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51) 계엄선포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역임한 이범석    

이승만과 이범석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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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범석 .
‘한국군은 굶주림을 초래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사주된 집단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울발 3월 14일】 남한의 군대는 남한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공산게릴라에 대한 춘계공세를 시작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어제 군대 지휘관들에게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명령하에 촌락에서 식량을 빼앗고 마을을 불태우는 반도들을 사로잡거나 제거하라고 명령하였다. 동시에 이 대통령은 수천명의 폭도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위하여 남한에서 50마일 떨어져 있는 폐허의 제주도에 국무총리겸 국방장관 이범석과 내무장관 신성모를 파견하였다.

정부 소식통은 오늘 반란행위로 인하여 섬이 마비되었고 25만명의 섬주민 대부분은 깊은 섬 내부지역에서 해안마을로 강제이주되었다고 말했다. 정부대변인은 지난 여름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사살한 섬주민의 총수는 모두 1만5000명이며 1만여채의 가옥이 화재로 파괴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미국의)콜럼비아 교단의 카톨릭 선교사 오스틴 스위니(Austin Sweeney) 신부는 어제 서울로 보낸 편지에서 제주도민 대부분이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전했다. 일부 지역에서 주민들이 하루에 감자 한 개로 연명하고 있다고 스위니 신부는 편지에 적고 있다.

제주도에 10년 이상 거주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스위니 신부는 농부들은 섬 내륙의 농토를 버리고 섬의 몇 개 안되는 큰 해안가 마을로 이주하였다고 전했다. 섬의 반도들은 본토에 위치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운용되는 기지로부터 비밀리에 왕복운항되는 소형 선박에 의하여 잘 보급되는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자가 지배하고 있는 북한 라디오 방송은 주말 동안에 반복적으로 제주섬에서의 반란활동의 성공을 자랑하면서 “인민의 저항이 증가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

한편 남한의 군대는 남쪽해안 근처에 위치한 본토의 전남 지리산 부근의 반란세력의 중심부와 소규모 전투를 보고하였다. 남한군대는 대량공세로 지난 주 53명의 반도들을 사살하였고 다량의 무기와 군수품을 노획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반도들의 공격하고 도망치는 전략은 산속의 진지로부터 전광석화같은 야간기습을 감행하여 농촌의 촌락을 계속 괴롭히고 있다. 전투의 중심부는 10월 여순반란의 장소인 순천의 북부 40마일 지점인 것으로 보고되었다.’-뉴욕타임즈 1949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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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범석의 부인 김마리아.
이범석(李範奭, 1900년~1972년)은 독립운동가, 군인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항주군관예비학교를 거쳐 군인이 된다. 1920년 3월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의 진로에 말똥을 뿌려두었다. 일본군은 말똥이 오래된 것을 보고 독립군이 오래전에 지나간 것으로 알고 안심하였다. 주력부대 5만이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이범석 부대는 적군이 방심한 틈을 노려 집중사격을 가하며 승리를 거둔다. 

청산리 전투에서의 대승 소식을 접한 이승만(李承萬)은 이범석과 서신 연락을 주고받았고, 선물과 피복을 보내주었다. 파커 만년필을 선물로 보내주었는데 “이제는 나도 전 세계를 향해 자랑할 밑천을 얻었소. 청산리 전투의 대승리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외교를 펼칠 수 있는 중요한 선전자료를 얻게 된 것이요. 청사에 길이 빛날 대첩을 이곳 동포들과 함께 충심으로 축하하는 바이오”라며 서신으로 격려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자 광복군사령부 참모장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주석 김구(金九), 구미위원장 이승만의 주선으로 미국과 연결하였고, 미국 첩보국인 OSS와 합작해 잠수함과 항공기를 이용하여 광복군을 잠입시키기는 독수리작전을 준비한다.

