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4·3칼럼> (39) 제2대 내무장관을 거쳐 국방장관을 역임한 신성모

신성모는 누구인가 

▲ 신성모.
‘제주도를 비롯하여 각 지방을 순시하고 돌아온 신성모 내무장관은 17일 제주도 사태와 지방행정 관청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주도사태 : “제주도에 간 것은 경찰과 국군보다도 일반주민의 사상(死傷)이 많다는 정보를 보고 대통령을 대신하여 간 것이었다. 해방 후 만 3년간에 걸쳐 황폐된 제주도 도민의 실정이란 말할 수 없이 험한 것이었다. 현재 무장하고 있는 공산당원은 100명 내지 400명이라고 추산되는데 그들은 한라산 산중에 뚫어 논 16개 동굴 속에 숨어있는 듯하다.

이들은 1~2개월 내에 숙청할 수 있다. 그들은 부락주민에게 식량을 요구하면서 주민을 기만하고 있는데 최근 일반 인민들은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를 않으니 폭행을 가하게 되어 일반도민의 사상이 격증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성능이 우수한 군함을 파견하여 해상으로 들어오는 폭도의 원조를 막아야겠다.(중략)’-조선중앙일보 1949년 1월 18일

‘1949년 3월 21일부/ 국무위원 이범석(李範奭) 원(願)에 의하여 겸직을 면(免)함/ 국무위원 신
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에 보함/ 내무부차관 김효석(金孝錫) 국무위원에 임함 내무부장관에 보함’-대한민국 관보(1949년)제68호 1949년 4월 2일

신성모(申性模,1891~1960)는 내무장관과 국방장관을 지냈다. 일명 낙루장관(落淚長官)이라 부른다. 이승만이 말할 때 오버하면서 울었다고 해서 생긴 별명이다. 이등병의 능력으로 국방장관의 임무를 수행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경상남도 의령 출신. 보성법률전문학교 졸업. 

경술국치를 당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신채호(申采浩)와 안희제(安熙濟)의 지도아래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2년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고, 신규식(申圭植) 등이 개설한 박달학원을 수학하였다. 동제사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결성된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 후원하기 위해 설립한 상회이자 무역회사였다. 1913년 상하이로 가서 오송상선학교(吳淞商船學校) 항해과를 수학한 뒤 남경해군사관학교에 편입학하였다. 남경해군사관학교를 수료한 뒤,  중국해군본부에서 해군원수 살진빙(薩鎭氷) 사령관의 전속부관장교로 근무하였다.

1915년 군사시설인 무선전신국에서 활동하였고, 신한청년당에 가담하였다. 1919년에 북경에서 김복희와 결혼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일하였다. 같은 해 미국에 있던 이승만(李承晩)이 미국 대통령 토마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에게 조선에 대한 미국의 위임통치 청원을 서면 제출한 데 분개하여, 박용만(朴容萬)·신숙(申肅)과 함께 이승만 성토문을 발송하였다. 이후 신채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는 운동에 가담하였다.
 
1921년 비밀리에 조선으로 들어와 죽마고우인 이우식(李祐植)을 만나 학비후원자를 소개받기도 했다. 1923년 임시정부의 비밀 연락처이던 백산상회에의 독립자금 전달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었다. 1925년 석방되자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항해대학에서 수학, 1등 항해사자격을 얻었다. 1927년에는 베를린 대학을 졸업한 이극로(李克魯)와 함께 독일의 라인 지방의 공장도시와 프랑스내 제1차 세계 대전의 격전지 베르덩 요새, 파리 시내 등을 여행하고, 영국 런던으로 가서 1년간 항해대학 기숙사에서 1년간 생활하였다.

1930년부터 런던과 인도를 왕래하는 정기화객선의 선장이 되었고,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설치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그에게 임정 군사위원직을 특별 임명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귀국을 포기하고 인도 상선회사의 고문으로 봄베이에서 체류하다가 1947년 이극로에 의해 경향신문에 항해대왕으로 소개되었다. 1948년 8월초 동아일보에 그의 근황에 대한 기사가 계속 보도되었고, 11월에야 배편으로 환국하였다.

