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42)치안국장을 역임하고 육군헌병대장으로 전역한 홍순봉 

홍순봉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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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순봉.
‘제9경찰청(제주도)장 김봉호(金鳳昊)씨는 5일 부로 사임하고 그 후임에는 공안과장 홍순봉(洪淳鳳)씨가 임명되었다 한다.’-조선일보 1948년 10월 6일

‘육본 특별명령 제131호(1949년 6월 29일) 국방부장관 신성모/ 1. 이익흥(李益興) 15111 임 육군 헌병 소령/ 홍순봉(洪淳鳳) 15112 임 육군 헌병 소령/ 안익조 15113 임 육군 헌병 소령/ 김정채 15114  임 육군 헌병 대위/ 김홍걸 15115   임 육군 헌병 대위/ 백원교 15116  임 육군 헌병 대위/ 박경후 15117   임 육군 헌병 대위/1949년 7월 1일부’-육본 특별명령 제131호(1949년 6월 29일)

홍순봉(洪淳鳳, 大村裕造, 1898년 4월 14일 ~ ?, 평남 대동)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 겸 만주국 관료이자 해방이후 대한민국의 경찰이다. 평안남도 대동군 남형제산면 태생. 1916년부터 남형제산 면서기와 서천면 수석 서기를 역임했다. 그 후 순사시험에 합격하고 평양경찰서 위생계 내근 순사로 근무했다. 1922년 경부시험에 합격한 뒤부터 평양경찰서 순사부장을 역임했다. 평안북도 경부로 재직 중이던 1931년 만주사변 당시 국경 제1선에서 항일운동 세력을 진압하는 한편 일본군의 군수품 수송 지원, 피난민 구호, 국방헌금 및 애국기 헌납 등에 협조했다. 1934년 3월 1일 만주사변에 협력한 공로로 만주국 건국공로장을 받았으며, 동년 4월 29일 일본정부로부터 만주사변 종군기장을 받았다.

1935년 만주로 이주한 뒤부터 만주국 빈장 성(빈강성) 속관, 규화고장(1935년 ~ 1937년), 젠다오 성(간도성) 경무청 사무관, 특고고장 겸 보안고장(1937년), 젠다오 성(간도성) 경무청 사무관 겸 경정(1939년 7월 27일)을 역임했으며, 1941년 7월 1일부터 1943년 9월까지 젠다오 성(간도성) 경무청 이사관 겸 쓰핑 성(사평성) 경무청 보안과장을 역임했다.

1939년 12월 20일 항일운동 탄압을 목적으로 조직된 간도성 의용자위단 결성식에 참여했으며, 1941년 2월 흥아청년구락부를 결성했다. 1943년 10월 1일부터 1945년 7월 만주국 중앙고등경찰학교 교관 겸 연구원을 역임하는 동안 일본인 간부들을 상대로 만주국 형법과 행정법에 대한 강의를 여는 한편 저서 《滿洲國刑法叢論》을 집필했다. 1945년 7월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만주국 국무원 총무청 홍보처 참사관을 역임하였다. 

1948년 4·3사건 이후 제주도경찰감찰청장으로 발령되어 4·3사건 진압에 앞장섰다가 이듬해 7월 이임하였다.  1949년 4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이 내도하자 도지사 관사에서 4·3사건에 대한 제반사항을 보고하였다. 보고자는 도지사 임관호(任琯鎬), 전투사령관 유재흥(柳載興), 제2연대장 함병선(咸炳善), 경찰감찰청장 홍순봉 등이었다. 홍순봉이 지휘하는 경찰병력 1200명은 제주인 800명, 본토인 40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본토로부터 500명을 더 증원해 주었다. 

홍순봉은 유격전에 능숙한 이동일(李道日)을 초빙하여 많은 자문을 받았다. 이동일은 평안도 태생으로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항일유격대 활동을 경험한 투사이다. 도내 각 마을마다 성곽을 구축한 것도 연로한 이도일의 자문에 의해서 축성하게 되었다. 그 후 이도일은 오래 제주에 살다가 사경에 이르자 연고자가 있는 서울로 올라갔다. 