일제는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8월 18일 이범석은 김포공항에 입국했다가 일본군에 의해 저지당하여 다시 상하이로 돌아간다. 1946년 6월에 귀국하고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 약칭 족청)을 조직하고 반공주의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단원이 불과 9개월 만에 20만 명에 이르렀고, 1948년 10월 무렵에는 무려 120만 명으로 성장하였다. 족청은 ‘정령군 및 경찰을 증대시키고 지원할 목적으로 우익청년군을 구성해야 한다’고 맥아더에게 보고한 하지의 구상에 따라 결성됐으며, 미군정으로부터 운영비를 정식으로 지급받았다.  

'제주신보'도 ‘조선민족청년단 중앙간부 훈련생 모집’이란 제하의 기사에서 “지난해 중앙에서 결성되어 각 지방에 그 조직을 뻗쳐오던 조선민족청년단에서는 본도에 조직위원이 내도하여 칠성통에 제주도단부 임시사무소를 두고 지방청년들의 많은 협력을 요망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1947년 11월 5일 드디어 족청 제주도단부 창립위원회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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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군 시절 이범석.

위원장에 최남식(崔南植), 부위원장에 문봉택(文奉澤)·오광해(吳光海) 등이 선출되었다. 제주도건준 부위원장을 지낸 바 있는 최남식은 그날로 사의를 표명, 새 단장에 백찬석(白璨錫)이 피선되었다. 또한 학생조직을 확산시키기 위해 1947년 12월 7일 제주극장에서 '민족학생단' 창립총회를 갖고 학생과장에 정태규(鄭泰圭), 총무부장에 김광우(金光祐) 등을 선출했다.  

1948년 7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식을 가졌고, 이범석을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기용하였다. 8월 15일 군정이 끝났음을 선언하고 대한민국은 독립하였다. 이범석은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 진압 당시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면서,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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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군 사진 (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이청천, 이범석, 이름 미상).
해방공간에는 38선을 넘어온 반공청년 조직이 많았다. 서북청년회(선우기성)를 비롯하여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전진환), 국민회청년단(강낙원), 대한민주청년동맹(유진상), 한국광복청년회(오광선), 대한독립청년단(서상천), 대한민족청년단(이범석), 대동청년단(지청천) 등 꼽을 수 있다. 이들 반공청년단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됐다. 당시 대한청년단은 총재 이승만 대통령, 최고 지도위원 장택상(張澤相), 지청천, 전진한(錢鎭漢), 서상천(徐相天), 유진산(柳珍山), 강낙원(姜樂遠), 단장은 신성모(申性模) 씨 등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1953년 9월 10일, 이승만의 대한청년단 해산명령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국전쟁 발발 1년 후, 이승만은 먼저 정당을 만들고자 했다. 대한국민당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친여 정당이었다. 대한독립촉성회와 대한청년단을 합쳐봐야 전체국회의원수의 1/4에도 못 미치었다. 결국 이승만은 이범석과 손을 잡게 된다. 이범석에게는 조선민족청년단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있었다. 이승만은 이범석에게 정당을 만들어줄 것을 부탁하였고, 이범석은 1주일간 하루 평균 3차례 강연을 하는 강행군을 하게 된다. 결국 자유당이 탄생했다. 

그렇다만 제주도에서 벌어진 제주4·3의 대량 학살극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초토화 작전 당시 중앙의 군·경 수뇌부 중 한 사람으로 이범석을 꼽고 있다. 그 외 수뇌부는 콜터 장군(John B.Coulter)· 로버츠 준장(William L. Roberts)·이응준(李應俊)·윤치영(尹致暎)·신성모·문봉제(文鳳濟)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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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정진군(좌측 네 번째부터 장준하, 노능서, 김준엽, 한사람 건너 이범석) .

‘【목포】정무에 다단한 국무총리 이범석 장군은 제주도 시찰을 끝마치고 귀임 도중 해군 514호 특무함정으로 지난 10일 하오 6시 40분경 원(元)제5여단장 정(鄭)해군목포기지사령관, 이(李)도지사, 김(金)경찰국장을 비롯한 관민, 유지, 다수 환영리에 목포에 상륙하였는데 해군사령관 숙사에서 1박의 여정을 푼 다음 군경 관계당국과 요담을 마치고 12일 오전 9시 20분 특별열차로 광주로 향하였는데, 이(李)국무총리는 목포 일선기자단과 회견석상에서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었다.