귀국 후 반이승만에서 친이승만 인사가 되었고, 대한청년단(약칭 한청)을 조직하고 단장을 했다. 최고위원은 장택상·지청천·전진한· 노태준·유진산· 서상천·  강낙원으로 단장은 신성모, 건설국장 겸 감찰부국장은 김두한이었다. 한청 총재를 이승만으로 추대했고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에 절대복종한다."고 선언문에 썼다. 

1949년 제2대 내무장관을 거쳐 국방장관을 역임하고, 1950년 4월 21일부터 11월 22일까지 국무총리 서리를 지냈다. 국방부장관이면서 국방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재직 시기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초기에 대응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1951년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둘러싸고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김종원(金宗元)과 함께 사건을 합리화시키고 있다는 국회의 비난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 세칭 국민방위군사건이 발생하여 국회에 의하여 해임되었다. 

1956년 11월 28일부터 해양대학장을 역임하다가  병을 얻어 와병하던 중, 1960년 5월 29일에 의령에서 뇌출혈로 죽었다.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선영에 묻혔다가 뒤에 대전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 한라산 곳곳에서 발견되는 깨진 솥단지 등 생활용품.


'신성모 내무장관은 21일 국회 제59차 회의와 기자단 회견 석상에서 제주도 사태에 관한 시찰보고를 하였는데 두 군데에서 한 보고를 종합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내가 귀국하기 전에 영국 런던에 있을 때에도 제주도 사태에 관해서는 들은 바 있었고 귀국 후에도 앞서 제1차 시찰을 할 때에도 별로 대수롭지 않으려니 하였던 것인데 최근 정보에 의하면 사태는 수습되지 않을뿐더러 외국선박의 왕래가 있다는 보고를 듣게 됨에 이번에는 근본대책을 강구하려 시찰을 갔던 것이다. 폭도의 수효는 일설에는 150명 내지 600명 가량이니 하고 있는데 그들은 훌륭한 군사훈련과 무기를 소지하고 있어 민중의 6,000명이나 6만 명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며 그들을 원조해주는 민중들이 또한 7,000명서 1만 5,000명 가량은 되는 줄로 생각된다.

그러나 국군과 경찰은 일치 협력해서 폭도의 출몰을 근절하고자 계획적으로 토벌을 개시하고 있는데 아직도 각 부락에는 그들에게 동정하는 자들이 있어 식량공급 등 연락을 취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가 갔을 때에만 하여도 제주도 동포들은 두 사람이 길을 걸어도 서로 얼굴을 쳐다보거나 말조차 하지 않고 땅만 보고 다니는 형편으로 비참한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달 25일까지 투항하면 관대히 대처하여 처벌치 않을 것이니 동 시일까지 귀순하라는 전단을 산포하였다. 그런데 아직도 모국(某國)의 배가 왕왕 다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하는데 상선인지 군함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나 폭도들은 그들로부터 물자나 무기 등의 원조를 받고 있지 않나 생각되는 바 남한 연안에는 수천 개의 섬이 있는 만큼 제주도의 사태를 근본적으로 수습치 않으면 민국정부의 장래가 매우 위험시되는 바다. 현재 나는 내무장관이라는 직책에 있지만 나는 항상 말하기를 5,000톤 짜리의 배 한 척만 주면 제주도의 사태고 38선도 나의 전력을 다해서 힘쓸 것이거늘 내무장관이란 자리를 뒤집어 씌워놔서 할 일도 못하고 있다.

도대체 제주도 사태가 오늘까지 이렇게 된 것은 과거의 군과 경찰이 도민에 대한 태도가 불순하여 도민들은 차라리 산에 올라가 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 산으로 올라간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 만족하였으며 그리고 도민들이 겁을 먹고 있는데 그 이유를 알아보니 장(場)이 서던 것을 당국에서 못보게 하고 야간 통행금지 시간이 길며 부산까지 가서 1년이면 근 10만원 돈이나 벌어가지고 오는 해녀들의 출어를 금지한 까닭이었으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시하여 실시시켰다. 이러한 판국에 제주도로부터 그 귀중한 양곡이나 소, 혹은 말 등을 서울서 이름높은 모 대관들이 명함에다 도장까지 찍어 돈벌기 위하여 수출시키고 있음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것도 앞으로 내오지 못하게 하였다.'-조선일보 1949년 3월 22일

