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45)해방공간에서 제주사회를 뒤흔든 인민해방군

인민해방군, 항전을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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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사람들.
‘제주의 인민위원회는 건준(建準) 이래 양심적인 반일제 투쟁의 선봉이었던 지도층으로써 구성되어 있으며, 최근에 분립된 한독(韓獨), 독촉국민회(獨促國民會) 등의 우익단체와도 격렬한 대립이 없이 무난히 자주적으로 도내를 지도하고 있다’ -『東亞日報』 1946년 12월 21일

“제주도는 1945년과 1946년 사이에 완전한 인민위원회의 지배를 보여주었다. (중략) 1946년에 제주도인민위원회가 여전히 섬을 지배했음을 시사하는 여러 건의 보고가 있었다” -한국현대사연구가 브루스 커밍스

‘민족을 분열시켜 동포상잔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국토를 양단하여 조국의 반부(半部)를 외제(外帝)의 식민지 군사기지화 하려는 단선단정을 3천만 동포가 한사(限死) 반대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인민들은 전국에 걸쳐 광범하게 치열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제주도 인민들이 4월 3일을 기하여 이에 반대 궐기한 것은 가장 애국적 구국투쟁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이것을 탄압하고 있는 것은 실로 천인공노할 사실이며, 이와 같은 마침내 제주도 인민으로 하여금 정당방위적 무력반항으로 발전시켰다. 우리 3천만 인민은 제주도 인민의 이 영웅적 구국투쟁을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뜨리지 않기 위하여,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토벌적 탄압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하여 그들을 승리의 길로 이끌어 나아가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전취하기 위하여 더욱 영웅적인 거족적 구국투쟁을 전개하여야 할 것이다.’-민주주의민족전선  담화문(1948년 5월 2일)   

1947년 3월 1일 민주주의민족전선 간부들이 집회를 주도하고, 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미군에게 돌을 던졌다. 이에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월 10일 남로당이 작성하여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로 전달하려다 압수된 문서에는 “야수 같은 경찰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단 하루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없다. 우리의 적을 무너뜨리자.”라는 지령이 적혀있었다. 

유격전(遊擊戰, Guerilla warfare)은 파르티잔 또는 비정규군에 의한 변칙적인 전투를 말한다. 제주4·3이 발발하자, 인민해방군 소그룹들은 산간지대에 주둔하고, 그 사령부는 경찰과 경비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자주 이동하면서 유격전을 벌여나갔다. 그 대원들은 명령에 따라 읍면에서 소집되며, 임무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산악과 밀림지대 등 각 지구에 유격대(遊擊隊)가 편성되었다. 인민유격대는 연대와 소대로 구분 편성하였다.  △제1연대=조천‧제주‧구좌면-3‧1지대(이덕구) △제2연대=애월‧한림‧대정‧안덕‧중문면-2‧7지대(김봉천) △제3연대=서귀‧남원‧성산‧표선면-4‧3지대(?) 또한 인민유격대 재편성과 함께 각 읍‧면과 행정단위로 강력한 자위대(10명)도 조직하였다.  

무장대 구성을 무장봉기 직후 시점에서 정리하면, △본격적으로 입산해 활동을 하는 정예의 ‘인민유격대’(각 면에서 30명씩) △각 행정단위에서 활동하는 ‘자위대’(10명) △정찰 임무를 하는 ‘특공대’ △각 지방 상황을 감시하는 ‘특경대’ △유격대 사상교육을 하는 ‘정치 소조원’등으로 요약된다. 도 당부 간부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도 당부’책임=안요검, 조몽구, 김유환, 강기찬, 김용관 △‘도당 군사부’책임=김달삼(본명 이승진), 김대진, 이덕구 △총무부=이좌구, 김두봉 △조직부=이종우, 고칠종, 김민생, 김양근 △농민부=김완배 △경리부=현복유 △선전부=김은한, 김석환 △보급부=김귀한 △정보부=김대진 △부인부=고진희