△시찰의 용무 : “첫째로는 가장 근로적이고 단결력으로 능히 자급자족할 수 있는 제주도민의 불행을 살피고, 둘째로는 잔비 철저소탕을 지도하고 민중을 위문하여 제주도 재건을 촉진코자 한 것이다.”

△치안의 현상여하 : “대단히 양호하다. 그 도(度)는 날로 증가되고 있다. 민중협력이 요망되고 있는 이때 민중은 이제야 비로소 공산도배들의 정치적 음모와 허위선전을 깨닫고 군경에 적극 협력으로 방금 한라산정을 포위하고 대규모 소탕전을 전개하고 있으며 부락의 자위시설을 위하여 도민들의 밤낮 없이 노력하고 있는 부흥기상은 약동하고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 수립 후 급진적으로 민중이 정부에 협력태세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의 식량문제 : “그렇게 긴박하지 않은 것을 느꼈다. 폭도들의 위협으로 약탈당한 식량을 산중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민중에게 이를 공급하고 잡곡을 위주로 한 지역산 감자 등이 상당히 저축되고 있다. 단 문제의 군경 식량보급은 수일 전 농림부에 지시 명령하였으므로 머지않아 원활화 할 것이다.”’-동광신문 1949년 3월 15일

남북한 친일파 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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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시절의 이범석.

‘대통령령 /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서 제정한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을 이에 공포한다.

대통령 이승만 인(印) 1948년 11월 17일/국무위원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국무위원 내무부장관 윤치영/국무위원 외무부장관 장택상/국무위원 재무부장관 김도연/국무위원 법무부장관 이인/국무위원 문교부장관 안호상/국무위원 농림부장관 조봉암/국무위원 상공부장관 임영신/국무위원 사회부장관 전진한/국무위원 교통부장관 허정/국무위원 체신부장관 윤석구/국무위원 이윤영/대통령령 제31호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하여 동지구를 합위지경(合圍地境)으로 정하고 본령 공포일로부터 계엄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 계엄사령관은 제주도주둔 육군 제9연대장으로 한다.’-대한민국 관보(1948년) 제14호 1948년 11월 17일

“북한은 이념적으로 공산주의 중국이나 동유럽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적대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에 더 가깝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남한의 이승만 정권을 가리켜 친일파를 숙청하지 않은 친일정권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김일성 치하의 북한문화를 연구하면서 확인했다. 김일성은 친일파를 숙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일성은 이승만 정권보다 친일 인텔리를 환영했고 그들에게 관대했다. 김일성은 친일 인텔리에게 정부의 고위직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우상화작업을 하게 했다. 일제가 해왔던 것처럼 히로히토와 같은 우상화 작업을 해나갔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상화에 동원한 수사(修辭)를 그대로 빌려왔다.” - B.R.마이어스(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북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

B.R.마이어스는 김일성 치하의 문화에 대한 개척적인 연구라 할 만한 『한설야와 북한문학』을 출간했다. 지금은 부산 동서대학교 국제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객원 편집자로 있는 <디 어틀랜틱>지를 위해 문학비평을 쓰는 것 외에도 <뉴욕 타임스>, <월 스트리트 저널>, 기타 학술 출판물에 정기적으로 북한 관련 기사를 기고하고 있다. 그는 2001년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라는 저서를 통해 북한의 본질을 날카롭게 꿰뚫으며, 북한은 봉건왕조에 가깝다는 논리를 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초대 내각에 대해 친일파를 등용한 반민족적인 정부로 규정했다. <대한민국의 초대 내각 분포도>를 보면 민희식 교통장관과 윤석귀 체신장관 정도가 부일협력자나 친일인물로 보인다. 북한의 주장처럼 남한의 내각은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한 반민족적인 내각이 아니다. 북한의 남한에 대한 주장은 남한 흠집내기에 불과했다. 물론 김일성 내각에서도 대부분이 독립운동 세력, 즉 항일세력으로 포진되어 있었다. 

