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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우리 곁으로 온다. 매주 한편씩. 시보다 사람이 큰 시인 김수열. 제주 섬에서 나고 자란 그가 30여년 정들었던 교단을 떠나며 시를 담은 도시락(島詩樂)을 들고 매주 월요일 아침, 독자들과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살다가 시가 된 제주 시인과 그들의 시를 김수열 시인이 배달한다. 섬(島) 시인들이 토해 낸 시(詩)가 주는 소박한 즐거움(樂)이 쏠쏠할 테다. 시 낭송은 시를 쓴 시인이 직접 맡고, 김수열 시인은 시 속에 살아 숨 쉬는 소리를 끄집어내 우리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가까운,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닮은 시인의 목소리로.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가슴을 든든히 채워줄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 산책’에 <제주의소리> 독자들도 함께 동행하길 기대한다. [편집자]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島詩樂) 산책](29) 16번 국도 / 오시열

바람 부는 날이면 바람 따라 달린다. 동쪽 16번 국도.

그대의 입맞춤이 서성이는 곳. 작은 산등성이 내 마음처럼 누워 있는 곳. 젖꼭지에 나무 한 그루 올려놓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곳. 나무 위에 산새 한 마리가 필릴리 필릴리 우는 곳. 꿈 속 푸르스름한 안개가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지는 곳. 억새꽃 하얗게 머리 풀고 우는 곳. 늘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곳. 사글세를 사는 슬픔이 빈 방에 쓸쓸히 앉아 나를 기다리는 곳. 질긴 개민들레 지천으로 피어 있는 곳.

바람이 나를 따라 달리는 길. 동쪽 16번 국도


오시열: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노란 잠수함을 탄다』가 있음.

흔히 중산간 도로라고 불리는 16번 국도.
제주시를 기점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는데 동쪽 16번 국도는 봉개에서 회천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됩니다. 와흘, 대흘, 선흘 지나 16번 국도는 송당으로 이어집니다.
송당 지나 수산으로 접어들면 저만치 일출봉이 마중하는 길입니다.
길 양편에 나란히 오름을 데리고 달리는 길, 가끔은 푸르스름한 안개가 밀물처럼 왔다가 꿈결처럼 스러지는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16번 국도는 늘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길입니다. 입맞춤이 서성이기도 하고 슬픔이 빈 방에 쓸쓸히 앉아 당신을 기다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억새꽃이 하얗게 기다리는 길입니다.
이 가을
당신을 16번 국도로 초대합니다.
상념은 잠시 내려두시고 빈 몸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 김수열

김수열: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 어떠랴』, 『생각을 훔치다』, 『빙의』 등이 있음. 제4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 시·시낭송 / 오시열 시인
* 도시락(島詩樂) 배달 / 김수열 시인
* 영상 제작 / <제주의소리> 박재홍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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