제주4·3과 신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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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제31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왼쪽은 이승만, 가운데는 총리 신성모, 오른쪽은 서울시장 윤보선)
‘한국군은 굶주림을 초래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사주된 집단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울발 3월 14일】 남한의 군대는 남한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공산게릴라에 대한 춘계공세를 시작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어제 군대 지휘관들에게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명령하에 촌락에서 식량을 빼앗고 마을을 불태우는 반도들을 사로잡거나 제거하라고 명령하였다. 동시에 이 대통령은 수천명의 폭도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위하여 남한에서 50마일 떨어져 있는 폐허의 제주도에 국무총리겸 국방장관 이범석과 내무장관 신성모를 파견하였다.

정부 소식통은 오늘 반란행위로 인하여 섬이 마비되었고 25만명의 섬주민 대부분은 깊은 섬 내부지역에서 해안마을로 강제이주되었다고 말했다. 정부대변인은 지난 여름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사살한 섬주민의 총수는 모두 1만 5,000명이며 1만여채의 가옥이 화재로 파괴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미국의)콜럼비아 교단의 카톨릭 선교사 오스틴 스위니(Austin Sweeney) 신부는 어제 서울로 보낸 편지에서 제주도민 대부분이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전했다.

일부 지역에서 주민들이 하루에 감자 한 개로 연명하고 있다고 스위니 신부는 편지에 적고 있다. 제주도에 10년 이상 거주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스위니 신부는 농부들은 섬 내륙의 농토를 버리고 섬의 몇 개 안되는 큰 해안가 마을로 이주하였다고 전했다. 섬의 반도들은 본토에 위치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운용되는 기지로부터 비밀리에 왕복운항되는 소형 선박에 의하여 잘 보급되는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자가 지배하고 있는 북한 라디오 방송은 주말 동안에 반복적으로 제주섬에서의 반란활동의 성공을 자랑하면서 “인민의 저항이 증가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

한편 남한의 군대는 남쪽해안 근처에 위치한 본토의 전남 지리산 부근의 반란세력의 중심부와 소규모 전투를 보고하였다. 남한군대는 대량공세로 지난 주 53명의 반도들을 사살하였고 다량의 무기와 군수품을 노획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반도들의 공격하고 도망치는 전략은 산속의 진지로부터 전광석화같은 야간기습을 감행하여 농촌의 촌락을 계속 괴롭히고 있다. 전투의 중심부는 10월 여순반란의 장소인 순천의 북부 40마일 지점인 것으로 보고되었다.’-『뉴욕타임즈』 1949년 3월 15일  

영국 상선의 선장이었던 신성모, ‘캡틴 신’은 이승만의 부름을 받아 귀국한다. 1948년 10월 제주4·3사건의 와중에 제주를 방문하고, 귀경하자마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잔인하고 가혹한 대량학살이 시작된다. 1949년 1월 그는 내무장관으로 발탁되었다. 국무총리 서리도 겸하도록 하는 등 막강한 실세로 등장시켰다. 

제주4·3항쟁 당시 국무회의록에 의하면, 이승만은 각 부처에 ‘어떤 가혹한 수단을 써서라도 제주사건을 탄압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목적은 ‘미국의 원조’를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1949년 5월 22일 이승만은 제주사건을 진압하고 맥아더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제주도와 기타 오염된 지역을 완전히 소탕하는데 우리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였다. 그러나 이런 대청소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면 계속해서 해안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쾌속정, 비행기, 해안선을 경비할 중형선박들이 필요하다. 이것들이 없이는 공산주의자들을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주한 미 대사도 이 무렵 본국 국무성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섬인 제주도에서 게릴라들이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도록 척결한 것을 보고하게 되어 가장 기쁘게 여긴다….”제주사건 결과, 양민 약 3만 명이 희생되고 제주도 전역이 ‘초토화’되고 말았다. 포로된 자와 귀순한 자 등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더러는 사형시켰고, 약 3천명의 제주사람들에게 중형을 지워 육지 형무소로 분산 수감했다. 이승만은 서청을 군인과 경찰로 전격 교체하는 일에 앞장섰다. 미 정보보고서는 ‘청년단, 군대와 경찰을 강화시키다’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보고에 의하면 최근 대통령(이승만)과 내무부장관(신성모)의 합의에 따라 서북청년 단원들이 한국군에 6,500명, 국립경찰에 1,700명이 공급될 예정이다. 이들은 남한 전역에 있는 9개 경비대와 각 경찰청에 배정될 것이다. 모든 단체들간의 상호합의에 따라, 서북청년회는 경찰에서 단원 20명당 경사 1명, 50명당 경위 1명, 2백명당 경감 1명 등의 비율로 경사급과 간부급 요원으로 배치하도록 합의돼 있다.’-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05, December 6, 1948.