북한에서 친일을 했던 인물들이 많다. 그것을 살펴보면, □부주석 김영주(일제 헌병 보조원) □사법부장 장헌근(일제 중추원 참의) □상임위원장  강양욱(일제 도의원) □문화선전성 부부상 정국은(아사히 서울지국 기자) □보위성 부상 김정제(일제 양주군수) □문화선전성 부상 조일명(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 □부수상 홍명희(일제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 □초대공군 사령관 이활(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인민군 9사단장  허민국(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강치우(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조선로동당 제주4.3사건 주동자 김달삼(일제 일본군 소위) □노동신문 창간발기인, 노동신문 편집부장 박팔양(일제 만선일보 편집부장) □김일성대 교수 한낙규(일제 검찰총장) □행정10국 산업국장 정준택(일제 광산지배인 출신, 일본군 복무) □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 한희진(일제 함흥철도 국장) □남로당 서열2위 이승엽(일제 식량수탈기관 식량영단 이사) 등 수없이 많다.

이외에도 북한 공군간부 20명은 대부분 일본군 출신이며, 만주군 출신으로 허민군 9사단장, 강치우 기술부 사단장, 김기옥 제1연대장, 김한욱 제2연대장 등으로 친일파를 숙청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거짓이다. 대한민국에도 유독 친일파 출신 군인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이나 김일성이나 내각 자체에서는 친일파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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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7월 22일 첫 국무회의에 참석한 이범석 장군 (좌측 하단).

계엄령선포는 정당한가 

이승만의 명의로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 전역에 발동된 계엄령(戒嚴令, martial law)은 마구잡이 학살의 길을 열어주었다. 여기에서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로버츠(William I. Roberts) 고문단장은 계엄법도 없는 상태에서 계엄령을 선포하는 바람에 한국군 지휘관들조차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하자, 12월 1일 국방부 참모총장에게 계엄령에 관한 문서를 보내 계엄령이 실시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계엄령(martial law)에 관한 문서를 동봉한다. 이 문서가 귀하의 모든 지휘관들에 발표되어서 그들이 계엄령이 무엇인지, 언제 발표될 수 있는지, 누가 발표하는지, 그리고 그것의 영향이 무엇인지 숙지하도록 할 수 있다.’-“Martial Law,” December 1, 1948, RG 338: Records of US Army Commands, Entry: Provisional Military Advisory Group(1948-1949) and 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1949-1953), Box 4.

국방부 참모총장에게 보내진 이 문서를 통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계엄령 선포 당시 국내에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인해 계엄령의 구체적 내용을 한국군 수뇌부조차 몰랐다는 점이다. 셋째, 미군이 보내준 문서를 통해 비로소 한국군이 계엄령의 내용을 알게 됐다는 점이다.

시군사고문단 문서에 실린 이범석 국방장관의 보고내용에도 “끈질긴 군사작전과 11월 16일 선포된 계업령의 지속 때문에 상황은 급속히 양호한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임시군사고문단(PMAG) 단장 로버츠 준장 공한철, 1948.12.14.)며 분명히 ‘계엄령’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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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1월 1일 한국광복군 창설 기념사진 .

“먼저 민심수습 하라”  

제헌국회(制憲國會)는 1948년 5월 31일 구성되고 1950년 5월 30일까지 활동하였다. 미군정기(美軍政期)부터 시작되어 동년 7월 17일 헌법을 제정, 공포하였으며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한 김구, 김규식은 불참했다. 1948년 8월 15일, 광복3주년 기념식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과 함께, 이승만은 제1공화국 제1대 대통령 취임식을 치렀다. 이범석 국방장관은 1948년 12월 8일 국회에서 제주4·3사건에 관한 보고를 한다.

