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후 칼럼] 과거를 쉽게 잊으면 위험은 반복된다

휴일에 생필품을 사러 간 대형 쇼핑몰은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의 표정에는 메르스를 다 잊은 듯 활기가 넘쳐난다. 구름 한 점 없는 한낮의 밝은 빛에 사람들의 삶은 화려하게 보이지만 밀물처럼 들어와 썰물처럼 나가고 있는 메르스의 공포와 두려움은 아직도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빛과 어둠이 함께하는 2015년 6월말 하루의 풍경이다.

지난 5월 20일 첫 메르스 환자가 공식 확인된 지 40여일이 지났다. 사망자는 30명이 넘었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병상에서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거나 격리되는 고통을 겪고 있다. 첫 환자의 발생부터 확산과 정부의 대응 실패, 6월말에 이르기까지 메르스는 우리 사회에 많은 질문과 과제를 던졌다. 이 중 대표적인 질문으로 4가지를 들 수 있다.

메르스는 과학만능의 물질문명이 이룩한 성과를 비웃고 우리의 몸속으로 깊이 파고 들었다. 세계적 수준의 의료체계를 갖췄다는 나라의 방역망이 허술하게 뚫린 것이다. 선진국 문턱을 넘어선 나라에서 전염병은 거의 박멸 수준에 이르렀다고 본다. 그러나 메르스, 사스, 광우병 같은 신종 병들이 돌발적으로 등장하여 끊임없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문명사회에서 역병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환경생태계 파괴, 기후변화, 지구온난화 등 위험을 무릅쓰고 물질적 풍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지적한 것처럼 경제가 발전할수록 시민을 위협하는 구조적 위험요소는 많아지고 있는 현상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성장과 함께하는 위험사회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첫 번째 질문이다.

정부는 메르스를 대처하는 과정에서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국가의 위기관리 실패는 빠른 시간에 메르스를 확산시켰다. 초기대응 부실과 관리 소홀은 정부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였다. 정보 부족에 목마른 언론은 과잉보도로 국민들의 불안감을 키웠다. 괴담과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정부는 이를 엄단하겠다는 엄포만 남발했다.

정부는 파국적인 상태에서 소통을 시도하는 비민주적인 행태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중앙정부의 소극적인 정보공개와 불투명한 방역체계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 대응은 중앙정부와 지자체 간의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권위주의와 비밀주의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부를 어떻게 혁신하여 민주화할 것인가’가 두 번째 질문이다.

우리나라 의료 산업이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하면서 삼성, 현대 등 5대 대형병원이 보건분야를 주도하게 되었다. 예방보다는 치료에 집중한 결과, 후진국형의 예방 체계와 세계 최고 수준의 치료역량 구축이라는 기형적 의료시스템이 만들어졌다. 비효율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공공병원이 메르스 치료의 핵심기능을 수행하고, 대형병원은 메르스 확산의 진원지가 되는 역설적인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한국의 전체 병상 중 공공병상 비율(12.8%)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77%)에 훨씬 못미친다.

이와 함께 돈이 안되는 예방과 기초의학은 찬밥신세로 전락했다. 보건 행정의 비중과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국가의 개입을 늘리고 의료 민영화 추세에 제동을 걸 수 있겠는가. 국가는 뒷짐 지고 시장에 맡겨 놓으면 국민건강과 안전을 지킬 수 있겠는가’가 세 번째 질문이다.

메르스 진행과정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보다는 불일치가 부각되었다. 개인적인 병원쇼핑과 친지들의 간병문화를 감염확산의 원인으로 들었다. 환자와 격리자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정부 무능과 불신에 따른 각자도생의 심리가 퍼지고 역학조사나 격리에 응하지 않는 사례가 나타났다. 정부와 전문가에 대한 신뢰 저하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뻔 했다.

감염병은 개인과 가족의 문제를 떠나 공동체의 문제다. 국가 전체가 합심하여 대응하지 못하면 피해는 커질 수 밖에 없다. ‘위기상황에서 개인주의를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발현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가 네 번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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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후 소통기획자.
외국 전문가들은 한국같은 나라에서 메르스가 크게 번진 것은 정부의 방역실패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예기치 못한 위험은 정부가 대응 체계와 인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면 효과적으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예측 가능한 위험은 정부의 관리 역량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현재 시민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메르스의 퇴치에 국가적 역량이 집중되고 있지만, 메르스가 던진 질문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답변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본다.

과거를 쉽게 잊으면 위험은 반복된다. 메르스의 전과정을 백서로 꼼꼼히 정리하여 정부가 무방비와 오판, 실패를 거듭하지 않도록 경계를 삼아야 한다. / 권영후 소통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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