제주도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극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제민일보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에 따르면 초토화작전 당시 중앙의 군․경 수뇌부는 다음과 같다. 당시 군․경의 수뇌부라는 점에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 수뇌부 가운데 신성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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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모, 신규식, 신건식.

△콜터 장군(John B. Coulter)=주한미군사령관 겸 미24군단장(1948. 8. 27~1949. 1. 15).

△로버츠 준장(William L. Roberts)=통위부 고문관(1948. 5. 20~1948. 8. 24), 임시군사고문단(PMAG) 단장(1948. 8. 26~1949. 6. 30), 주한미군사령관 겸임(1949. 1. 15~1949. 6. 30), 미군철수 후엔 군사고문단(KMAG) 단장(1949. 7. 1~50. 6)

△이범석(李範奭, 총리 겸 국방장관)=1900년 서울 생. 광복군 참모장,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사령관. 해방 후 민족청년단 단장. 초대 국무총리(1948. 8~50. 4), 초대 국방장관을 겸임했으나 1949년 3월부터는 국방장관에 신성모(申性模)가 임명됨에 따라 총리직만을 수행.

△이응준(李應俊, 총참모장, 준장)=1890년 평남 생. 일본육사 26기, 일본군 대좌(대령).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 졸, 정부수립 후 초대 총참모장. 체신부장관 역임.

△윤치영(尹致暎, 내무부장관)=재임기간 1948. 8~1948. 12 △신성모(申性模, 내무부장관)=재임기간 1948. 12~1949. 3 △문봉제(文鳳濟, 서북청년단장)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자행된 각 형무소의 수형인 처형 및 예비검속자 대량학살은 모두 신성모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직에 있을 때 행해졌다. 제주4·3 재소자와 예비검속자의 집단학살 최종책임자는 과연 누구였는가? 당시 제주경찰서에 수감된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명령 및 집행은 육군본부정보국 제주지구CIC와 당시 제주지역 계엄군인 해병대, 그리고 제주경찰국에 의해 이뤄졌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건으로 제주주둔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 중령 김두찬이 1950년 8월30일 성산포 경찰서에 내린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이 유일하다.

'수제건(首題件)에 관하여 본도에 계엄령 실시 이후 현재까지 귀서에 예비구속 중인 D급(*가장 중요한다) 및 C급(중요한자)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하여는 귀서에서 총살 집행 후 그 결과를 내(來)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자이(玆以) 의뢰함'-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429쪽

육군본부 정부국에서 총살명령을 내렸고, 실제 이를 집행한 곳은 지역 주둔 계엄군과 경찰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해군포항경비부 사령관이었던 남상휘 예비역 준장의 증언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총살명령은 신성모가 내린 것이다.

‘남상휘 예비역 준장은 1950년 초 자신의 명령으로 경주·포항·영덕 일원에서 예비검속된 주민 200여명을 군함에 태워 바다로 나가 총살한 뒤 모두 수장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독자적으로 총살명령을 내린 게 아니라, 신성모 국방부장관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다고 하였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430쪽

‘1949년 4월 9일 <항공우편> A-127호 (NO. A-127, 1949. 4. 9. 보고)/ 제주도 소탕작전 상황/ 발신: 특별대사 무쵸(Muccio)/ 수신: 국무장관/ 국방부장관 신성모(Shin Sung Mo)는 게릴라들이 완전히 소탕되고 질서가 회복될 때까지 (제주도에)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명령을 받은 채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요청으로 지금 제주도에 있다. 이전에 신성모 장관은 그가 내무부장관이었을 때 유사한 지시를 받아왔지만 국방부장관직을 맡기 위해 서울로 복귀했었다. 이번 주 초에 그가 출발하기 앞서 그는 신뢰감이 덜 하고 겁이 더 많은 경찰 대신에 육군 습격부대들과 작전을 하고 있기 때문에 게릴라 소탕은 더욱 더 쉬워질 것이라고 진술했다.