‘이범석 국무총리는 12월 8일 상오 국회에서 지난 4월 이후의 국내 소란사건에 관하여 보고한 바 있는데 그 보고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제주도사건 : “4월 3일 사건 발생 이후 국군 제9연대장은 경찰과 협력하여 무장폭도 진압에 분투한 결과 1,000명 내지 2,000명으로 추산되던 폭도 수는 현재 약 50명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더욱이 11월 16일 계엄령 시행으로 급속도로 사태의 호전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4월부터 12월까지의 전투상황은 다음과 같다. 즉 동 기간 중 육군은 연인원 약 5,000명이 출동하여 1,000명 내지 2,000명으로 추산되는 폭도와 102차에 걸쳐 교전하였는데 적에게 준 손해는 유기시체 421, 포로 5,719 인이며 국군 측의 손해는 전사 3, 전상 8이다. 그리고 해군은 함정 7척, 인원 303명이 출동하여 해상봉쇄에 노력한 바 있는데 그동안의 전과는 선박나포 5척이다. (2) 호남사건 : (후략)’-한성일보 1948년 12월 10일

이범석 국무총리는 신성모(申性模) 내무장관을 대동하고 1949년 3월 10일 오후 1시 제주비행장에 도착하였다. 무참히도 파괴된 도내 각 방면의 시설을 시찰하는 동시에 부상한 국군장병을 위문하였다, 그리고 도청 앞 광장에서 개최된 환영대회에서 “군·경, 관·민은 폭도토벌에 노력하는 한편 민심수습에 협조하여야 할 것이며 또한 토벌을 능률적으로 하는 한편 선무공작을 활발히 하여 관대한 태도로써 폭도의 반성을 촉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본도의 식량부족에 대하여는 이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하여 곧 적절한 대책을 세우겠다”고 훈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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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범석 장군(맨 앞줄 가운데)과 광복군과 미국전략정보국(OSS)요원들.
이범석은 3월 15일 밤 귀경하고 16일 오전 10시 반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내외 기자단과 만난 후 “2월 15일 군은 해변가의 부락부터 수색을 시작하여 점점 한라산 쪽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데 수색 숙청된 부락은 경찰에 맡기고 부대는 한라산 서남쪽에서 폭도의 주력에 대하여 총공격을 하였다. 제주도의 무장폭도는 약 260명이며 그 외에 추종하는 민중은 총 한 자루에 20명씩 죽창을 들고 따르고 있다. 그간 소탕전에 의하여 폭도는 산골짜기로 도피 중에 있다. 그리하여 3월 5일부터는 귀순자가 매일 증가하여 하루에 수백명씩 되고 있다. 한편 도 당국에서는 파괴된 부락을 건설하며 부락자위대를 설치하고 다시 폭도가 기동 못하도록 조직하고 있다. 군경민의 관계는 지극히 원만하다. 그리고 제주도 연안에는 이북 괴뢰정권 소유의 기선이 나타나 한라산의 폭도와 화광(火光)신호를 한 일이 있다.”고 말하였다.

'국무총리의 제주도 상황 보고/ 최근 제주도를 시찰하고 돌아온 국무총리 이범석은 3월 17일 국회에서 제주도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하여 제주도에 대한 상황 보고를 했다. 국무총리의 보고 요지는 다음과 같다. 폭도 소탕작전은 서로 다른 3단계 과정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1단계는 반란군으로부터 주민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전 지역에 병력을 배치하고 주민들의 이동을 적절히 통제하는 일이다. 제2단계는 충직한 주민들의 협조로 폭도들을 마을에서 산으로 몰아내는 일이다. 제3단계는 현재 진행 중인 마지막 단계의 작전으로 섬에서 반란군의 마지막 흔적까지 일소하는 일이다. 현재 선무공작에 영향을 받은 많은 폭도들이 토벌대에 투항하고 있다. 하루에 500명이 투항하였다.