홍순봉은 1952년 3월 18일부터 5월 25일까지 제6대 치안국장을 역임하고 육군헌병대장을 끝으로 대령에서 전역하였다. 경상남도 병사구사령관으로 공직은 모두 그만 두었다. 대한방범시보(大韓防犯時報) 사장, 전국고학생연맹 위원장, 평남대동군군민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찰 부문과 해외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49년 7월 29일부/ 심형택(沈亨澤) 경무관에 임함 제주도경찰국장에 보함/ 경무관 홍순봉(洪淳鳳) 원(願)에 의하여 본직을 면(免)함’-대한민국 관보(1949년) 제62호 1949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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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경찰감찰청 정문. 캘리버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찰관이 경계를 서고 있다(1948. 5).

‘제주도 폭동의 원인과 결과’

‘우리는 제주 경찰 정화의 송이/ 한라산 모진 풍에 새벽 꿈 깨어/ 우국의 총칼 아래 한 데 뭉치니/ 우리의 젊은 피가 설레어 우네/ 나가자 가시장굴 설풍 속으로/ 우렁찬 노래 소리 본부 중대가/ 성판악 아침 해도 등에다 지고/ 할어이 새통어이 영실을 넘어/ 개미목 석파 벌판 우리의 도장’- 토벌대 한용선이 기억한 토벌가

‘제주도에 경비사령부 설치 / 1948년 10월 11일/ 극렬 파괴분자는 소련 10월 혁명을 계기로 제주도 각처에 폭동을 재기시켜 도순지서(道順支署) 및 오등리(五登里) 부락 등을 습격하여 경관 및 양민을 살해하고 있음으로 군은 이를 진압코자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좌기와 여(如)한 군대를 배치하였다. 제주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육군대령 김상겸(金相謙), 부대장 육군 소령 송요찬(宋堯讚), 보병 제9연대, 제5연대 1개 대대(현 주둔 부대), 제6연대 1개 대대(현 주둔 부대), 제14연대 1개 대대(10월 20일 여수 출항 증원), 해군소령 최용남(崔勇男) 부대와 제주도 경찰 경비 편대장 청장 홍순봉(洪淳鳳)부대도 본 전투에 참가하였다.’- 육군 역사일지 2집(1948. 8. 15~12. 31)

‘1949년 3월 30일~1949년 4월 1일 (No. 1097, 1949. 4. 1. 보고) 폭도들을 은신처로 몰아/한국군은 공세를 취하여 폭도들을 은신처로 몰아 넣었다. 그 결과 지난 3월 마지막 3주는 1947년 3월 1일 이래 가장 평온했다. 제주도 상황에 대한 현장보고는 <첨부 1>을  참고할 것. .....(중략)...... 경찰/제주도 경찰의 총수는 전형적인 한국 경찰관리인 홍순봉이다. 그는 한국군과 미 군사고문단에게 협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제주도 주둔 경찰 1,200명은 토착인 800명, 본토인 4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최근 소요기간 동안 본토로부터 500명이 보강됐다. 경찰의 대부분은 안전보장과 예비부대로서 경찰력의 해안 마을에 집중 주둔해 있으며, 군 지휘관의 요구가 있을 때 폭도 토벌을 위한 군경 합동작전에만 동원된다.’-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5.9.9~1949.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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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위패봉안소.

『주한미군사(The History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는 ‘제주도 폭동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주한미군사』에는 주민 5,000여 명이 남로당으로 1946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세포들 이외에 인민게릴라(People's Democratic Army)는 약 4,000명의 장교와 사병을 보유하였고, 10%미만이 소총으로 무장했고, 나머지는 일본도(日本刀)와 직접 만든 창으로 무장했고. 도민 가운데 약 6만~7만 명이 남로당에 가입했고, 그들은 주로 농어민들로 전쟁과 전후(戰後)의 어려움 때문에 생계에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더 나은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겠다는 남로당의 제안에 쉽게 설득당했다고 쓰고 있다. 