인민해방군은 미제와 일제 장비들이 압도적이고, 99식 일제소총이 주류를 이루었다. 미제 카빈총과 M1소총을 보유하고 약 25명으로 구성된 기동부대가 카빈총 10정과 99식 소총 15정으로 무장했다. 총을 갖고 있는 대원들은 습격이 끝난 뒤 사용하지 않은 실탄을 반납하라는 명령과 함께 20~50발의 실탄을 받는다. 대원들이 갖고 다녔던 다른 무기들은 칼과 총검, 지팡이나 곤봉, 죽창과 같은 숨길 수 있는 에페(끝이 뾰족한 칼) 모양의 긴 비수들이다. 

주한미육군 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FIK) 제주도 남로당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부대는 인민해방군의 군사부에서 명령을 받고 있다. 인민해방군과 자위대 등 2개의 주요 부서로 구성된다. 인민해방군 구성원들은 재산무장대들이며 그들은 제1선의 전투부대라 할 수 있다. 자위대는 재산무장대 인력을 보충하고 마을과 폭도부대 사이의 연락 책임을 맡는 기능 이외에 일반 군대의 보급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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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수된 무장대의 무기들. 죽창, 도끼 등이 보인다.(1948. 5)

‘4월에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한 폭력행위는 주로 5‧10선거의 선거인 등록을 저지하는 시도에 맞춰졌다. 제주도에서 일상적인 다른 사건들처럼 마음에 쌓인 불평이 타올랐다. 선거등록사무소에 대한 습격이 이뤄졌고, 주로 선거인 등록자들이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위협과 함께 등록명부가 도난 당했다. 이밖에 상당한 양의 위협서한을 보내고 가능한한 많이 공개 시위를 벌이면서 선관위원과 후보자들에 대한 폭행과 살인도 자행됐다.’-주한미육군 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FIK) 일반문서(군정장관 미육군 소장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중에서

‘15일 경무부에 들어온 최신 보고에 의하면 지난 3일 소요사건이 일어난 제주도에는 우금 불안한 교전 상태에 있다고 한다. 동 보고에 의하면 300명 이상으로 추측되는 무장도민은 한라산 일대 암굴 속에 잠복하여 밤이면 출몰하여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있다는 바 14일에 2개소의 지서를 습격하였으나 교전 끝에 피해 없이 격퇴하였다 한다. 그리고 최초 도민들은 기관총까지 소지한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이는 그후 조사 결과 부인되었다고 한다. 또한 산간에 잠복한 폭도는 상당히 훈련된 집단이라고 하며 현지 경찰사령부에서도 신중을 기하여 가급적 귀순을 종용하여 사태의 불확대 방침을 취하고 있다 한다. (같은 기사 동광신문 48. 4. 18)’-우리신문 1948년 4월 17일

노력인민의 보도 내용

1947년 남조선로동당의 기관지 『勞力人民』은 1948년 5월 25일(상), 6월 3일(중), 6월 11일(하) 3회에 걸쳐 제주4·3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사건의 원인과 동기 :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불법발포로 3․1사건, 단선단정 반대, UN조선위원단 추방의 2․7구국항쟁 등이 일어날 때마다 반동경찰, 강도테러단 합작의 야만적 폭압 학살이 계속되었으니 이것이  사건의 원인이다.

