을 격파했습니다. 평양은 내일 중에 함락될 것입니다. 서울 시민들은 안심하십시오."  그 시간 T-34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은 국군을 매섭게 몰아붙이며 서울을 공격방향으로 거침없이 진격해 왔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서울중앙방송국 마이크 앞에서 생방송으로 호언장담하는 선무방송을 했다. "어제 새벽에 침입한 적은 우리 국군의 반격으로 지금 후퇴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군은 총반격전을 개시하였던 바, 차제에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우리 민족의 숙원인 국토 통일을 완수하고야 말 것입니다."  

6월 27일 새벽 1시 긴급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되었고,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전황설명은 뒤로 한 채, 수원 천도가 확정되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곧 이승만은 경무대를 빠져나와 서울 역에서 특별 남행 피난열차를 탔다.  6월 27일 오전, 국회에서 의원들이 정부의 서울 천도 결정도 모른 채 본회의에서 '서울 사수'를 결의한 뒤 곧장 의원 대표가 경무대를 방문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서울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참담하게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서울을 떠난 뒤인 그날 밤 서울중앙방송에서는 '서울 사수'를 호소하는 이 대통령의 담화가 전국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 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중입네다. 국민 여러분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네다. 나 리승만은…."  이승만의 담화를 대전방송국에서 녹음하여 전화로 서울중앙방송국에 보낸 것이었다.  

한편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28일 새벽 1시 무렵, 인민군 탱크가 미아리 방어선을 막 돌파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 지시를 내렸다. 그 명령에 따라 공병들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한강대교를 비롯한 3개의 철교는 큰 폭음과 함께 폭싹 주저앉았다. 그 폭파 시간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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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파된 한강교량 중 일부의 모습.

한강교 폭파로 허겁지겁 피난봇짐을 싸들고 한강 인도교 위에 몰려든 약 800명의 피난민들은 그 자리에서 거대한 폭음과 함께 즉사하거나 수장되고 부상을 입었다. 국군은 퇴로를 잃게 되어 개전 당시 10만여 명이었던 병력과 장비가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치명상을 입었다. 6월 28일 오전 11시 30분, 인민군 선발대는 중앙청을 점령했다. 인민군은 가장 먼저 서대문 형무소와 각 경찰서에 수감된 4천여 명의 정치범들을 석방시키고, 즉각 인민위원회를 설치했다.  

한강교 폭파의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당시 참모부장이었던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미군 최고 책임자였다. 하우스만이 한강교를 건너자마자 다리는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였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한강다리 폭파는 육참총장 채병덕- 참모부장 김백일-공병감 최창식-공병학교장 엄홍섭 선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윤영 당시 사회부장관은 회고록에서 "26일 심야 국무회의에서 이범석 국무총리가 처음으로 제안,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고 밝혀 한강교 폭파가 참모총장보다 윗선에서 결정됐음을 시사했다. 

당시 공병 고문이었고 나중에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았던 크로포드(Richard I. Crawford) 육군소령은 폭파 당시 최창식은 자신과 같이 다리를 건너기 전이었고, 나중에 최창식의 누명을 벗겨주려 했으나 하우스만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증언하였다. 크로포드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최병덕 참모총장에게 폭파 지시를 내린 것은 '미군 장교'였고, 그는 국군 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증언했다. 한강교 폭발로 서울시민 몇 백 명의 생명을 일시에 빼앗은 사람, 그 사람은 바로 하우스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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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8월29일 ‘국치일’에 분열식을 하는 조선경비대.

여수 14연대 반란

‘우리들은 조선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지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직전에 조선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인민의 권리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철퇴’-제주도출동 거부 병사위원회 성명서(1948년 10월 21일) 중에서

‘로버츠 사령관이 대위 계급에 불과한 내게 이런 중책을 맡긴 것은 한국군 사정을 나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사실 경비대의 강점·약점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로버츠 고문단장이 내게 부여한 공식 명령은 4가지였다. 첫째, 한국군사령부가 사태 진압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면 즉각 작전통제권을 직접 관장할 것. 둘째, 기동작전사령부를 구성하고 적절한 감독 행위를 할 것. 셋째, 결과를 신속히 고문단본부에 보고할 것. 넷째, 면밀한 작전 계획을 세워 이를 성공적으로 이행할 것 등이었다. 나는 20일 하오 2시30분 정일권과 함께 비행기로 광주에 내렸다.’-하우스만· 정일화 공저, 『한국대통령을 움직인 미군대위』(한국문원, 1995), 172쪽

1948년 10월 19일 밤 10시. 여수읍 신월리 제14연대에서는 비상나팔 소리와 곧이어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빨치산 활동을 본격화시킨 여수14연대 반란사건의 신호탄이었다. 흔히 ‘여순반란사건’으로 불려지고 있는 사건. 제주도 진압작전을 더욱 잔혹스럽게 만든 한 요인이 된사건. 그날은 14연대 제1대대가 제주도에 증파되는 날이기도 했다. 

