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범 칼럼] 강정마을에서 만난 두 노인 (1)

강정마을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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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서귀포 강정마을. ⓒ 김헌범

4.3 추념일을 일주일 앞둔 어느 토요일 강정마을로 들어가는 도로는 여느 농촌 마을에서 느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방문 전 예상했던 해군기지 반대대책위 주민과 평화활동가들의 반대집회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강정의 거리는 분명히 차분한 느낌은 아니었다.

농촌의 마을 치고 거리를 오가는 차량들이 예상외로 많았다. 도로 양옆으로는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현수막과 팻말들이 주민들을 대신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반대집회를 멈추고 예전의 일상이었던 농사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나 강정의 거리는 여전히 마을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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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서귀포 강정마을. ⓒ 김헌범

해군기지 공사장이 점령한 거리는 빈틈없이 둘러친 철제 펜스가 철 이른 만개의 꿈을 꾸는 벚꽃나무들과 유채꽃을 초라한 길거리로 밀어내고 있었다. 철제 펜스 위로도 휴전선에서나 봄직한 가시 철망들이 나선형으로 감긴 채 ‘평화의 마을’의 주민들을 경계하듯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지난 1월 말 해군관사 출입구에 설치된 해군기지반대대책위의 농성천막을 강제로 철거한 자리엔 '바다를 넘보는 자 그 누구도 용서치 않는다'는 해군의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이 현수막이 바다가 아니라 마을사람들을 향해 있다는 게 강정마을의 부조리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공사장 근처에는 소금절인 생선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좌판을 깔고 오지 않을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목각을 새기는 문정현 신부

공사장 입구에서 눈길을 길 건너편으로 돌리자 허름한 천막이 보였다. 한 눈에도 해군기지 반대대책위의 천막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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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서귀포 강정마을. ⓒ 김헌범

천막 안의 벽에는 가톨릭 교황의 큼직한 사진과 함께 정성스럽게 글귀를 새긴 많은 목각판들이 걸려있었다. 해군기지 설치를 반대하는 내용들과 평화를 염원하는 기도문들이 대부분이었다. 목각을 판 장본인을 가리키듯 텅 빈 천막의 한 귀퉁이에서 한 노인이 목판을 새기는 끌 소리가 들려왔다.

문정현 신부였다. 오가는 뜨내기들이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천막을 기웃거리는 일이 늘상 일어나는 듯 그는 천막의 철망 없는 경계를 넘어온 유일한 침입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길 건너편 기지 공사장 입구의 살벌한 경계와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새로운 사람을 보는 감정이 무뎌져서였을까 아니면 누구나 환영한다는 의미였을까. 갑자기 어정쩡한 기분이 들었다. 문 신부에게 황급히 간단한 인사와 동시에 몇 개의 기계적인 질문들이 내 입에서 새어나왔다.

내가 처음 던진 질문들은 수많은 기자들과 방문객들이 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을 고루한 질문이었을 테지만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짧은 답변에 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얼굴을 내리고 다시 목각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질문이 생각나지 않아 불청객의 자리를 피하려는 찰나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는 이렇게 지낼 것인가라는.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회적인 질문을 던졌다.
“거의 완공직전인데 현재로선 해군이 주민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해결책을 마련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겠습니까?”

질문이 매우 황당했을까. 내 마지막 질문에 분통이 터졌는지 그는 손에 쥔 연장을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직전까지 내 우문들이 자아냈던 고루한 분위기는 그의 갑작스럽게 커진 언성에 의해 압도당했다.

“처음부터 주민들을 속이고 폭력으로 억누르면서 공사를 시작했는데 이제 와서 어쩔 수 없으니 대화를 해서 해결하라니?”

“그럼 지어놓은 것을 모두 뜯어내야 한다는 건가요?”

“당연히 그래야죠”

호통 같은 그의 답변에 격앙된 감정이 전해졌다. 공사가 마무리에 들어선 지금 순리가 무엇일까. 현실을 인정하고 대화로 풀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최초의 원칙을 끝까지 지키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그의 대답은 현대인들이 신봉하는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질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불의를 보고도 눈감고, 불의와 적당히 타협하고, 불의에 빌붙어 사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욕망을 편리하게 포장하는 수단일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의 답변이 내 자신에 대한 꾸짖음으로 들려왔다. 그의 엄중한 호통이 무뎌져가는 인성을 깨우는 스님들의 죽비소리로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러나 문제는 이제 강정의 상황이 역전됐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해군이 갑의 위치에 있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공사가 강행되기 전 강정주민들은 대화를 요구했고 해군은 대화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제는 해군은 대화를 요구하고 주민들은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대화를 원하는 해군일까, 아니면 대화를 거부하는 주민들일까. 물어보나 마나다. 그러나 100명 중 99명이 찬성한다고 1+1이 3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세상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1+1=3’의 거짓을 강요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거짓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원만한 해결은 절망적이라는 사실이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명구가 있다. 그러나 진실이 거짓을 이기기는 불가능한 현실이다. 현실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진실은 단지 몇 명의 헌신적인 종교인들의 신앙으로만 남게 되는 것인가.

다수에 숨은 지역 정치인들

편리한 다수 논리에 숨은 사람이 어디 힘없는 우리들뿐일까. 주민들의 망루를 강제 철거하던 날 도민들을 위한다는 정치인들치고 현장에 나타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높은 망루에 올라간 주민들의 안전이 염려되는 상황에서 끝내 현장에 나타나지 않은 도지사는 청사에서 사태를 지휘했다고 뒤늦게 옹색한 변명을 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3명의 지역 국회의원들 중 한 야당 중진의원은 그 날 밤 제주시내의 한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마치 학생들을 훈육하는 위압적인 투로 '다수를 존중하고 소수를 배려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억울한 소수들만 조용히 있다면 세상은 아무 문제도 없는 천국이다. 그래서 그는 지역구에서는 다수로 대접받고 중앙에서는 소수로 배려 받으며 혼자만 맘 편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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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헌범 제주한라대 교수
망루 위 주민들의 안전이 경각에 달려있던 그 날 카페에서 일행들과 낄낄대며 떠들썩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그 국회의원에게서 억울한 소수들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정치인들도 선거철이 돌아오면 또다시 강정문제 해결사로 자처하고 나설지 모를 일이다. (계속) / 김헌범 제주한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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