사실상 그는 반군들이 그들의 산악 본거지에 포위되어 있으며 더 오랫동안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도에서의 전투는 오랜 기간 산발적으로 있어 왔다. 평양라디오방송은 지난 해 4월 3일 시작되었던 제주도에서의 ‘빨치산’투쟁 1주년 기념 축하를 장기간 프로그램을 내보내는데 전력했다. 모스크바와 하바로프스크(Khabarovsk)의 유사한 한국어 방송들은 미군 부대들이 철수하자마자 남한전역을 휩쓸기로 예정되어 있는 광범위한 무장 저항의 전조로서 제주도 폭동을 언급하였다. 제주도가 남한에 혼란을 퍼뜨리고 테러를 가하기 위한 소련의 주요한 노력의 장소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소련의 통제를 받은 라디오 방송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선전의 본질로부터 분명해진다.

이것(남한에 혼란을 퍼뜨리고 테러를 가하기 위한 소련의 노력)은 제주도 북쪽의 한반도 육지부인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에서 지속적이고도 유사한 작전으로 지속되었다. 대한민국 후방 지역의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소요와 불안정을 제거하기 위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여 공산주의자들이 한국 무대에서 영속시키고자 했던 대량학살의 싸움에 38선의 방위군 부대들을 소모시키지 말아야 한다. 소련요원들이 큰 난관없이 제주도에 침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신성모 장관은 그들 가운데 다수가 북한으로부터 소형 어선 편으로 (제주도에)도착했다고 주장했다.

신성모는 한국 해안경비대(the Korean Coast Guard)가 제주도 해안을 순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현재 해안경비대 함정의 소규모 승무원으로서는 (제주도의) 빈틈없는 봉쇄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국무총리와 신성모 장관 사이에서 특히 국회의 토론에서 논쟁거리로 존재했을 동안에도 제주도 주위에 소련함선과 잠수함들이 맴돌고 있다는 지속적인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수행된 작전들을 담은 사진들은 정부군과 게릴라군 양측 모두의 유별난 가학적인 성향을 시사해준다. 보고되어 온 현저한 잔학 행위는 폭넓게 확산된 약탈과 방화에 동반하여 여자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마을 주민의 대량학살을 지적해 주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육군이 비무장 마을 주민들에게 보복을 감행했던 게릴라들에게 보복작전을 수행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지난 일요일 한 평양방송은 제주도에서의 투쟁에 괴뢰 인민공화국의 직접적인 관심을 몹시 드러내고 있었다. 원문대로, 다음과 같이 진술되어 있다. “더욱이 그들(제주도 게릴라들)은 김일성 주석의 영도 하에 완전한 민주적 토대가 한국의 북반부에 건설되었다는 사실과 우리들의 배후에는 강력한 소련이 있다는 사실에 의해 그들의 투쟁에 고무되어 있다. 또한 제주도 사람들은 강력한 하나의 인민연합전선을 가지고 있다.” “제주도의 무장 게릴라들의 활동은 (북한) 공화국의 중앙정부(Central Govern -ment)의 설립 이후에 한층 강화되었다.” 무쵸(Muccio)‘-주한미사절단 및 주한미대사관(American Mission in Korea & American Embassy in Korea)

반도사령관 이덕구 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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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순자들을 집단으로 수용했던 제주항 부근의 주정공장 모습.

‘【제주발 합동】제주도 반도사령관 이덕구(李德九)는 지난 7일 경찰부대에게 사살되었다. 즉 제주경찰서 화북지서 김영주(金英柱)경사가 지휘하는 경찰부대는 지난 7일 오후 4시경 속칭 작은가오리 부근 정글 속에서 반도사령관 이덕구 부대와 교전 끝에 이덕구를 사살하는 한편 그의 보신부하 1명을 포로하였다 하는데 동시 이덕구 사체는 방금 제주경찰서에서 보관하고 있다 한다.’-『東光新聞』, 1949년 6월 11일.