홍순봉은 1948년 10월 6일 신임 감찰청장에 부임했다. 그 뒤를 이어서 서청 단원들이 대거 들어왔다. 당시 서청을 모집할 때 제주도에서 홍순봉과 제주도 김재능(金在能)이 직접 서울로 올라가 지원을 독려했다. 서청은 경찰뿐만 아니라 군인으로도 변신했다. 서청을 지원하여 강공책을 채택했던 홍순봉 청장은 부임한 이래 이듬해인 1949년 7월 28일까지 10개월 간 최대의 유혈사태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경비대 총사령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사령관에는 광주 주둔 제5여단장 김상겸(金相謙) 대령을 임명했고, 부사령관에는 송요찬(宋堯讚) 소령을 임명했다. 홍순봉과 송요찬은 일제 때 만주군과 일본군에서 같이 복무했다. 경비대의 토벌작전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지점부터 적지로 간주, 소탕전을 벌이라’는 초토화작전이 실제 상황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11월 9일 총무국장 김두현(金斗鉉)이 서청의 손에 고문치사 당했다.

서청단장 김재능이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을 한 끝에 김두현 총무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밖으로 내버려 끝내 절명케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홍순봉 경찰청장도 범인들을 9연대원으로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했다. 살인범들이 처벌 받기는커녕 군인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6개월 사이에 최소한 1만 5천 명 이상이 학살된다. 160개 마을이 참화를 입고 불타 버린 가옥만도 3만 5천동을 넘는다. 제주도의 1948년 11월과 12월은 그야말로 피비린내나는 유혈현장이었다. 서청 출신이 일선지서로 배치될 때, 홍순봉 경찰국장이 ‘현재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식량이나 월급을 보낼 수 없다. 거기 마을에서 얻어먹으며 진압하라’고 말했다. 물론 일선 지서마다 경찰후원회가 조직돼 이들을 뒷바리지 했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민폐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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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민족범죄자와 평생 싸워왔던 임종국 선생이 남긴 친일인물카드.

4·3진압에 앞장 선 친일세력

“2연대장 함병선(咸炳善)도 만주군 출신입니다. 그도 나처럼 중사로 제대했을 겁니다. 또 9연대장이던 송요찬(宋堯讚)은 만주에 있었던 일본군 오장 출신입니다. 나중 대통령이 된 박정희도 인근 만주군 부대에 근무하고 있었지요. 또 제주에서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김성은(金聖恩)과 부사령관 김동하(金東河)도 같은 만주군 동료였습니다. 4․3 때 제주도경찰청장을 지낸 홍순봉(洪淳鳳)은 만주에서 조선인 중에선 최고 지위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4․3 때 성산포경찰서장을 지낸 바 있는 문형순(文亨淳)은 당시 만주에서 독립군에 있었습니다.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한 나는 경찰전문학교에 배치돼 경리과장을 맡았는데 그곳에는 홍순봉(교양과장), 송요찬(훈련과장)도 있었습니다”-서귀포경찰서장을 역임(1949년 6월 8일~50년 12월 3일)한 김호겸(金浩謙)의 증언  

민족문제연구소가 밝힌 친일인사는  총 4776명이다. 이를 분류하면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등 매국(21명), 수작·습작자(138명), 중추원(335명), 일본제국의회(11명), 관료(1207명), 경찰(880명), 군(387명), 사법(228명), 친일단체(484명), 종교(202명), 문화예술(174명), 교육·학술(62명), 언론·출판(44명), 경제(55명), 지역유력자(69명), 해외(910명) 등이다. 

특히 친일경찰 880명 중 경찰간부는 초산 경찰서장 경부, 만주국 행정참사관, 해방후 6대 치안국장, 헌병학교장을 역임한 홍순봉이다. 고등계 경찰은 김덕기(金悳基), 김태석(金泰錫, 金村泰錫), 노덕술(盧德述, 창씨명 松浦鴻), 전봉덕(田鳳德, 창씨명 田中鳳德), 하판락(河判洛, 창씨명 河本正夫) 등이다. 노덕술도 사상관계를 다루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고문하였고, 1949년 반민특위를 체포하면서 제주4·3에 상처를 남겼다.  해방직후 치안총수는 거의가 친일경찰이었으며, 그 중 초대 미군정경무국장 조병옥을 시작으로, 내무부 치안국장으로 이호, 김태선, 이익홍, 홍순봉, 윤우경, 문봉제, 이성주, 김장흥, 김종원, 서정학, 이성우, 이강학, 조인구, 강서룡,박주식, 조흥만, 이소동, 박태원 등이 유명하다.