제주도에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되고, 대토벌전을 앞둔 준비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연병장에는 출동준비를 마친 제1대대뿐만 아니라 2․3대대 병사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연대 인사계 지창수(池昌洙) 상사가 나타나 대원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지금 북조선 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하여 38도선을 돌파하여 남쪽으로 진격중이다. 우리들은 여기에 호응 북진하여 미국의 괴뢰들을 소멸시켜야 한다. 지금부터 우리들은 인민해방군이 된다. 그래서 조국통일을 볼 때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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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경비대1연대 장병들.

제14연대는 순식간에 ‘반란군’으로 돌변했다. 10월 20일 새벽 5시께 반란군은 여수경찰서를 비롯해 여수읍내 각 관공서와 중요기관을 모두 점령했다. 날이 밝자 통근열차 편으로 순천 방면으로 진격, 오후 3시께 순천마저 완전 점령했다. 순천에 파견 중이던 14연대 2개 중대도 반란군에 가세하고 말았다. 반란군은 광양․구례․곡성․보성 등 주변지역으로 확산돼 나갔다. 여수시내 거리에는 ‘제주도출동 거부 병사위원회’나 ‘인민해방군 사령관’ 명의의 낯선 벽보들이 나붙기 시작했고, 오후 3시께에는 중앙동 로터리에서 ‘인민해방군 환영 시민궐기대회’라는 집회가 열리게 됐다.

반란군의 테러로 말미암아 수백 명의 경찰, 관리, 지주가 죽었다. 미국의 G-2 소식통들은 경찰에 대한 공격이 '많은 지역주민들을 만족시켰다'고 보고했다. 반란이 실패한 후 정부군은 예상대로 끔찍한 보복을 했다. 반란군은 인근 도시들로 퍼져나갔다. 수많은 시민들이 시가행진을 하며 붉은 깃발을 흔들고 구호를 외쳤다. 대중집회에서 읍 인민위원회가 재건되었으며, 체포된 많은 경찰과 몇몇 정부관리들, 지주들, '우익들' 등을 재판하고 처형하기 위해 '인민재판'이 진행됐다. 연설자들은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 대신 1945년의 용어를 사용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요구했다. 

10월 20일 아침 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여순사건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이범석 국방장관,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채병덕 국방부 참모총장을 비롯한 몇몇 한국군 고위장교와 미 군사고문단 장교들이 참석했다. 반군토벌 사령관에는 송호성 준장이 임명됐다. 그러나 반란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제임스 하우스만 미군 대위였다. 그는 한국군 총사령관 고문자격으로 바로 광주에 급파됐다. 

하우스만은 선발 진압부대로 광주 4연대를 뽑아 투입했다. 토벌작전에는 거의 모든 가용 병력이 투입되었다. 결국 반란군 3개 대대를 토벌하기 위해 4배에 가까운 병력이 동원되었다.  기갑연대․항공대․경찰기동대도 투입됐다. 진압군의 개인화기는 일제 38식, 99식에서 모두 M-1 소총으로 교체됐고 미24군 탄약고로부터 81㎜ 박격포와 60㎜ 박격포, 경기관총(LMG) 등이 속속 배급되었다.

진압군은 10월 23일 순천을 탈환했다. 27일 오후에야 여수읍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 반란군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는 여수지구 1천2백명, 순천지구 4백명에 달했다. 진압군에 의해 상당수의 반란군이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주력 1천명 가량이 포위망을 뚫고 지리산․백운산 방면으로 도주했다. 미 고문단은 게릴라를 섬멸하기 위해서 토벌사령관에게 소위 ‘4F전술’을 시달했다. 하우스만은 이 작전개념에 대해 ‘찾아서-고정시킨 후-싸워서-끝낸다’(Finding-Fixing-Fighting-Finishing)는 단어의 첫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용어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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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TS’ 마크를 단 조선경비사관 생도들이 무기점검을 받고 있다.

여순사건 직후 이승만의 지시로 전국적으로 숙군의 선풍이 일었다. 특별조사반을 이끈 김창룡(金昌龍)의 ‘활약’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1949년 7월에 막을 내린 이 대숙군의 결과 모두 4,749명의 장병이 처벌을 받았다.

여순 반란은 제주항쟁 진압에 대한 거부임과 동시에 그 지역 인민들과 좌익들이 자신들의 목표가 계속 좌절된 데서 비롯된 폭발이었다. 한 반란군측 신문은 미국의 점령에 대항해 '3년간의 투쟁'을 언급했고, 모든 미국인들이 즉각 한국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다. 진압을 조직하는 데 관계한 핵심인물인 제임스 하우스만은 순천의 경찰이 '본격적으로 복수하러 나섰고, 수감포로와 민간인들을 처형하고 있다........ 여러 명의 친정부 민간인들까지 이미 살해되었으며, 시민들은 우리가 적만큼이나 나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한 미국 국무부 관리는 수년 후에 쓴 글에서 이승만이 1949년에 창립한 '국민보도연맹'을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공세'에 크게 이용한 '교묘한 장치'라고 기술했다. 사실 그것은 정치범들을 수용할 강제수용소를 설치하고, 조금이라도 반정부 또는 좌익활동을 의심받는 사람들에게 '전향'과 '재교육' 활동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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