제주 도민들에게 ‘엄청난 압력’을 행사했던 군경토벌대는 그러한 관행을 중지하도록 명령받았다. 현재 제주도민들은 식량과 의복, 그 외 생필품이 필요하다. 농림부장관과 상공부장관이 며칠 전 이러한 보급품을 실은 첫번째 선박을 보냈다. (F-4) 논평 : 국무총리의 보고는 매우 낙관적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이승만 대통령은 해군소장 손원일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추가보고를 하도록 조치했다.'-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9년 3월 21일~1949년 3월 23일 (No. 1093, 1949. 3. 23.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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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월 김구와 면담한 도노번 소장, 김구와 도노번 사이에 이범석.

소련선박 출현설 유포

‘소련제 무기가 남한의 폭도들에게서 노획됨-선박의 신호가 포착됨 【3월 16일 서울발】 한국정부에서 국방장관을 겸하고 있는 국무총리 이범석은 오늘 기자회견에서 소련은 남한내의 반정부 게릴라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게릴라들의 마을에 대한 공격이 심한 남부의 2개 도 지역과 제주도를 순시하고 돌아온 국무총리는 소련제 경기관총과 무기들이 폭도들로부터 노획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소련이 한반도 북쪽 점령지역으로부터 제주도의 훈련된 게릴라 지도자들에게 무기를 밀반입하고 있다는 추가적인 증거가 있다고 덧붙였다.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출한 서면보고에서 신성모 내무장관은 5천t급 소련선박이 제주도 해안에 자주 출몰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소련 선박들과 도내 산악지역에 있는 폭도들 간에 점멸신호통신이 포착되었다고 덧붙였다. 신 장관은 이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국무총리를 수행했는데, 이것은 4월 1일 이전에 제주도에 존재하는 약 500명에 달하는 폭도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무총리는 시간 내에 게릴라들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이 진행중이라고 말했다. 국무총리는 자신이 기자회견을 요청한 이유는 대통령이 자신에게 좋든 나쁘든 모든 종류의 뉴스를 제공하라는 지시 때문이라고 말했다.

총리는 제주도민들은 식량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산악으로 이루어진 섬의 주요 생업은 어업이다. 제주도는 식량이 부족한 지역이다. 내무장관은 대통령에게 만일 제주도민에게 식량, 옷, 그리고 주거지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산으로 돌아가서 폭도들과 합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하였다. 신 장관은 섬 주민들이 요청한 구호품의 상세목록을 제출하였다. 그는 섬의 근해에 정체불명의 잠수함이 자주 출몰한다고 보고하면서 그것들이 소련선박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첨부하였다. 총리는 전라남북도의 순시에서는 폭도에 대한 군경의 작전이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말하였다.’- 『뉴욕타임즈』 1949년 3월 17일 

1948년 10월 8일 제주해상에서 ‘인민공화국 깃발이 매달린 괴잠수함’이 출현했다는 보도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출처는 아래의 미군 보고였다.

‘1948년 10월 8일 오후 5시 10분, 미군 커리어 비행기 조종사는 북위 33도 56분, 동경 126도 48분 지점에서 잠수함 1대를 발견했다.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을 단 그 잠수함은 10~12노트 속도로 동진하고 있었다. 정체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그 배가 미국이나 영국 것은 아니다.’-Hq. 6th Inf Div,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85, October 8, 1948.

처음으로 괴선박 출현설이 나온 것은 1948년 7월 11일이다. 미군보고서는 “붉은 깃발을 단 북한선박 1척이 제주도 부근에서 해안경비선에 의해 나포됐다”고 긴급히 보고했다. 그러나 이틀 후 “나포한 선박은 놋쇠를 시장에 팔기 위해 가던 중”이라고 정정보고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한 달여 후인 8월 17일 또다시 괴선박 출현설이 불거져 나왔다. 이번에는 아예 괴선박의 정체를 ‘소련선박’으로 못박았다. 미군은 발견 당일 ‘CIC(방첩대) 긴급보고’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했다.

‘8월 17일 새벽 4시 제주도 해안을 벗어나 순찰하던 해안경비대 경비선 ‘광주’는 5백톤급 소련선박을 발견했다. 그 소련선박은 정지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무시한 채 갑판에 설치된 기관총으로 경비선을 향해 발사했다. 보고된 피해나 사상자는 없다(F-6).’-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13, August 17, 1948.