여기에서 홍순봉과 문봉제는 제주4·3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다. 『조선인민보』(1950년 9월 5일)는 광주에서의 정치범 처형을 다루면서, 7월 9일, 11일, 20일 등 3차례에 걸쳐 장성군 북하면 성암리 소바위와 북상면 산성규 바위에서 3천여 명이 학살됐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 내용 중, 당시 헌병 사령관 송요찬이 광주 헌병대장 홍순봉에게 보낸 지시문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른바 학살 명령서였던 것이다. 

“광주, 전주, 목포 형무소에 재감중인 죄수 및 보도연맹관계자와 기타 피검자는 전국관계장, 경찰국장, 형무소장, 검사장과 타협해 직결처분하고 절도 및 기타 잡범은 가출옥 등 적당한 방법을 취하며 각 경찰서에 유치 중인 피검자도 전기에 의거하여 처리하라.”

홍순봉은 한국전쟁 당시 경찰에서 소령으로 계급장을 바꿔 달고 헌병사령관이 되어 광주로 갔다. 홍순봉과 송요찬은 일제 때부터 관계가 매우 깊었다. 송요찬은 일본군 준위로, 홍순봉은  일제 경찰로서 함께 만주에 근무했다. 해방이 되자 송요찬과 홍순봉은 경찰전문학교에 근무하게 됐다. 4·3 때는 제주도에서 한명은 경찰 책임자로, 한명은 군 책임자로 있으면서 제주도민 학살을 진두지휘했다. 한국전쟁이 터진 뒤엔 각각 헌병사령관과 광주 헌병대장으로 짝을 이뤄 호남지역의 수형인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민족반역과 민간인 학살로 얽힌 ‘악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제주4·3 발발을 계기로 영문도 모른 채 한순간에 죄인으로 낙인찍히며 당시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제주출신 200여명 중 일부도 학살되었다. 광주형무소에 끌려간 제주출신 수형인들은 광주시 광산군 극락면 불갱이고개 말고도 옛 광산군 지산면 장구봉, 석공면 도동고개, 대촌면 한두재, 학동3구 밀양동고개 등 5곳에서 학살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제주출신에 대한 학살의 주체가 송요찬 당시 헌병사령관이 홍순봉 호남전투지구 헌병사령관에게 직접 지시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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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경찰학교 제2기 졸업생 기념사진(교육기간,1947년 8월 3일~31일) 제주도경찰학교는 1946년 2월 1일 설치.

‘응원경찰 100명을 불러들였다’

‘일제시대 101명이던 제주도 경찰력은 제주도제 실시 이후인 1947년 2월에는 33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 해 3‧1절 시위에 대비해서 다시 본토에서 응원경찰 100명을 불러들였다가 발포사건이 유발되었다. 이에 제주출신 일부 경찰관들이 발포사건의 항의로 사임하자 대대적인 개편 증원작업을 진행, 1947년 4월에는 500여 명으로 늘리면서, 육지출신 경찰관 245명을 제주경찰로 흡수하였다. 제주도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난 직후에는 응원경찰까지 합쳐 한때 경찰력이 2,0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87쪽