1949년 3월 설치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산악소탕전’과 ‘귀순공작’의 결과 무장대 세력은 거의 궤멸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1949년 4월 7일 제주를 시찰한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전투사령부로부터 “수일 전에도 산중 적비(赤匪)의 중요간부 다수가 귀순하였는데 그들이 진술한 바와 아등(我等)이 정찰 판단한 결과를 종합하여 보면, 현재 남아 있는 무장폭도는 40~50명에 불과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 무렵 한 언론은 “3월에 이르러는 이덕구 이하 20여 명이 무기를 땅에 묻고 분산하는 운명에 빠졌으며 서로가 투항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무장대 출신 포로의 말을 전했다. 4월 중순경에는 무장대 간부급이 사살 혹은 생포됨으로써 무장대 세력이 실질적으로 와해되었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보도대장 이창정(李昌禎) 소령은 4월 21일 드디어 남로당 제주도 김용관(金用寬) 최고간부 다수를 사살했다. 1949년 6월 7일 하오 4시경. 623고지에서 무장대 총책 이덕구가 사살됐다. 그의 연락병 2명도 체포하였다. 

경찰은 이덕구의 사체를 나무 십자가에 묶어 하룻동안 제주경찰서 정문 앞에 전시했다가 화장 처리했다. 시신은 관자놀이에 총알 1발 맞은 것 외에는 깨끗했다. 장마철에 아침부터 매달아 놓으니 저녁때쯤 되니 냄새가 많이 났기 때문이다. 경찰은 남수각에서 시신을 화장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비가 많이 와서 다 쓸어가 버리는 바람에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 폐허가 되었던 마을들이 복구되기 시작했다.(1949년)

한국전쟁 전후 

‘【서울 AP합동】일본 제5공군사령관 얼.E.파트리치 소장과 동 부관 패트릭.W.팀머레이크 대장(代將) 및 알래스카 비행장 사령관 올리버.피쳐 대장(代將) 등 미국 장성 일행이 지난주일 일본으로부터 공로(空路) 제주도에 도착하여 2일간에 걸쳐 사냥을 하였는데 때마침 주한미대사 존.T.무쵸씨 및 국방장관 신성모(申性模)씨는 제주도 방위에 당하고 있는 한국해군을 시찰하였다. 한편 북한 평양방송은 미 장성 일행의 사냥 여행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제주도를 미국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려는 증거인 것이라고 방송하였다.

그런데 현재 제주도에는 한 명의 미국인 고문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평양방송은 “미국인들은 그들이 아메리칸 인디안에 행한 것과 같은 행위를 도민에게 행하여 도민을 학살하려하고 있으나 도민들은 미국인 및 모든 한국인에 대하여 조전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한편 제주도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테러리즘은 지난 봄 국군에 의하여 수백 명이 사살된 후 완전소탕 되었다. 무쵸 대사가 언명한 바에 의하면 제주도는 현재 평온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지난봄 억류소에 감금되어 있던 만 명 가량의 도민은 모두 석방되고 현재는 불과 280명으로 되어 있다하며 또한 소실된 몇몇 부락은 복구되었다고 말하였다.’-서울신문 1950년 1월 8일

신성모는 1950년 4월 21일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하여 11월 22일까지 근무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개전 초기, 그는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전황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발언했다. 그는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있었지만 이범석, 지청천, 김홍일 등과 달리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한 실전경험이 없었고, 환국 이전까지 해양선박 관련 업무와 통신관련, 통역관련 일에 종사하였으므로 군사 지식은 전무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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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관후 시인·소설가.

게다가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시켜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게 했으나 정작 이 사건으로 많은 인명피해와 포로가 발생하자 신성모는 모든 책임을 그의 명령에 의해 움직였을 뿐인 최창식 대령에게 뒤집어 씌우고 면피용으로 최창식 대령을 작전비행죄(作戰非行罪) 혐의로 총살시켰다. / 김관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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