소련‧북한선박 출현설은 계속 이어졌지만 미군 측의 ‘불확실하다’는 논평을 내놓았다.

‘소련표시를 한 3천톤급 선박 2척이 제주도 삼양리 약 5마일 지점에서 한국인 해안경비대원에 의해 1월 3일 오후2시 발견됐다. 해안경비정이 이를 추격했으나 공해상이기 때문에 정지시킬수 없었다. 미확인 선박은 4일 오후2시 30분에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는데 부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논평>한국군은 이 선박이 제주도 유격대를 지원하기 위한 북으로부터의 물자를 싣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견해는 전에도 한국군에서 나온 바 있지만 불확실하다.’-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29, January 5, 1949.

한편 소련은 소련잠수함 출현설이 그치지 않자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모스크바 19일 발 AFP합동】소련 해군기관지 라니프르트지는 18일 소련잠수함이 제주도 근해에 출몰한 일이 없다고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남한정부 대변인의 최근 성명은 허위이며 남한정부는 2개월 전에 공포하여 작년 12월에 해제하기로 된 제주도의 계엄령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러한 주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미군은 상금(尙今)도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데 이는 미 독점자본가들의 한국에 관한 계획과 일치되는 것이다”’- '東光新聞', 1949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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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 등이 친필서명이 있는 제주도 계엄문서(1948.11.17).
1949년 3월 10일 제주시찰에 나섰던 이범석(李範奭) 총리와 신성모(申性模) 내무부장관은 마무리 진압을 강조하면서 “여러 차례 소련선박이 출현하고 있으며 북한선박이 나타나 한라산 폭도와 화광(火光) 신호를 교환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를 했다.

‘이범석 국무총리와 동도 제주도사태를 시찰한 신성모 내무장관은 아래와 같은 보고를 공보처를 통해서 발표하였다. “도지사 경찰 군 당국의 보고에 의하면 국군은 ○○○명으로 추산되는 무장폭도에 대하여 소탕작전을 개시하였는데 군경이 협력작전을 하면 폭도 반도는 3월 이내로 완전 소탕될 것을 확신한다. 현재 당면하고 있는 긴급하고 곤란한 문제는 전기 작전 이외에 재민(災民) 및 귀순자의 구호문제로, 매일 증가되고 있는 그들에게 식량 의복 주택을 예비하지 않으면 그들은 다시 산중으로 돌아가 반도에 가담할 것으로 이에 대한 책임은 중대한 것이다.

동시 경찰은 해안 산록지대의 탈환 부락경비에 종사하였다. 또 주위 해안선에는 누차 500톤의 소련선박이 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선박이 상선인지 전투함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반도와 통신연락을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며 그 외 잠수함이 해안선 근방 1마일 지구에 출몰하고 있는데 이 출몰 목적은 무기공급과 훈련받은 반도를 입산시키는 것에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과 같은 제반 사정을 보아 소탕작전의 완벽을 기함에는 다음과 같은 물자가 긴급히 소용된다.

(1) 무기 (2) 식량 6만 석 (3) 의류(광목) 10만 필(疋) (4) 해군함정(충무공호급) 4척 (5) 트럭 50대 지프 50대 (6) 의약품 (7) 교통부에 배속된 선박 엘리자베스호는 이 지방에 긴요한 것임.”(같은 기사 독립신문․동아일보․자유신문․조선일보 49. 3. 17 / 동광신문 49. 3. 18)’-조선중앙일보 1949년 3월 17일

‘일부에서는 게릴라들이 본토로부터 또는 북한으로부터 병참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러한 보고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 한국 해군정의 지속적인 순찰과 공중정찰 및 해안마을에 대한 경찰의 빈틈없는 방어는 외부 지원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April 1, 1949.

제주지역에서 계속 터져 나오던 괴선박 출현설은 ‘근거없는 낭설’임이 밝혀졌지만, 10월 8일 괴선박 출현설이 나온 직후인 10월 11일에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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