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점화한 자이언트 불상, 도솔암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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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운산 도솔암 마애불. 높이 17미터의 거대 암석에 세긴 불상이다. 명치 부위에 감실의 흔적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시인 최영미는 1992년에 <창작과 비평>에 '선운사'라는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선운사'의 1연에 해당하는데, 작품에서 시인은 꽃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차가운 겨울 힘겹게 피운 동백꽃을 생기가 오르는 봄날에 느닷없이 떨쳐버리는 장면이란,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져버린 사랑처럼 쓸쓸하다.

선운사 경내로 들어서면, 병품처럼 둘러 친 짙은 초록의 동백 숲이 대웅전 뒤로 모습을 드러낸다. 시인묵객들의 발자취가 켜켜이 쌓인 숲인지라,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섰다. 특히 유홍준이 '노목의 기품을 자랑하고 있으며 그 수령은 대략 500년으로 잡고 있다'고 해서 동백 숲에 대한 기대는 더욱 증폭되었다.

선운사 동백 숲,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그런데, 앞서 미당이 시로 나타낸 것처럼 '동백꽃은 아직 일러' 조금밖에 피지 않았다. 3월이라 이 북방의 골짜기에는 동백이 제철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선운사 동백 숲에서 유홍준이 예찬한 '노목의 기품'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수령 500년이라고 했지만, 내 판단으로는 동백나무의 수령이 채 200년도 안 되어 보였다. 유홍준의 별명이 '유구라'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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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운사 동백 숲을 이루는 나무들이다. 아직 일러 꽃은 많이 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홍준이 예찬했던 '노목의 기품'도 느낄 수도 없었다.
선운사 경내에서 나와 선운천을 따라 도솔산 깊숙이 들어서면 주변의 것들보다 키가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표지판에는 수령 600년인 반송으로 '장사송'이라는 이름까지 붙었다. 그리고 장사송 뒤편 암벽에는 깊이 20미터 쯤 되는 동굴 한 채가 있는데, 진흥왕이 수도처였다는 전설에서 '진흥굴'이라 부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장사송의 수령이 제주시 아라동 산천단의 곰솔나무(수령 대략 600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진흥굴도 내부를 들여다보니 바위를 깬 듯한 자국이 남아 있어, 후대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모르고 지나쳤으면 좋을 뻔했다.

장사송과 진흥굴, 글쎄..

실망감을 뒤로하고 산길을 더 오르니 선운산의 중턱 아늑한 곳에 자리 잡은 도솔암에 이른다. 주변 산등성이마다 악귀를 막아줄 것 같은 바위들이 버티고 서 있어서, 이름대로 미래에 올 부처가 오랜 세월동안 머무를 만한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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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암으로 오르는 도중 마주친 장사송이다. 표지에는 수령이키가 23미터에 수령이 600년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도솔암의 왼편으로 언덕을 오르면 낙조대를 향하는 길목에 높이 17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암벽이 가로막고 있다. 주변의 소나무들과 어우러진 데서 칠송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 바위에는 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불상인 도솔암마애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바위의 질이 거친 탓에 부처의 인상이 온화하지 못하고 조형감이 다소 떨어지는 감이 있지만, 그래서 소박하고 친근한 느낌이 든다.

전문가들은 이 마애불상이 고려초에 유행했던 거불(巨佛)이나 마애불의 특징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게다가 고려초 문인 이규보가 지은 <남행일월기>에 도솔사 마애불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학자들은 10세기나 11세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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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운산 도솔암이다. 주변이 바위 산으로 둘러싸여서 불자들이 머무르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아보였다. 비온 날 주변이 안개에 덮여 마치 선계에 들어선 듯 했다,
지난 1995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팀이 이 마애불상 앞 공터를 발굴한 결과, 검단선사가 창건하였다는 동불암이 이 공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크고 거친 바위, 소박하고 친근한 부처를 품다

도솔암 마애불이 가슴에 수정이나 경전 등을 넣어 보관하는 감실의 흔적이 있다는 게 눈여겨 볼 점이다. 금등불이나 목불 등의 몸 안에 감실을 만드는 것은 일반적인데, 마애불에 감실을 만드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도솔암 마애불의 감실과 관련하여 "미륵의 배꼽에 비밀 기록이 있는데, 그것을 꺼낸 자는 왕이 된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이 설화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이 일대 농민들을 결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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