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일본 '야스쿠니'] (1) 군국주의의 망령

일본 도쿄에 위치한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는 일본 최고 통수권자였던 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은 이들의 영령을 모아 놓은 곳이다. 평범한 시민들에게 이곳은 조상을 추모하고 개인과 가정의 복락을 빌고 벚꽃을 즐기는 장소이지만, 일본의 극우 세력들에게는 군국주의 망령을 되살리게 하고 전쟁을 추억하며 미화시키는 곳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권철은 평화로운 일상 너머에 여전히 군국주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에서 10년 동안 이곳을 집중 취재해 왔다. [제주의소리]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권철 작가가 최근 발간한 사진집 <야스쿠니-군국주의 망령>의 주요 사진을 8월말까지 웹갤러리를 통해 차례로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사진으로 본 <야스쿠니>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만날 수 있길 바란다. [편집자 주]

사진 공부를 위해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어느 한국 청년이 있었다. 그는 아시아 최대의 환락가 가부키초(歌舞伎町)에 매료(?)됐다. 가부키초는 유흥과 마약, 야쿠자와 폭력, 관광지로 유명한 도쿄 신주쿠의 작은 동네이다.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16년간 ‘위험한 동네’ 가부키초를 앵글에 담았다. 그는 가부키초의 카메라맨을 자청했다. 그가 밀착 취재해 펴낸 <가부키초(歌舞伎町)>는 2013년 일본 최고의 권위 있는 출판상 중 하나인 고단샤의 ‘제44회 고단샤 출판문화상 사진상’을 수상했다. 그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다큐사진작가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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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철 작가. 사진출처=권철작가 홈페이지(www.kwonchoul.com).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권철(48). 그는 1967년 한국에서 태어났다. 1994년 일본으로 사진 유학을 떠나 1997년 일본사진예술전문학교에서 보도사진가인 히구치 겐지로부터 사진을 사사·졸업했다. 1998년 일본대학교 예술학부 사진학과 연구생 과정을 마치고, 1999년 한센병 회복자를 소재로 한 사진기사가 잡지에 실리며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주로 앵글에 담아온 테마는 신주쿠의 환락가 가부키초, 오오쿠보 코리아타운의 한류, 야스쿠니 신사, 한센병 회복자, 재일 조선인 등이다. NHK를 비롯한 TV도쿄, TBS 등 일본의 유력 언론은 물론, KBS, YTN 등의 국내 방송과 언론매체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등 보도사진가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 밖에도 <텟장, 한센병에 감사한 시인>(2013년), 자전적 포토에세이 <가부키초 스나이퍼> 등을 펴냈다. 2014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해 제주도에 정착했다. 제주에 온 후에도 외지자본과 특히 카지노 자본에 잠식되고 있는 제주 원주민들의 땅과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앵글에 담아왔고, 특히 외지자본에 삶의 터전을 잃어 가고 있는 제주해녀들의 일상을 담은 <이호테우>(2015)를 올해 펴냈고, 지난 5월 제주대학교 박물관 초대전으로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도쿄 가부키초 근처에서 또 하나의 ‘두 얼굴’을 발견했다. 야스쿠니 신사다. 반경 300미터 정도의 작은 마을인 가부키초는 동쪽으로 메이지도오리(메이지 가도)가 있고, 입구 정면을 동서로 6차선 큰 도로가 직선으로 있다. 이 큰 도로를 야스쿠니 도오리(야스쿠니 가도)라고 하는데, 야스쿠니 도오리를 따라 동쪽을 향해 차로 10여 분 지점에 일본 최대 규모의 신사인 야스쿠니 신사가 있다. 즉 야스쿠니 신사와 가부키초는 하나의 야스쿠니 도오리에 이어져 있고, 권철 작가가 야스쿠니 신사를 앵글에 담게 된 것도 가부키초의 연장선이었다.

그가 야스쿠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3년 도쿄 전 도지사이자 일본 최고 극우파인 이시하라 신타로의 가부키초 정화 작전 때문이었다. 그는 가부키초에 매일 수백 명의 경찰과 입국관리국 직원을 동원해 가부키초 정화 작전을 감행했다. 불법 체류자, 불법 노동자, 불법 영업 등을 단속했는데, 주로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그 대상이었다. 이 정화 작전으로 한국인들을 가부키초에서 거의 쫓겨났고, 그 옆 동네인 오오쿠보로 밀려나 지금의 한류의 거리인 코리안 타운이 형성되게 된다. 가부키초에서 한국인들이 쫓겨나는 모습을 보면서 야스쿠니 신사가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한국인인 나에게 야스쿠니 신사가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2005년 국내 모 신문사의 촬영 의뢰로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를 촬영하게 된다. 고이즈미 총리는 2001년부터 매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왔는데, 당시는 지금처럼 그렇게 큰 이슈가 되진 않았던 때다. 2005년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도쿄 지사이던 극우파 이시하라 신타로가 망언을 하고, 고이즈미 총리가 공식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게 되자, 한중일 삼국의 긴장과 갈등이 조성되고, 야스쿠니 참배가 큰 이슈로 등장했다. 

