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김헌준 - 세계적 진상규명운동과 4.3(상)
"4.3은 전 인류에 대한 범죄…인류적 차원서 진상규명"

이 글은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헌준님이 제주4.3 58주년을 맞아 '제주의 소리'에 특별기고 한 내용입니다. 김헌준님은 비록 제주출신은 아니지만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정치와 정치사상을 전공하면서 '제주 4.3과 남아공의 진상규명운동과 진실위원회 비교 연구'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사과한 제주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운동이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할지를 모색하는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김헌준님께 감사의 말을 드리며 두 차례에 나눠 싣습니다. [편집자]


  최근 미국 학계에서는 ‘(민주주의로의) 이행 후 정의’(transitional justice)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이는 지난 30여 년간 많은 국가들이 과거 비민주적 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과거에 국가가 저지른 조직적이고 심각한 인권 유린 사례가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행 후 정의’는 과거 정권이 개인이나 단체에게 행한 인권 유린에 대해 국가 정책을 통해 다루는 조치 및 그 결과로 정의할 수 있다. 과거에 대한 재해석, 재분배, 처벌 및 교정 등이 이러한 정책 내용에 포함되며 이러한 정책은 화해 혹은 사회 안정 등 미래지향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정책으로는 국내외 사법기관을 통한 민·형사 재판과 국가진실위원회가 있다.

지역적 특수성에서 벗어나 국제적 시각에서 보편성을 이야기 할 때가 됐다

  1983년 아르헨티나의 사례를 통해 세계로 알려진 진실위원회는 이후 칠레(1990), 남아공(1995) 사례 등을 통해 더욱 유명해지며 주요한 정책 대안으로 자리 잡고 있다. 1970년 이후 현재까지 35개 국가에서 진실위원회의 형태로 과거 인권 유린 사례를 정리하였으며 지금도 몇몇 국가에서 그 설치가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진실위원회의 증가는 많은 국가들이 점차적으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까닭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국내외에서의 인권에 대한 인식과 요구가 점차 높아지기 때문이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와 4.3 진상규명의 역사도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4.3 국제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아…영문 자료도 거의 없어

  하지만 아쉬운 점은 제주4.3사건과 그 진상규명의 노력이 국제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4.3사건 및 그 진상규명의 과정에 대한 연구를 할 때 영문 자료가 거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또한 국제 NGO 중 ‘이행 후 정의’에 대해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International Center for Transitional Justice (뉴욕 소재)에서도 4.3사건, 더 나아가 한국의 진상규명 노력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연구자로서 매우 안타까웠다.

  4.3사건이 미국이 개입한 국제적인 사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국제화되지 못한 4.3은 더욱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이야기해준다. 이제까지 4.3의 연구가 4.3이 가지는 특수성을 중심으로 논의가 되어왔다면 이제는 4.3의 보편성도 함께 이야기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4.3은 인간성 상실에서 비롯된 전 인류에 대한 범죄…인류적 차원서 진상규명 필요 

  전 세계적인 인권 유린 사례와 그 해결 과정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면서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심각하고 조직적인 국가 인권 유린은 결코 개인과 개별 집단에 국한된 범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4.3 시기의 민간인 학살과 같은 사건은 단순한 개별 사건이 아니라 도덕성과 이성 등 인간성의 총체적인 상실이라는 점에서 전 인류에 대한 범죄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제기구에서 인류에 대한 범죄에 대해 시효와 국경 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4.3 당시 민간인 학살도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인류 전체에게 용서받아야 될 국가 범죄라고 할 수 있고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또한 전 인류를 향한 정책적 노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노력은 시기적으로는 과거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과 현재의 우리, 또한 더 나아가 우리의 후손들을 포함하여야 하고, 공간적으로는 제주를 넘어, 한국, 미국 그리고 더 나아가 전 세계 인류를 아울러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첫 단계로 4.3 진상조사 보고서의 번역과 미국을 우선으로 한 보고서의 국제적 배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민간인 학살은 과거의 문제가 아닌 끊임없이 극복해야 할 현재적 문제

  인간성의 상실과 그것으로 인해 드러나는 인간의 야만성은 결코 쉽게 극복되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1990년 초 유고슬라비아의 내전이 일어났을 때, 문명화된 국가에서 다시는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경우와 같은 대량 학살이 일어나리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또한 같은 시기 가장 선진화되었다고 말해지는 미국에서 일어난 로스앤젤레스 폭동 또한 이러한 위험성을 드러내준다.

  인간성의 상실은 결코 미개한 국가에서만 일어나는 미개한 문화가 아니다. 민간인 학살과 같은 사건은 한 번 일어난 이상 언제 또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하나의 정치적인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과거 민간인 학살은 과거의 문제만이 아닌 것이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극복해야 할 현재적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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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준
서울대 외교학과 졸, 미네소타대 정치학 박사과정 재학 중
국제정치와 정치사상을 전공하고 논문은 「제주 4·3과 남아공의 진상규명운동과 진실위원회 비교 연구」에 대해서 쓰고 있음
기타 연구주제로는 민간인 학살 (보도연맹원 학살), 아렌트(Hannah Arendt)의 정치사상, 고대 및 중세 서양정치사상, 국제 인권 문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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