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레코드>(53) 꼬마 저글러를 위한 왈츠 / 캐비넷 싱얼롱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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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ttle Fanfare / 캐비넷 싱얼로즈 (2006)

제주도에 이주한 한 영화감독의 시나리오 초고를 보게 되었다. 시인이 주인공이라며 보여준 시나리오를 읽다가 한 장면에서 영상을 눈앞에 보는 듯 환하게 켜지는 느낌을 받았다. 크리스피 크림 도넛 가게가 눈앞에 나타난 장면인데 지문에 ‘비현실적으로 환한’이라는 표현이 내 마음의 불을 켰다. 이것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 시나리오에서 표현된 ‘슬픈 엉덩이’ 같은 강한 느낌을 준다. 영상은 현실보다 과잉되거나 왜곡되곤 한다. 비현실적이지만 강렬한 끌림이 있다. 언젠가 서울의 어느 동네를 걷는데 모퉁이에 작은 레코드 가게가 있었다. 큰 거리에서도 레코드 가게를 찾기 어려운데 좁은 골목길 모퉁이에 레코드가 있는 게 비현실적이었다. 그 가게의 노란 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레코드가게에서 흘러나온 음악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캐비넷 싱얼롱즈’의 노래 ‘꼬마 저글러를 위한 왈츠’라면 어울릴 것 같다. 기억 역시 비현실적이다. ‘캐비넷 싱얼롱즈’는 이제 기억 속 음악이다. 일상을 구체적으로 노래하는데 전혀 현실감과 동떨어진 음악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시간은 점점 기억 속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비현실이 되어 간다.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환한 가게 불빛 앞에서 멈추게 된다. 아직 살아있는 게 비현실적인 이 지구에서. 별빛은 또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현택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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