(2) 구국 인민자위대의 위용 : △구성/ 민주진영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학병(學兵) 중병(中兵) 출신의 민애청원을 중심으로 청장년이 대부분. 제주농업학교, 제주중학교 생도들이 과감하게 참가하여 철석같은 진용을 구성. △무장/ 일제가 은폐 저장하여 두었던 무기 탄약과 미군상륙 후 바다에 집어넣었던 무기 등을 꺼내어 확보하고, 죽창, 철모자, 일본도는 물론 권총, 장총, 기관총도 있고 대포까지 가지고 있었다. 탄환, 수류탄 등도 갖고 있었다. △보급과 정보수집/ 30만이 친척이나 연척이 아니 닿는 자가 없을 만치 서로 얽혀 있다. 인민들과 인민자위대는 정보제공은 물론 식량공급, 무기공급, 기타 일용품까지 무엇이든지 인민자위대가 필요한 것은 도민들이 자진하여 알선 제공. △훈련과 전술/ 제1진 10여 명으로 구성된 소부대가 나타나서 경찰을 습격한다. 경찰이 추격하면  소부대는 흩어져 없어져 버리고, 다시 약 20명 되는 제2부대가 나타나서 교전한다. 경찰이 다시 추격하여 사격거리에 이르면  제2부대도 또한 흩어져 없어져 버리고 조금 더 큰 부대, 제3부대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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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포된 무장대원의 모습. (1948. 5)

(3)전투경과 : △행동개시/1948년 4월 3일 오전 2시 일제히 행동을 개시. 전신, 전화선을 차단하고 교량을 파괴한 후 반동경찰의 거점이요 인민의 원부(怨府)인 도내 13 경찰지서를 습격하여 악질경관 50여명을 통쾌히 숙청한 다음 테러단의 두목과 매국노의 괴수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여 당야(當夜)에만 30여명이 소탕되었다. △봉개봉의 전투 : 4월 14일 미국제 소총, 기관총으로써 무장한 반동경찰대는 여지없이 패배되어 사상자 수명과 행방불명 20여 명을 내었고 화물자동차 1대를 빼앗긴 채 도망. 인민자위대는 개선의 봉화를 산상에 올리는 동시에 인민항쟁가를 높이 불러 그 우렁찬 소리와 봉화의 큰 불꽃은 읍내를 완전히 위협하여 이들을 전전긍긍케 하였다. △애월 부근에서의 전투 : 5월 초순 토벌대는 미국제 기관총과 기타 무기로 무장하였으며, 그 수에 있어서도 훨씬 우세. 인민자위대에게는 소총과 수류탄이 있을 뿐이며 수에 있어서도 열세. △교래 사건 : 교래는 20호 밖에 안되는 촌락인데 50~60명의 경찰과 향보단원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날은 달밤. 인민자위대의 한 병사가 몰래 다가가서 일본도를 빼들고 부근에서 파수보고 있는 향보단원을 위협했다. “입을 열면 죽인다” 정찰병은 단신으로 대담하게도 적중으로 돌입했다. 정찰병은 착 엎드려 그들을 겨냥한다. 그러나 파수는 인기척에 눈치를 채고 “누구냐?”고 소리쳤다. 그는 잠자코 있었다. 두번 세번째 “누구냐?” 소리가 떨어질 때 그에 대한 대답으로 그는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한 방의 탄환은 두 놈을 단번에 뚫어 눕혔다. 총소리에 놀라 깬 50여 경찰들은 서로 짓밟으며 야단이 났다. 그들은 맹탄을 퍼부었다. 무리들의 속에 정찰원은 황인탄(黃燐彈)을 던졌다.

