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호남 여행기] (3) 여수의 보물 오동도, 여인의 순정을 품다

필자는 제주노회 동남시찰 장로회가 지난 5월 15일부터 16일 이틀 동안 진행한 전남 남해안(완도-여수-순천) 관광수련회에 참가했다. 완도는 16년 전 신혼여행에 다녀 온 것이 마지막이고, 여수와 순천은 언제 다녀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지경이다. 올 한해 호남 땅을 두루 밟아보기로 마음을 먹고 있던 터에 주어진 기회라, 짧지만 보람찬 여행이었다.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신 김홍주 회장님(의귀교회), 고성숙 총무님(남원교회)이하 시찰회 장로님들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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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동도 가는 길. 오동도는 여수 동남부에 튀어 나온 작은 섬인데, 지금은 방파제로 연결되어 섬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처지다. 여수의 보물로 인정을 받아, 평일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여수 해상케이블카에서 맛본 해안절경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가슴에 간직한 채 우리는 버스를 타고 오동도로 향했다. 오동도는 면적이 4만평에 조금 못 미치는 작은 섬이다. 이젠 자산공원 인근과 방파제로 연결되어 있어, 사실상 섬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처지다. 자그마한 규모에 별로 높지도 않아, 한 시간 남짓이면 섬을 둘러볼 수 있다.

섬이 작다고 섬에 볼게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 섬엔 구석구석에 비경이 숨어있고, 거기엔 민초들의 애환이 알알이 박혀있다. 그래서 섬은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으며 여수의 보물로 인정받고 있다.

원래 이 섬에는 이름대로 오동나무가 무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 공민왕 때의 요승(妖僧) 신돈은 오동나무 열매를 따먹기 위해 봉황이 섬에 모여드는 것을 보고 이들을 내쫒기 위해 나무를 전부 베어내게 했다.

신돈의 설화에서 여인의 순정까지, 민초들의 애환을 품은 섬

그 후 섬의 온화한 기후는 동백나무를 품어, 오동나무 대신 동백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게 되었다. 이 동백나무 군락과 관련하여 생겨난 게 도적떼에 쫒기다 목숨을 잃은 여인의 이야기다. 이 섬에 살던 아리따운 여인이 도적에 쫒기다 벼랑에 몸을 던져 목숨을 잃었고, 바다에서 돌아온 지아비가 슬피 울며 오동도 기슭에 무덤을 만들었다. 이후 여인의 순정이 붉게 피어나서 동백꽃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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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백나무 숲을 지나는 산책로. 오래 전 이 섬은 오동나무로 가득 덮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동백나무 군락지가 되었다고 한다.
한순간도 깨어있지 않고는 /긴장을 내려놓을 수 없는 팽팽한 밤

이윽고 사선에서 허우적거리는 /고깃배 한 척을 향하여

생명의 주파수를 맞추어 준다

오동도는 하나의 거대한 집어등 /돌아오지 않은 아리따운 여인을 향해

동백꽃등 점점히 불을 밝힌다

-우동식의 <오동도 등대>

오동도 산책로에는 여수와 오동도를 소재로 한 많은 시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소개한 시도 그중 한 편이다. 시의 말미에 ‘돌아오지 않은 아리따운 여인’이라는 구절은 죽은 여인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어쩌면 전설 속 여인을 소재로 시인은 떠나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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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에는 동백나무 산책로 말고도 볼거리가 많다. 그런데 정해진 짧은 시간 동안 구석구석을 다 관람하지는 못했다.
오동도에는 반도의 동남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어서, 일출과 일몰의 장관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해진 짧은 시간 동안만 머물러 있었기에, 비단처럼 잔잔한 여수의 바다 위를 수놓은 태양빛의 장엄함을 제대로 맛보지는 못했다.

섬을 한 바퀴 산책하고 나올 무렵이면 섬의 북쪽에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전쟁에 사용했던 거북선과 판옥선이 복원, 전시되어 있다. 호남 땅 어딘들 이순신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까마는, 여수는 이순신의 빛나는 업적과 깊이 연관된 도시다. 400년 조선수군의 본거지인 전라좌수영이 여수에 있었고, 이순신은 이곳을 기반으로 연전연승의 업적을 남겼다.

호남 없이는 국가가 없다고 했던 이순신

원래 전라좌수영은 여수 중앙동 일대에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수없이 파괴되었다. 그래서 여수시가 과거 전라좌수영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오동도에 거북선과 판옥선 등을 전시한 것으로 보인다.

거북선 옆에 커다란 바위에 세긴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란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유득공이 정조의 명을 받고 저술한 ’이충무공전서‘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충무공이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당시 충무공은 당시 호남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면 국가를 지켜낼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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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는 과거 전라좌수영이 있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을 기반으로 연전연승의 전적을 쌓았다. 오동도에는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거북선과 판옥선이 복원,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후 호남 민초들이 갑오농민운동, 광주학생의거, 광주민주화운동 등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감당하면서, 의미가 다소 변용된 채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글귀 한 구절도 필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스스로의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섬을 빠져나오려는데, 어디서 귀에 익은 인사가 들린다. 해녀 한 분이 금방 잡은 성게, 멍게 등을 관광객들에게 팔고 있다.

“제주도에서 옵데강? 고향사람들 만나난 정말 반갑수다”

여수에서 만난 제주 해녀, 고생 끝에 살만해졌는데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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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녀 고갑숙씨와 함께. 고씨는 어릴 적에 돈을 벌기 위해 육지로 물질을 나왔다가 여수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다.
이름이 고갑숙씨로, 어릴 적에 돈을 벌기 위해 육지로 나와 거제, 통영, 남해 등지에서 물질을 했다. 이후 여수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고생 끝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리를 잡고 살만히니 몇 해 전 남편과 사별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자녀들이 잘 되어서 그동안의 고생이 헛되지는 않았다고 위안을 삼는다. 친정에 경조사가 있으면 제주를 찾게 되는데, 1년에 한 번 정도라고 한다.

고갑숙씨의 말에 따르면 지금도 여수에는 제주 출신 해녀들이 잠수 활동을 하는데, 그 수가 60여에 이른다. 제주 여인들의 강인한 생활력이 이곳 여수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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