■1947년 3월1일 ▪제주민전 주최 제28주년 3‧1절 기념식 개최. 응원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 사망, 8명 중경상/ 3월12일 ▪경무부 최경진 차장, 제주파업 사태 언급하면서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발언/ 3월14일▪조병옥 경무부장, 제주도 파업진상 조사차 내도. 포고문 발표 ▪우도 민청원들, 우도경찰관파견소 간판을 파괴하고 소각/ 3월15일▪전남경찰 122명, 전북경찰 100명 등 응원경찰 222명 제주도 도착 ▪조병옥 경무부장, 파업주모자들을 검거하라는 명령 하달/ 3월17일▪중문지서 응원경찰대,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는 군중에 발포해 주민 8명 부상/ 3월18일▪경기경찰 99명 제주도 도착. 응원경찰 총 421명으로 증가/ 3월20일▪조병옥 경무부장, 3·1사건 진상조사 담화에서 “제1구경찰서에서 발포한 행위는 정당방위이며 도립병원 앞에서의 발포행위는 무사려한 행위로 인정한다”고 발표 / 3월28일▪경무부, “파업선동자 전국에서 2,176명 검거, 제주는 230명”이라고 발표/ 4월 1일▪조병옥 경무부장, 파업사건에 가담한 제주 경찰관 66명에 대해 징계파면했다고  발표/ 4월10일▪제주경찰감찰청, 파업 검속자는 500명에 이르며 이중 260명을 군정재판에 회부했다고 발표/ 4월 28일▪응원경찰대의 교체병력으로 철도경찰 245명을 제주 경찰에 배속. 제주경찰 정원 500명으로 증원됨/ 5월 6일▪제주검찰청, “경찰감찰청으로부터 송치된 3‧1사건 피고는 328명”이라고 발표/ 5월 24일▪강동효 제1구경찰서장 수뢰사건으로 해임/ 5월26일▪피의자 고문사건으로 한림지서장‧차석 등 경찰관 2명 구속/ 6월 1일▪경찰, 삐라살포 혐의로 제주읍내 중학생 20명 검속/ 6월16일▪제주 경찰, “종달리 사건 수배자가 71명에 이른다”고 발표/ 8월 13일▪조천면 북촌리에서 경찰이 삐라를 붙이는 소년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발포해 주민 3명에 총상/ 8월14일▪제주 경찰, ‘8‧15폭동음모’와 관련 제주민전 의장 박경훈 전 제주도지사를 비롯, 도청 간부‧사회인사 등 20여 명 체포/ 9월 27일▪제주경찰감찰청 수사과, 불온서류 발각됐다며 생필품영단 직원과 제주농업학교‧제주중 교사 등 36명 검속/ 12월 7일▪제주 CIC, “경찰 당국이 제주도 경찰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유혈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상부에 보고

■1948년 1월22일 ▪제주 CIC, “제주경찰이 신촌리에서 열린 남로당 조천지부 불법회의장을 급습, 106명을 검거하고 폭동지령 문건 등을 압수했다”고 보고/ 1월26일▪1월 22일 체포된 106명 외에 추가로 115명이 체포됨. 제주 CIC, “연행자 221명 중에서 63명을 방면했는데, 그들은 남로당 당원이었다”고 보고/ 2월 8일▪조천면 함덕리에서 청년들이 도로차단 후 담을 치우려 하던 도청 자동차 운전사와 충돌. 긴급출동한 경찰이 청년 12명을 체포/ 2월 9일▪안덕면 사계리 청년들, 마을에서 술마시던 경찰관 2명을 집단구타▪저지지서, 청년들에 의해 피습당함/ 2월10일 ▪고산지서 경찰이 시위하던 군중에게 발포, 주민 1명 중상/ 2월11일▪제주경찰, ‘2‧7사건’여파로 제주에서 방화 1건, 테러 9건, 시위 19건이 발생했다고 발표. 3일 동안 290명 체포/ 3월 6일▪조천지서, 조천중학원생 김용철 고문치사/ 3월10일▪조천중학원 학생들과 주민들, 지서에 몰려가 고문치사 사건 항의 시위/ 3월14일▪모슬포지서에서 대정면 영락리 청년 양은하 고문치사 사건 발생/ 4월 3일▪제주도에서 무장봉기 발발. 350여 명의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새벽 2시를 기해 제주 도내 12개 지서를 공격하고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 경찰 4명,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 사망/ 4월 5일▪미군정, 약 100명의 전남경찰을 응원대로 급파하고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 설치/ 4월10일▪국립경찰전문학교 간부후보생 100명, 제주에 파견/ 5월. 5일▪제주읍 미군청청 회의실에서 딘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맨스필드 중령, 유해진 도지사,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등이 모여 이른바 ‘5‧5 최고수뇌회의’ 개최/ 5월18일▪수도경찰청 최난수 경감이 인솔하는 특별수사대 제주도에 파견/ 5월19일▪철도경찰 350명과 제6관구 및 제8관구 경찰관 100명 등 총 450명이 경무부 지령에 의하여 제주로 출발/ 7월 1일▪김봉호 제주경찰감찰청장, 경찰의 불법부정 근절 약속과 함께 귀순자는 양민으로 인정한다고 천명/ 7월10일▪철도경찰 100명 제주도에 파견/ 7월19일▪철도경찰 200명 제주도에 파견/ 8월 6일▪제1관구경찰청, 제1차 응원부대와 교대할 제2차 응원대 파견/ 8월20일▪응원경찰 800명 가량이 제주에 증파/ 8월29일▪응원경관대 800명 제주도에 도착/ 8월 31일▪경남 제7관구 경찰청, 제주도 응원부대 파견/ 9월 8일 ▪제주읍 삼양리 거주 13살 소년, 삼양지서에서 고문치사/ 10월2일▪수도경찰청과 제8관구청 응원경찰대 제주도에 파견/ 10월5일▪제주경찰감찰청장에 제주 출신 김봉호에 이어 평남 출신 홍순봉 임명/ 10월 23일▪무장대, 제주읍 삼양지서와 조천면 관내 조천지서‧함덕지서를 일제히 공격/ 11월 1일▪무장대와 내통한 혐의로 일부 경찰이 체포되는 소위 ‘경찰 프락치 사건’ 발생/ 11월 7일 ▪군경합동토벌대, 남원면 중산간 마을인 의귀리‧수망리‧한남리를 급습해 피신하지 않은 노인과 어린이를 총살하고 가옥 대부분을 방화/ 11월19일▪제주경찰감찰청, 제주도경찰국으로 개편/12월 3일 ▪무장대, 경찰지서 소재지인 구좌면 세화리를 대대적으로 습격해 주민 50명 가량을 살해하고 40가호 150채에 방화/ 12월13일▪서북청년회 단원 620명이 정식 경찰로 임용