(4) 5·10 망국단선 분쇄투쟁 : 5월 10일 비가 내렸는데 인민들은 투표소로 가지 않고 인민자위대가 있는 산악으로 올라왔다. 인민들은 갈대를 엮어 임시로 지붕을 삼고 그 밑에 혹은 1,000여 명 혹은 400여 명씩 모여 비를 피하고 있었다. 자위대 선전대원들이 내려와 ‘왜 우리는 단선단정을 반드시 분쇄하여야 하며 남북통일 자주독립을 전취하여야 하느냐 또는 인민과 조국을 위하여 싸우는 우리 인민자위대란 어떤 것이냐’를  해설하였다. △제주읍/ 권력기관이 모여있는 ‘성내’를 빼놓고는 투표를 보이콧하였다. 읍사무소 주위는 철통처럼 경계망을 둘러쳤으나 놈들인들 어찌 뜻하였으랴. 수류탄이 투척되어 투표소는 파괴되고 읍사무소는 산산이 부서졌다. 인민자위대 한 명도 체포하지 못하고 궁여의 책으로 읍사무소 직원들을 검거하고 이는 남로당의 음모라고 선전하였다. △조천면/ 한 표의 투표도 없었다. 선거위원들은 당일에 한사람도 출동하지 않았다. 10일 동민들은 낮에는 산으로 올라가 자위대와 같이 지내고 밤에는 부락으로 내려왔다. 이날 산봉우리마다 봉화가 하늘을 찔렀으며 동민들은 부락부락에서 시위하였다. 국방경비대도 투표강요에 동원되었는데 그들의 출동을 본 인민들은 숲 속으로 들어가서 숨었다. 경비대는 인민들에게 어서 나와서 투표하러 가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못나가겠다!” 인민의 대답이다. “못 나가면 쏘겠다” “쏘아도 나갈 수 없다!” “그러면 몰살당해도 원망마라.” 이것이 경비대의 최후의 말이었다. 인민들은 숲 속으로부터 나왔다. 그들은 가슴을 헤치고 경비대원의 총칼 앞에 내밀었다. “쏘아라! 차라리 죽을지언정 나라를 팔아먹는 그놈의 투표를 어찌 한단 말이냐!” 경비대는 이 단호한 인민의 기개에 눌려 아무 대꾸도 못하고 돌아섰다. 그러자 “인민공화국 만세!”의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애월면/9일 밤 9시 일제히 봉화가 올랐으며 당일의 투표는 거의 보이콧하고 북군의 한림면과 남군의 대정면도 거의 보이콧 하였다. 이도리(二徒里) 구장은 투표를 거부하고 쫓겨가다가 체포되었는데 이 한 사람을 시켜서 120명의 대리투표를 강행하였다. 제주도의 투표는 10%도 될 수 없는 것을 70%나 되었다고 발표하였다.

(5) 자위대와 인민과의 결부사항 : 권력기관에서 양심적인 사람을 모조리 내쫓고 서북인들로써 그들의 진용을 정비하여 도민폭압의 토대를 쌓았다. 그들은 전 도민 27만 중 8만은 남로당원이라고 말하며 청장년은 무단히 검거 구타하면서 민주진영의 지도자를 내놓으라고 족쳤다. 매국 반동세력은 서청원을 매 부락에 10명 내지 20명씩 배치하고 기금을 내라, 담요를 내라, 밥을 내라 하여 인민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가축을 함부로 도살하였다. 2․7 총파업이 터졌다. 인민들도 격앙하여 이에 호응 궐기하였다. 그러나 야수적 탄압은 일층 강화되어 이 사건에만 1만 5,000명을 잡아다 두들겨 팼으며 3,000명을 유치시키고 3월 중에만 3명을 고문으로 죽였다. 김용철 청년은 조천지서에서 놈들의 악독한 고문에 쓰러졌다. 4월 3일 오전 2시를 기하여 인민자위대의 행동이 개시된 것이다. 민족청년단은 즉시로 해체하여 이에 합류하고 맹휴 중의 중학생도 이에 합류하였다. 이와 같이 인민자위대는 인민의 속에서 인민의 전위로서 인민의 열망의 구심체로서 탄생된 것이다. 

