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학생문예작품 최우수상 - 신성여고 2학년 강수경

 지금은 아무도 갈 수 없는, 함부로 갈 수 없는 금지구역이 되어버린 다랑쉬 굴. 그리고 사람들의 걸음과 흔적으로 상처받고 짓밟힌 다랑쉬 오름. 50여년 전 그 곳에선 내 할머니 가슴에 무덤 생기고 말았다. 몇 해 전에야 나는 할머니의 가슴 속 무덤에 난 수부룩한 잡초를 깎아드릴 수 있었다.

 우리 집에는 이상한 제사가 하나 있다. 대부분 제사들은 집에서 자정이 되어 가면 예의를 갖춰서 제를 지내지만 이 제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 가족은 4월 초가 되면 다 같이 한 손에는 국화꽃 한 다발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소주 한 병을 들고 화북에 있는 한 해안가로 향한다. 도착 전 쓰러져 가는 작은 구멍가게에 들러 상표도 제대로 붙지 않는 사탕을 봉지 채 산다. 그리고 바다에 도착하면 아무 말 없이 정말이지 그렇게 조용하고 어두울 수 없는 그런 야릇한 분위기로 꽃을 뿌리고, 소주 한 잔 바다에 뿌리고, 사탕 몇 알 바다를 향해 던진다. 나의 할머니가!

 그렇게 몇 분이 흐르면 할머니는 남은 소주를 병째 들고 마신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그리고 가슴 속에서 덩어리를 통째로 뽑아내기라도 하듯 가슴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통곡을 하신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외친다.
  “그만 울련다. 물결 따라 세상 구경하거라”
  “또 또 또 그 소리. 매일 그만 우시겠다 하시면서 왜 자꾸 우세요!”

 아버지는 할머니를 나무라듯 내뱉으며 할머니를 껴안아 드린다. 이것이 우리 집 이상한 제사의 순서이다. 몰랐었다. 우리 가족이 매년 4월이면 해안가에 가서 꽃을 뿌리며 우는 이유를….
 어린 나는 단지 바다에 꽃을 뿌리는 게 재미있었고, 아름다운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는 해안가에서 노는 것이 신났을 뿐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나는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라는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다랑쉬 굴에서 발견된 4.3의 희생자들의 유골이 모두 다 강제 화장 되어져버렸다는 것! 그 속에 우리 할머니의 어린 딸, 우리 아버지의 막내 여동생이 있었다는 놀랍고도 슬프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알게 돼 버렸다.
 
 그 순간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숙제로 4.3사건에 대해 조사하게 돼서 아버지께 여쭈어 보면 이상스레 아버지께선 화를 내시거나, 짜증을 내시면서 “알 필요 없으니까 물어보지마! 그 숙제 안 해가도 좋아” 라고 하셨던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매년 4월 초면 가족끼리 해안가로 가서 지내던 제사가 생각났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4.3사건으로 인해 사라져 버린 마을에 대한 기록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내 가족의 묻어버린 슬픈 이야기를 찾아 읽는 듯해서 가슴이 져리고 져렸다. 눈물이 쏟아져 흘렀다. 할머니의 가슴을 쥐어뜯는 그 행동을 내가 똑같이 따라하고 있었다. 어른들의 이야기가, 지나버린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의 가족의 이야기였으며,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였다. 과거가 아니었고, 증언이며 기억이 아닌 현재였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할머니 생각이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책을 덮고 할머니를 뵈러 갔다. 행여 할머니의 아픈 가슴을 후비는 것은 아닐까 너무 걱정이 되었지만, 나는 우선 그동안 이상한 제사가 벌어질 때마다 장난치고, 핑계대면서 빠졌던 나의 철없던 행동을 사죄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이기적인 나!

 갑작스럽게 찾아 온 손녀의 등장에 할머니는 놀라셨고 나는 어떻게 입을 뗄까 망설이다가 할머니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할머니, 저 오늘 책을 읽었어요. 그런데 4.3에 관련된 이야기에요! 다랑쉬…”

 할머니의 떨림이 심하게 느껴졌다. 조팝꽃처럼 메마른 할머니의 손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
 “그래...그래...”
 “4.3때 네 할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우리 가족은 모두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지…. 그 때 내 셋째아이, 그러니까 너의 작은 고모였단다. 나이가 2살이 채 되지 않았었단다. 우리 가족은 도망다니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떤 한 동굴에 숨어 있었단다. 그곳이 다랑쉬 동굴이었지. 며칠이나 있었을까? 먹을 것도 떨어지고 사람들 모두 지쳐있었단다. 그 때 네 할아버지가 음식을 구해 오겠다고 길을 나서려 하는 거야! 혼자가게 내버려 둘 수 없어서 나도 같이 간다고 했지. 그러자 네 아비와 고모도 따라 가겠다고 마구 조르는 거야.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데리고 가기로 했지. 하지만 차마 2살도 안 된 아기는 데리고 갈 수 없었단다. 그래서 그 아이를 옆에 계시던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우리 4명과 몇몇 사람은 음식을 찾으러 굴을 나왔지. 겨우겨우 음식을 구해 굴로 돌아왔는데 글쎄…….”

 그것이 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젖먹이 막내 딸 나의 막내 고모는 세상과 인연을 끊었고, 빨갱이니 뭐니 무섭고 살벌했던 시간은 동굴 속에 가족들이 뼈만 앙상하게 남는 유골이 될 때까지도 찾을 수도, 무덤 하나도 만들어 줄 수 없게 했던 것이다.

 할머니는 크게 호흡을 한 번 하셨다.
 “잊고 살려고 했지! 잊으려 한다고 잊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살아가려니 어쩔 수 있나. 그냥 마음속에 무덤 하나 짓고 거기 내 애기 묻어놓고 그렇게 살았지! 그런데 어느 날 다랑쉬 굴에서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했단다. 그러나 거기에서 발견 된 유골들은 모두 강제로 화장시켜졌고 바닷가에 뿌려졌지... ”

 할머니의 얘기가 끝났을 때 할머니의 눈에는 물론 나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왜 가족들이 4·3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예민하게 행동하였는지, 4월 초가 되면 바다에 그 이상한 제사를 지냈는지 나는 알게 된 것이다.
 그날 나는 할머니와 함께 밤을 지냈다. 그리곤 다음 날 할머니께서 바다에 가자고 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나의 막내 고모,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의 막내 고모를 만나고 싶었다.

 “너헌티 좋은 집 하나 못 해줭 뜨거운 디서 죽게 해쭈만은 이제 세상 좋아져그넹 너 얘기 속시원히 허멍 다닌다. 아가야, 이제 어멍 그만 울련다. 살아서 못 본 세상 이제 보멍 살아라.”
 “할머니!”
 “아이고 우리 손지! 너네 고모 너 다 보암실꺼여! 이제 너네 고모 이야기 너헌테 해시난 너도 이제 막내 고모 생각허망 살라이?”
 “아이고, 아가야! 족헌 우리 아! 울지말라! 너랑 울지 말앙 속시원히 물결 따라 세상 구경허멍 살라! 호썰 이시민 이 어멍 너헌티 갈꺼 아냐! 울지 말라. 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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