■ 1949년 1월 3일▪외도지서 경찰과 특공대원들이 무장대로 위장하여 제주읍 도평리에 진입, 일부 주민들이 속지 않았음에도 이튿날까지 70명 가량을 총살/ 2월 4일▪무장대, 99식 소총을 연대에 반납하기 위해 제주읍으로 가던 2연대 병력을 구좌면 김녕리 부근에서 습격하여 소총 150정을 탈취하고, 2연대 병사 15명과 경찰 1명을 사살/ 2월19일▪경찰특별부대 505명 제주에 파견

■ 1950년 6월25일 ▪치안국장, 각 경찰국에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을 전화통신문으로 긴급 하달하여 전국 요시찰인 전원을 즉시 구속할 것을 지시/ 6월 29일▪치안국장, 제주도경찰국장에게 “보도연맹 및 기타 불순분자를 구속, 본관 지시가 있을 때까지 석방을 금한다”고 명령/ 7월29일▪서귀포경찰서 관내에 예비검속 됐던 수감자 150여 명이 끌려나가 바다에 수장됨/ 8월 4일▪경찰 공문서(불순분자 검거의 건), 8월 4일 현재 제주 도내에서 820명이 예비검속돼 있다고 밝힘 ▪제주경찰서‧주정공장 등지에 수감되어 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이 제주항 앞바다에 수장됨/ 8월19일▪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이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된 후 암매장/ 8월20일▪모슬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 344명 중 252명이 군에 송치돼 송악산 섯알오름에서 집단총살됨. 당국의 제지로 인해 6년만에야 시신을 수습한 대정면 희생자 유족들은 시신을 구분할 수 없어 적당히 유골을 맞춰 132기의 봉분을 만들고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라 칭함.

■ 1951년 4월24일▪제주 경찰, 1950년 10월 1일~1951년 4월 22일까지 7개월간 무장대 사살 56명, 무기노획 소총 11정, 수류탄 2발, 경찰 17명 사상(사망 15, 부상 2), 자위대 24명 사상(사망 11, 부상 11, 행방불명 2), 민간인 42명 사상(사망 1, 부상 3, 납치 38)등의 전과 발표

■ 1952년 4월 1일▪제주 경찰, 4월 30일까지 30일간 예정으로 ‘제주도지구 잔비섬멸작전’을 전개/ 11월 1일▪제주도경찰국, 100전투경찰사령부 창설/ 11월26일▪이승만 대통령, 국무회의에서 “경찰의 예비검속은 공표하지 말라”고 지시/ 12월 25일▪제주도지구 재산무장대의 완전섬멸을 위하여 경기‧충남‧경북에서 1개 중대씩 3개 중대의 경찰병력을 파견

■ 1954년 1월15일▪이경진 제주도경찰국장, 잔여무장대는 6명 뿐이라고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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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형순 성산포 경찰서장과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의뢰의 건' 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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