(6) 반동진영의 동향/(가) 경찰 △긴급조치 : 경찰 약 500명으로는 손도 못대므로 응원대 800명과 경비대 1000명을 청하여 왔다. △전시 아닌 전시체제 경비총사령부 설치 : 제주경찰청장을 이동시켜서 인천서장 최천(崔天)이를 파견하는 동시에 공안국장 김정호를 경비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강압태세를 갖추는 한편 공보실장 김대봉이를 보내어 선무공작(?)을 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경관과 반동청년단과의 합작의 폭압 : 극악한 강도 테러단 서청, 청총, 대청, 독청 등 약 800명을 동원하여 경찰과 일체가 되어 각 부락에 침입하여 부락청년들을 납치하여 해변 또는 산으로 끌고 가서 총살 학살을 감행하는 동시에 방화, 파괴, 약탈, 강간, 가축도식 등 갖은 야만적 난폭 행동을 다하여 인민들의 놈들에 대한 증오는 골수에 사무치게 되었다. 한림면 금악리 민가, 제주읍 화북리 민가의 방화는 모두 반동들의 비행의 그 일례에 불과한 것이다. (나) 경관 반동청년의 탈출자 속출 : 순경들은 복장을 버리고 도망하고, 서청원은 몽둥이를 버리고 도망치고 있으며, 반동분자로 지목되던 농업학교 학생 4명까지도 이미 도망쳐 버렸다. (다) 국방경비대의 동향 : 응원경비대는 휴전 귀가의 권고삐라를 뿌려 회유책을 취하였으나 이 사태의 동기가 경찰의 극악 잔인한 폭압에 있었다. 인민자위대의 중심목표가 매국멸족의 단선단정을 분쇄하려는데 있음과 인민자위대의 위대한 순국정신과 이를 열렬히 지지하는 인민의 힘찬 동향을 보고 그들도 일정한 지역에 주둔만 하고 있을 뿐이다. (라) 미국 군대 : 하지는 미군을 직접 출동하여 정찰까지 시켰다.  인민자위대의 행동이 과감하고 인민의 지지가 강대함을 본 그들도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신중을 기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7) 인민자위대에게 영광을 드리며 단정수립을 분쇄하자! 형제자매여!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제주도 27만 동포를 구하는 투쟁에 총궐기하자! 제주도의 영웅적인 구국투쟁을 전국적으로 연결시키고 강화발전하여 단정음모를 완전히 분쇄하자! 미국군대를 철퇴시키자! UN조사위원단을 내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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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대로 가장한 2연대 특공대. 왼쪽 아래에 '暴徒로 假裝코'라는 설명이 눈길을 끈다.

인민게릴라의 하루 일과 

‘한라산 깊은 골짝 우리의 진지/ 돌각담 울타리는 우리의 성새/ 아! 제주도 빨치산은/ 우리의 자유를 지킨다// 탄알을 날라오는 씩씩한 해녀/ 네포를 전달하다 쓰러진 목동/ 아! 제주도 빨치산은/조국의 자유를 지킨다’- 제주 빨치산 노래

조천리 부근 출신인 김종규는 김선필의 설득으로 1948년 4월 2일 마을을 떠났다. 김종규와 김선필은 새벽녘 인민자위대 부대에 도착해 첫 번째 보초병에게 하얀 손수건으로 동그라미를 세 번 그려 신호를 보냈다. 그후 김종규는 다음과 같이 하루 일과를 이어갔다.

