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호남 여행기] (4) 여수 만성리 학살터, 여순사건을 증언하다

필자는 제주노회 동남시찰 장로회가 지난 5월 15일부터 16일 이틀 동안 진행한 전남 남해안(완도-여수-순천) 관광수련회에 참가했다. 완도는 16년 전 신혼여행에 다녀 온 것이 마지막이고, 여수와 순천은 언제 다녀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지경이다. 올 한해 호남 땅을 두루 밟아보기로 마음을 먹고 있던 터에 주어진 기회라, 짧지만 보람찬 여행이었다.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신 김홍주 회장님(의귀교회), 고성숙 총무님(남원교회)이하 시찰회 장로님들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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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성리 학살터 주변.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로에 지금은 레일바이크가 지난다.

오동도에서 일행이 휴식을 취하는 틈에 잠시 택시를 잡아타고 인근 만성리 해안을 향했다. 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수순천사건의 희생자들이 암매장된 만성리 계곡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만성리 계곡을 가기 위해 택시는 절벽 아래 좁고 긴 터널을 지난다. 마래터널이 하는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수탈하기 위해 조선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건설한 것이다. 그 길이가 640m에 이르는 긴 터널을 뚫기 위해 곡괭이질을 쉬지 않았던 조선 백성들의 고통을 전해지는 듯 했다.

여순사건 당시 연루 혐의자들은 이 터널을 걸어 만성리 학살 터로 이동했다. 죽음을 향해 어두운 터널 속에서 한 발씩 내딛던 주민들의 공포를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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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래터널. 일제가 전쟁물자를 수탈하기 위해 주민들을 동원하여 건설한 터널이다. 여순사건 당시 빨갱이로 몰린 주민들이 이 죽음의 터널을 걸어 학살터로 이동했다.

마래터널, 죽음을 향한 발길

터널을 뚫고 지나는 해안도로는 외길이다. 차를 천천해 몰다가 마주 오는 차를 만나면 일단 정지한 후, 조심해서 지나가야 한다.

여순사건은 제주4.3항쟁과 더불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발행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게다가 사건이 제주4.3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제주 사람으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사건은 48년 10월 19일, ‘제주 폭동 진압’을 위해 1개 대대를 출동시키라는 국방부의 명령을 14연대 일부 사병들이 거부하면서 발단되었다. 14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의 지시를 받은 40여명의 병사가 탄약고와 무기고를 점령하며 봉기가 시작되었는데, 나중에 합류한 군인이 2,500여 명에 이른다.

여기에 민간인들이 가세하면서 봉기는 여수와 순천 시기자로 확대되었고, 며칠 만에 구례, 보성 등 전라남도 동부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반란군이 접수한 지역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재건되고, 친일파 척결과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 등의 개혁이 결의되었다.

하지만 정부의 초토화 작전으로 봉기는 좌절되었고, 진압군과 경찰이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부역자 색출에 나서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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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성리 학살터다. 당시 군경은 이 좁은 계곡에 주민들을 밀어넣고 집단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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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여수와 순천을 접수한 진압군은 전 주민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했다. 군경은 여수주민 4만 여 명을 서국민학교에, 순천주민 5만 여명을 순천북국민학교에 집결시켰다. 공포의 부역자 색출이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흰 고무신을 신었거나 머리를 짧게 깎은 게 죄가 되었고, 주변에서 손가락으로 지목을 받으면 빨갱이로 몰렸다.

머리가 짧다고 색출, 잔인한 학살로

부역자로 색출된 자들은 학교 뒤편에서 즉결 총살당하기도 했고, 여러 곳에 분리되어 심사를 받기도 했다. 당시 목숨을 잃은 주민이 5천500여 명에 이르는데, 만성리 학살 터는 그 중 중앙초등학교에 수용되었던 주민들 중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곳이다.

저기 흰 바다 검은 절벽에

눈부신 한 무리 선홍빛,

아직도 흰 붕대를 풀지 못한 여수 동백은

해마다 시월이 오면 후드득, 후드득,

생모가지 통째로

붉은 울음을 운다.

- 나종영 시 '여수 동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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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슨 안내 표지.
주민들이 차마 지나지 못하던 길, 지금은..

이곳에서 학살이 진행된 후, 인근 주민들에게 이 일대는 공포의 장소가 되었다. 주민들은 억울한 원혼들이 묻힌 이곳을 차마 지나지 못해 먼 길을 돌아 다녔다.

만성리 해안절벽에는 지금은 기차가 다니니 않는 철길이 남아 있다. 기차가 멈춘 자리에서 지금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레일바이크를 즐긴다. 레일바이크가 만성리 학살 터 주변을 지나지만, 아무도 이 좁은 계곡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녹슨 표지만이 쓸쓸하게 과거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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