마침 그런 시기에 야스쿠니를 촬영하기 시작했고, 어떤 힘에 이끌린 그가 이후 10년간 야스쿠니를 쉴 새 없이 앵글에 담아 왔다. 소위 ‘야스쿠니 다큐멘터리 여정’이 시작된 셈이다. 매년 정기적으로 야스쿠니를  촬영했고, 특히 극우 세력들이 전쟁을 추억하는 퍼포먼스를 펼치며 신사 참배를 하는 8월 15일은 어김없이 현장으로 달려가 취재를 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사쿠라(벚꽃)가 600여 그루 있다. 야스쿠니 신사가 세워진 다음해인 1870년 처음 심어졌는데, 이 사쿠라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벚꽃이 지고), 야스쿠니에서 환생한다(벚꽃이 피다)’로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꽃나무이다. 10여 년간 야스쿠니 신사를 촬영하면서 자연스럽게 벚꽃도 앵글에 담기 시작했는데, 그 아름다움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된다. 

권철 작가는 말한다. 일본에 20여 년간 살다 돌아왔지만 일본을 모두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일본은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야욕에 불타는 나라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막상 일상생활 속의 일본인은 전혀 다르다. 친절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질서를 잘 지킨다. 그들의 성실함, 배려심, 절약 정신, 개인보다는 나라를 생각하는 애국심. 배워야 할 대목들이다. 

권철 작가는 “문제는 일부 극우 세력들이다. 일본 극우 세력들은 점점 더 교묘하게 그들의 야욕을 실현해 가고 있다. 일본 내의 정치적 상황과 국제 정세도 이들 극우 세력들에게 유리하게 보인다. 야스쿠니 신사를 10여년 촬영하며, 이들 극우 세력들이 군국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힌 모습들을 많이 보았다.”고 일갈했다. 

그는 또, “신사 곳곳에 전쟁을 추억하며, 미화하는 상징물들이 있다. 더구나 2005년에는 태평양전쟁의 전범들을 재판하기 위한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전범들의 무죄를 주장했던 인도인 판사 라다 비노드 팔(Radha Binod Pal)을 기리는 비까지 세웠다. 그들에게 전쟁은 성전이었고, 재판은 승자들의 정치적 보복이었을 뿐”이라고 단언했다. 

2011년 3월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가 났다. 태평양 앞바다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쓰나미가 발생했고, 이 쓰나미가 해안가에 있던 후쿠시마 원전을 덮쳐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는 최악의 사고가 터진 것이다. 일본은 극도의 불안과 혼란에 빠졌다. 원전의 위험은 일본인들의 식탁까지 올라와 있었다. 2014년 그는 20여 년간의 일본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일본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나름대로 성과도 냈지만,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한국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한 결정이었다. 권철은 지난봄에 야스쿠니 사진집을 마무리하기 위해 야스쿠니 신사를 다시 찾았다. 행락객과 참배객들로 만원이었고, 벚꽃도 절정이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평화롭게만 보였다. 그런데 그의 눈에 가장 도드라지게 들어온 것은 신사 곳곳에 내걸린 욱일기였다. 욱일기는 아시아 주변국들을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상징이다. 흰색과 붉은색이 강렬하게 대비되는 그 욱일기가 신사 행사장 곳곳에 변형된 형태로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군국주의의 망령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기에 권철은 “섬뜩했다”고 토로한다. 

권철의 야스크니 사진집은 야스쿠니 신사를 두 개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 군국주의의 망령과 두 얼굴의 신사이다. 전반부의 전쟁에 대한 추억과 미화가 맹목적 애국주의가 군국주의에 대한 망령이라면, 후반부의 야스쿠니의 일상은 두 얼굴의 신사이다. 군국주의의 망령은 빤히 드러나지만, 야스쿠니의 일상은 오히려 평화롭게 보인다. 

올해는 우리나라 광복 70주년이다. 그러나 일본은 종전 70주년이라 부른다. 일본은 그들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종전이라 부른다. 권철은 말한다. 

“내 눈에는 그 평화가 불안해 보였다. 기억의 뒤편으로 잊혀 가고 있는 역사적 진실들이 안타깝게 보였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다. 야스쿠니 사진집이 그런 역사적 진실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우리가 야스쿠니 사진들을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 위 글은 <야스쿠니-군국주의의 망령> 사진집에 실린 권철 작가의 서문을 토대로 기사체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편집자] 

 #. 패전 군의들의 퍼포먼스

야스쿠니 신사에서 참전 군인들은 전쟁을 추억하고, 신세대들은 전쟁을 기념한다. 참전 군인들은 욱일기를 앞세우고, 참전 당시 입었던 군복을 다시 꺼내 입는다. 패전을 아쉬워하며, 자위권 강화를 외치며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꾼다. 아시아·태평양전쟁 패전으로 잠시 숨을 죽였던 그들이지만 이제는 당당한 걸음으로 여론의 주목을 받으며 한껏 목소리를 높인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그들은 군국주의를 곱씹고, 다시 그 부활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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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전 군인들이 모여 전쟁을 추억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권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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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두 얼굴이다. 저 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면서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전쟁을 동경하고 있다. 2차대전 참전 당시 군복을 갖춰 입은 참배객이 야스쿠니 신사를 마주보고 서있다. ⓒ권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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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장기와 욱일기를 매고 야스쿠니 신사를 누비고 있는 일본인. ⓒ권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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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대전 당시 군복을 갖춰입고 신전에 경례를 하는 일본 우익 참배객들. ⓒ권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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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스쿠니 신사에서 2차대전 당시 군복을 입고 퍼포먼스를 벌이는 참배객. ⓒ권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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