▲기상 신호: 오전 6시께. ▲첫 점호: 오전 6시께. 제1중대 지휘관이 실시한다. 남자들은 막사 앞에 2열 종대로 집합한다. 제1중대 지휘관이 인원을 파악한다. 김종규가 있는 막사에는 30명이 있었다. ▲체력 훈련: 오전 6~7시. 김종규는 훈련은 소나무 숲속에 있는 막사 주변을 크게 원을 그리며 몇 바퀴 달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군사훈련, 총검술이나 그밖의 다른 훈련은 없다. ▲조식: 오전 7시께. 쌀은 거의 들어가지 않은 조밥이 주 양식이었다. 식사는 건물 옆에 있는 허름한 식당용 움막에 마련됐다. ▲일상 작업: 오전 7시~정오. 김종규는 식사 시간 사이 오전, 오후에 다음과 같은 일을 했다. ▲ 숯불 지피기: 그와 중대원 10여 명이 막사 안에 있는 화로에서 숯을 태웠다. ▲ 땔감 모으기: 그와 10여 명의 다른 사람들이 취사용 나무를 모았다. ▲두 번째 점호: 정오께 ▲ 작업 시간: 오후 1시~오후 5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작업을 했다.  ▲세 번째 점호: 오후 5시께. 김종규가 머물고 있는 막사의 거주자들은 부근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그 지역에 머물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도 금지됐다. ▲석식: 오후 5시께. ▲사상 학습: 저녁식사 뒤 간부들이 김씨의 막사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설했고, 경찰이나 경비대에 잡혔을 때 거짓말을 하도록 교육했다. 그들은 인민게릴라의 존재를 부인하라고 들었다. 김종규가 있는 막사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지역에 머물도록 하고, 근처의 다른 어떤 사람들과도 접촉하지 말도록 요구받았다. 이름도 사용하지 않았다.-주한미육군 971방첩대(971 Counter Intelligence Corps, USAFIK) 월간정보보고(CIC Monthly Report) 1948년 5웛 15일~6월 15일(NO. 1, 1948.6.16. 보고) 참고

문세형의 인민게릴라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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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격대 아지트 외부.
1948년 5월 25일 대정면 인애동에서 한 친구가 산책하자며 문세형에게 접근했다. 문세형이 친구와 함께 마을을 벗어나니 일제99식 소총을 갖고 있는 2명을 포함해 20여 명이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문세형에게 인민해방군 부대에 가담해야 하며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들의 야영지에는 뾰족한 초가지붕에 직경 4야드, 높이 2야드 규모로 8개의 둥근 바위와 진흙 벽돌로 만들어진 막사가 있었다.

부대 입구에는 1인용 보초탑이 세워져 있었다. 탑은 높이 2야드 정도로 둥글었고, 소총을 겨누고 전방을 관찰할 수 있도록 구멍이 나 있었다. 숙소 외에 취사용 움막이 있었는데,  움막은 나뭇가지를 덮은 몇 개의 기둥으로 만들어졌고 나무 2그루가 지탱해주고 있었다. 5월 28일 문세형은 특별식사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의아하게 여겨 동료에게 물었더니 인민군사령관 김달삼이 정보참모를 대동하고 부대를 시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인민해방군은 그들의 군대를 인민군이라고 불렀는데 인민군은 북한군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는 제2소대 제3분대에 배속되었다. 부대는 25명으로 구성됐으며, 이들 가운데 15명은 일본제 99식 소총으로 무장했고, 10명은 미제 카빈총으로 무장했다. 또 1인당 실탄은 50여 발 갖고 있다. ‘한림중대’는 약 15명으로 구성돼 있다. 중대 지휘관은 미제 M-1 소총으로 무장했다. 1개 대대는 미확인 2개 중대로 구성됐다. 중대 인원은 약 18명이다. 총신이 짧은 일본제 99식 소총 1정을 포함해 소총 33정과 권총 3정이 부대의 전체 장비였다. 

5월 25일부터 5월 30일 사이에 먹고 쉬는 등 휴식을 취했다. 훈련, 무기교범, 경례는 없었고, 그들은 서로를 ‘동무’라고 불렀다. 문세형은 감시탑에서 보초가 경비대가 접근하고 있다며 부대에 알린 뒤 1948년 5월 30일 오후 3시 경비대에 체포됐다. 문세형은 80여 명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자신이 알고 있는 한 다시 만나기로 사전에 계획하지 않았다고 밝혔다.-주한미육군 971방첩대(971 Counter Intelligence Corps, USAFIK) 월간정보보고(CIC Monthly Report) 1948년 5웛 15일~6월 15일(NO. 1, 1948.6.16. 보고) 참고

