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후 칼럼] 신자유주의 넘어 공동체 재건으로

신자유주의가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는가. 1980년대 영국의 대처리즘이나 미국의 레이거노믹스가 강한 이미지로 다가오면서부터 윤곽이 드러난 것 같다. 그 이후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고 표준화한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을 우리 사회에 어떻게 도입할 것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1995년 1월에 세계 무역기구(WTO)가 공식 출범하고,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를 국가정책으로 공식 채택하면서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로부터 20년간 우리는 쌀과 금융시장 개방, OECD가입, 종신고용 체제를 허문 노동법 개정, IMF 위기, FTA 등을 경험했다.

이 기간 내내 국민들은 변화와 혁신, 개방과 경쟁, 생산성과 효율성, 규제개혁이라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들었다. 국가 경제는 재벌 등 기업이 주도하고, 정부는 기업의 투자 유치를 위하여 새로운 제도의 도입과 규제 철폐에 전력투구했다. 이러한 경제운용 결과, 경제규모는 커졌지만 양극화와 불평등의 심화, 성장 활력 감퇴 등 부작용을 낳았다. 성장의 과실은 대부분 기업으로 흘러가 기업소득 비중이 크게 증가하고 가계소득은 낮아졌다. 2014년 국민소득 3만달러를 대부분의 가계에 대입해 보면 통계가 얼마나 허망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국민에게 이데올로기로 각인되고 권력으로 작용하면서, 일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은 실종되었다. 정부는 개인의 경쟁력을 최대로 올리기 위해 성과제, 연봉제, 고용계약제, 정리해고제 등을 도입했다. 갑인 기업과 을인 노동자의 관계에서 갑의 권력은 강화되고, 을은 취약해졌다. 갑은 을의 생존 보장보다는 효율적이고 값싼 노동력을 사려고 한다. 갑이 비용을 낮추기 위해 을을 더욱 정교하게 쥐어짜는 구조가 정착된 것이다. 작년에 발생했던 ‘땅콩 회항’, 아파트경비원 자살, 발주처과 하청업체 간의 갈등, 해고노동자의 고공농성, 영화 ‘카트’ 등은 지난 20년 동안 갑을 관계가 어떻게 진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최고 갑인 기업은 세계 시장과 경쟁한다는 명분으로 정규직은 줄이고 ‘장그래’로 대변되는 저임금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했다. 작년에 850만명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을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힘들다. 저성장이 지속될수록 가장 큰 희생자는 ‘장그래’일 수 밖에 없다. 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비정규직 기간을 연장하는 종합대책이 실행된다면 기업은 핵심인력만 정규직으로 뽑고 대부분의 인력은 기간제 노동자를 사용할 가능성이 크다. 일자리가 더욱 불안해질거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혁신이 없으면 성장과 발전은 불가능하고 글로벌 경쟁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다”는 기업의 주장은 틀리지 않다. 혁신은 새로운 제도, 기술, 제품을 창출하거나 비용을 절감시켜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것을 뜻한다. 1인의 창의적인 혁신이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 그러나 IT 기술을 접목한 혁신이 진전될수록 인간의 노동을 줄이는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기업은 사람의 노동이 필요없는 무인 공장을 확충하는 혁신에 골몰하고 있다. 을이 영원히 배제당할지도 모르는 ‘인간없는 혁신’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신자유주의 지지자들은 성장을 위해서 을의 희생은 감수할 수 밖에 없으며 대등한 관계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갑을관계가 더 기울어진다면, 우리가 힘들여 만든 공동체에 심한 균열이 생겨 회복이 어려운 국면과 마주칠 수 있다. 갑은 시장의 자기 조정능력과 을의 권력 의존증, 부당한 요구에 순응하는 중독증이나 국민들의 선진국 콤플렉스, 애국주의, 이념 몰이에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작년 한해 갑질의 행태가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미세한 내용까지 알려져 많은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일부에서는 갑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을과의 관계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를 건다. 그러나 과도한 정보와 왜곡보도에 싫증을 낸 대중은 진실을 외면하고 을의 문제를 나의 고통이 아닌 타인의 고통으로 치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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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후 소통기획자.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와 갑을관계는 국민들의 삶을 일상적으로 지배하는 존재양식이 되었다. 이제는 돌격적인 세계화의 행진을 멈추고 ‘사람이 중심인 신자유주의’을 모색할 때이다. 1990년대만 해도 꿈을 꾸면 실현가능성이 있는 좋은 시절인 ‘벨 에포크’였지만 현재는 꿈은 꾸지만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시대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추진 결과를 성찰하고 드러난 문제점을 치열하게 논의하여 굳건한 공동체를 재건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갑오년이 가고 을미년이 왔다. 올해는 ‘갑의 시대가 가고 을의 시대가 왔다’는 꿈이라도 꾸어보자. /권영후 소통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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