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㉒>

가: 커어! 술맛 좋다. 낮술이어서 그런지 몇 잔에 벌써 알딸딸하네.
나: 그래서 ‘낮술에 취하면 애비도 몰라본다’고 하잖냐. 헌데, 이 속담 과학적 근거가 있더라고.
가: 근거라니?
나: 낮엔 신진대사가 활발하기 때문에 알콜 흡수가 밤보다 더 빠르고, 뇌의 반응도 더 예민해진다는 거야.

가: 탈무드에 ‘사흘에 한 번 마시는 술은 금(金)이고, 밤술은 은(銀)이며 낮술은 독(毒)과 같다’고 했어.
나: 한자는 상형문자이고 회의(會意) 문자잖아? 술 주(酒)를 해자(解字)하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해. 첫째가 술은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마시는 물이고, 둘째는 닭(酉)이 물마시듯 천천히 한 모금씩 들이키는 물이라는 뜻이지.
가: 얌마, 그런 놈이 걸핏하면 원 샷, 원 샷 하며 나대는 거야!
나: 그건 술판을 빨리 끝내려는 꼼수지, 뭐. 근데 너 요즘도 술 많이 마시냐?
가: 거의 매일이지 뭐.
나: 야야, 나이를 생각해라. 이거 앞에 ‘장사(壯士)없다’는 말이 있어. 이거 세 가지는? (…)술·매·세월이야. 천하의 장사도 매일 술 퍼먹으면 마흔 전에 꼬꾸라지고, 태형 백 대에 척추 부러져 반신불수가 되고, 늙으면 힘 빠지게 돼 있다구.

가: 주색잡기(酒色雜技)에서 왜 주(酒)가 맨 앞에 놓일까? 술이 세상 즐거움의 으뜸이기 때문이야. 술은 섹스보다 더 달콤해.
나: 너 아주 술꾼 다 됐구나. 술꾼에도 등급이 있어. 맨 아래가 주광(酒狂), 주정뱅이지. 그 위가 주객(酒客), 1주일에 한 번 마시는 사람. 그 위가 주당(酒黨), 1주일에 3회 이상 마시는 자. 그 위가 주선(酒仙), 3대 不問(안주·주류·상대를 가리지 않음)을 외치는 자. 최상급이 주성(酒聖), 5대 不問(안주·주류·상대+시간·장소를 가리지 않음)을 지키는 자.
가: 넌 어느 등급인데?
나: 나? 나야 주성급이지.
가: X같은 자식. 니가 정녕 주성이라면 비 오는 날 밤, 공동묘지에 가서 귀신들하고 술 처먹어!
나: 다 좋은데 넌 술만 들어갔다 하면 저질스런 쌍욕이 막 나오더라.
가: XX 놈! 혼자 고상한 척 똥폼 좀 잡지 마. 구역질난다.

나: 화제를 돌리자. 너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희곡 읽어 봤어?
    내 생애 단 한번만이라도 그런 사랑 해보고 싶다.
가: 놀고 있네. 난데없이 웬 사랑 타령? 너 혹시 복상사(腹上死)하고 싶냐?
나: 아니, 온 몸을 불태우는 사랑을 하고 싶어.
가: 주접떨고 있네. 아, 이제야 생각났다. 너, 고2 때 나한테 씨불였던 말 기억나? “헐리우드 육체파 여배우 소피아 로렌과 하룻밤만 잘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하면서 헬렐레…침 흘렸지. 우리 집 암캐 이름이 소피아다. 같이 놀아라.
나: 샷따 마우스! 아가리 닥쳐라. 사나이 대장부가 흘리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액체는?(…) 침·눈물·오줌이야. 또 하나 묻자. 카사노바와 돈주앙의 차이점 세 가지는?(…) 넌 아는 게 별로 없구나. 하기야 모르는 게 약이지. 돈주앙이 지저분한 오입쟁이라면 카사노바는 신사적이고 멋진 로맨티스트였어. 카사노바 형님이야말로 나의 우상이었지.
가: 지랄 염병 육갑 떨고 있네. 야! 이 후랑말코 같은 자식아, 니가 진정 호모사피엔스냐? 그 쓰레기 같은 인간이 우상이라고?
나: 내 맘이다, 어쩔래? 그런데 말이야…요즘 술만 마시면 옛날 내가 사랑했던 기집애들이 떠올라 미치겠어. 숙이, 옥이, 선이, 희야, 자야…다들 잘 있겠지?
가: 흐음, 니가 짝사랑했던 여자들 명단이구나. 이제 쭈그렁 할망구가 돼 있겠지.
나: 아아, 사무치게 보고 싶구나. 눈물 나게 보고 싶어라!
가: 야! 이 찌질한 놈아,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기고 싶다면 사무친 그리움 따위는 접어라. 만나는 순간… 환상이 깨지면 환멸이 되는거야.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사내는 떠나간 가스나, 잊지 못하는 녀석이라구.

나: 끄-윽! 오늘 너무 취했다. 운동 나온 길이라 지갑을 두고 왔네. 먼저 갈 테니 나중에 계산하고 가.
가: 잠깐! 나도 추리닝 바람으로 나와서 무일푼이다. 우리, 옛날 방식으로 해결하자.
나: 옛날 방식이라니?
가: 40년 전, 서울 신촌시장에서 돈 없이 술 먹다가 술집에 인질로 남을 사람을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하지 않았나?

나: 그래, 생각난다. 그땐 내가 졌지. 볼모로 잡혀 있던 내가 주인 몰래 줄행랑을 치다가 시장통 우물에 빠졌어. 사람들은 내가 죽은 줄 알고 경찰에 신고했지. 앵앵~ 사이렌을 울리며 백차가 왔고 난 거적 데기에 덮여 병원으로 이송됐어. 세브란스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지목된 나는 이화여대 교문 앞에 무참히 버려졌지. 마침 그때 채플시간이 끝난 이대생들이 교문 밖으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더군. 꽃다운 처녀들이 맨발로 거지꼴이 된 날 연민의 시선으로 쳐다봤지. 그 참을 수 없이 부끄러운 순간에도 난 그 빨간 앵두들을 마음으로 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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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일홍 극작가.
가: 사설이 길구나. 인생은 언제나 서바이벌 게임이란 걸 잊지 마.
나: 오냐, 좋다. 기필코 이번엔 패배하지 않아. 꼭 복수하고 말 테다. 자, 지체없이 칼을 뽑아라!
가: 가위 바위 보!
나: 가위 바위 보…으악! / 장일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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