마지막 공비 오원권 생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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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격대원이 사용하던 물건.
‘기보=경찰사찰유격대에 의하여 사살된 잔비 수괴 김의봉(金義奉)의 시체는 작 18일 경찰국 후정(後庭)에 운반되어 왔다. 재빨리 알아차린 시민들은 원흉의 모습을 보고자 모여들었는데 중에는 미군인들도 카메라를 들고 끼어 있었다. 시체 복부에는 2발의 총탄이 관통되어 있었는데 차림은 상의는 한국제 군복, 하의는 일본제 군복, 내의는 미제, 신발은 일본제 군화에 면도도 하고 회중시계, 만년필, 자석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제주신보 1953년 4월 19일

‘2일 제주도의 공비 한 명을 생포함으로써 명실공히 제주도는 공비가 한 명도 없는 낙토가 되었다고 한다. 즉 치안국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2일 0시 7분 경 현지 경찰에서는 북제주군 구좌면 송당리 ‘장기동’ 부락에서 공비 오원권(吳元權․42)을 생포하는 동시에 카빈총 1정을 노획하였는데 이는 27일 공비 세 명을 소탕한 소탕전의 추가 전과라고 한다. 한편 치안국 관계관 말에 의하면 작보(昨報)한 바와 같이 약 4년 전에 단 한 번 출몰했던 공비 한 명이 전라북도 회문산에 남아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도 사망했다는 것이 유력시된다는 것이며 이로써 한때 수만명으로 헤아리던 공비는 제주도에서 또 한 명을 생포함으로써 재산 공비는 사실상 모두 소탕된 것이라고 한다.’ -조선일보 1957년 4월 3일     

1957년 4월 2일 성산포 유격대가 구좌면 송당리에서 마지막 무장대 오원권(吳元權․39세)을 생포하였다. 그는 칠순이 넘은 부친과 아내, 그리고 생후 8개월 되는 맏아들과 함께 사는 농부였다. 군경합동토벌대가 작전을 개시하여 공비소탕전을 시작했을 때 부락은 포화에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때 그는 아내를 잃었다. 부락민은 평지로 내려왔으나 당장 먹을 것도 없고 추운 겨울을 앞에 두고 입을 것, 덮을 것도 없는 알몸으로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인권은 토벌대의 양해를 얻어 옛 마을을 찾아가니  잿더미가 된 집터는 황량한 폐허인양 그를 맞았다. 공비가 벌써 그곳에 내려와서 제 세상인양 활개를 치고 시뻘건 눈을 휘둥그리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무장대원들에게 붙잡혔다. 무장대원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고 그는 홀몸.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늙은 부친과 핏덩이 같은 아들이 눈앞에 가물거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1948년 가을부터 오원권은 무장대원이 되었다. 그날부터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고 무장대원들의 소위 책임부서에서 일을 했다. 그가 맡은 일은 식량보급이었다. 보리와 조를 짊어지고 한 달에도 몇 십번씩 자리를 옮기는 생활을 하였다. 무장대원들은 항상 “경찰토벌대에 잡히기만 하면 당장 총살된다. 그것뿐인가? 공비들의 가족은 경찰에 의해서 모두 학살당했다”고 말해왔으며 그렇기 때문에 경찰에 대한 증오심도 컸고, 귀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곳에 있으면 배고픈 것, 추운 것, 그리움 같은 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의 언어는 이미 공산당식 웅변조로 변하였다. 경찰이 무섭다고 생각하기 전에 경찰은 이미 생명의 적으로 알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까지 한 그룹에 편성돼서 오늘은 이 산봉우리, 내일은 저 산봉우리로 떠돌아다니며 말을 잡아먹으면서 살았다. 소와 말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고기는 실컷 먹었다. 한국전쟁 전에 분산되어 행동하던 무장대원들이 다시 집단적으로 경찰과 대전할 기세를 갖추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할 수 있게 되었다. 공비들은 민가에서 빼앗아온 신문 잡지 등으로서 전세가 어느 정도 진전되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1년 동안은 안온한 상태에서 “때를 기다렸다.” 귀순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이따금씩 아들놈의 얼굴이나 보고 싶었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전환되자 60여 명에 달했던 당시의 재산공비들은 당황한 기색으로 또다시 경찰을 습격하고 식량을 약탈하는 강도행위를 시작하였다. 

오인권도 그때부터 약 1년 동안 총을 잡고 있었다. 같은 그룹의 네 명과 함께 거의 1년 동안을 지냈다. 2~3일씩 굶는 것은 예사로 담요 한 장으로 눈 속에서 지내는 모진 고생 속에서도 경찰에 잡히기만 하면 죽는다는 말에 도망칠 염의조차도 못냈다. 한번은 배가 너무 고파 죽을 지경이었는데 경찰토벌대가 작전을 개시해서 배고픈 것도 다 잊어버린 채 산길 50리를 하룻밤 사이에 도망친 일이 있다. 단 네 명이 골짜기 봉우리를 쫓겨 다니면서 한 해가 지나가고 또 한 해가 지나갔다. 산에서는 매우 엄격한 규칙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여자에 대해서 눈짓하나 할 수 없으며 여자의 몸에 손 한번 대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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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치산들에게 귀순을 권고하는 안내문을 읽고있는 사람들.

오인권은 “죽지만 않으면 나도 버젓한 세상 사람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을 얼마나 바랬는지 모릅니다”라고 입을 꼭 다물었다. 귀순을 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지고 무엇인가 무거운 압력을 벗어나서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오인권에게 “어때요? 담요 한 장으로 눈 속에서 자던 10년 동안의 고생과 지금 이런 여관방에서 요를 깔고 솜이불을 덮고 자는 것이?”하고 묻자 “이불은 무겁군요. 아직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고 밥을 먹어도 배부른 것 같지 않고 모두가 정말인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현재의 심경을 말하고 나서 “제주도에서 경찰선생님들의 덕분으로 부친을 만났는데 그때는 꼭 생저승에서 만나는 것 같습니다. 염치없이 부친을 붙들고 막 울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오인권은 “지난 3월 말경 경찰토벌대에 저희들을 지휘하던 열성분자 놈이 피살되고 나하고 이 한순애하고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둘만 남고 보니 외롭고 무섭고…뭐 금방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제 신세가 지긋지긋하게 싫어지더군요. 그래 경찰토벌대에 귀순했습니다.” 오인권은 그 당시의 무섭고 외롭고 초조했던 상태가 되살아나는지 몸을 오싹 떨며 움츠러뜨리는 것이었다. “그래 앞으로 어떡하실 작정입니까?” 하고 살아갈 일을 들으니 “글쎄요. 당국에서 하라는대로 하지요” 하고 무표정하게 말하고 나서 갑자기 애원하는 듯 목소리를 낮추면서 “아버지하고 아들놈하고 농사나 짓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아들놈은 내가 산에 붙잡혀갈 때 생후 8개월의 젖먹이였지만 지금 열살 난 큰애가 됐습니다. 빨리 보고싶구먼요. 부친은 지금 83세입니다. 부친을 모시고 아들놈하고 농사나 지어나가면서 살게 됐으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라고 띄엄띄엄 말하고 한숨을 푹 쉬는 것이었다. “그전 살던 데에 농토는 그대로 있겠죠”하고 물음 반, 위로 절반 물으니 “아닙니다. 워낙 화전(火田)터라서 한 10년 동안에 아무 못쓰게 됐습니다”라고 체념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오인권은 또 한 개의 담배를 피워 물고 뜻모를 웃음을 어둠이 스며드는 창밖을 멀건이 내다보면서 입속으로 무엇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조선일보 1957년 4월 14일 참조 / 김관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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