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사는 이야기㉜>

2.jpg

추석 이틀 전. 허름한 식당에 파나마모자를 쓰고 한껏 멋을 부린 노인과 후줄근한 점퍼 차림을 한 70대 노인이 들어선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이말 저말 하는 노인들의 대화를 엿듣는 게 무슨 관음증처럼 재미가 쏠쏠하다.

박 노인 : 낼모레가 추석인데, 뭐 생각나는 게 없어?

김 노인 : 없어…. 어릴 때 생각이 나긴 하지. 그땐 명절과 제삿날을 손꼽아 기다렸어. 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으니까.

박 노인 : 또 하나 있어. 운동회와 소풍 가는 날.

김 노인 : 명절을 앞두고 이발관과 목욕탕이 사람들로 득시글거렸지. 목욕은 명절 때만 했느니             땟국물이 한 바가지는 나왔어.

박 노인 : 제수를 장만하려고 오일장이나 재래시장도 대목이었지. 명절 옷도 거기서 샀으니까.

김 노인 : 이젠 명절이고 뭐고 다 귀찮아.

박 노인 : 그래도 가족들이 고향집에 모여 조상의 덕을 기리는 차례를 지내는 건 미풍약속이라              고 해야겠지.

김 노인 : 요새 것들이 조상을 알아? 잘 되면 제 탓이고 안 되면 조상 탓이나 하지.

박 노인 : 어쨌거나 흩어졌던 가족이 한 자기에 모이는 건 즐겁게 기쁜 일이잖아?

김 노인 : 가족? 웬수같은 새끼들. 부모 등골 빼먹기에 혈안이 된 놈들이지.

박 노인 : 그런 소리 마. 타향에서 얼마나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는데.

김 노인 : 고향은 무슨 얼어 죽을…, 어디서나 정 붙여 살면 고향이지.

박 노인 : 그럼 명절 때가 되면 민족 대이동을 하는 이 나라 백성들의 귀소본능, 혹은 모태회귀            를 어떻게 설명할 거야?

김 노인 : 지 에미 보러 오는 거지, 날 보러 오는 게 아니야.

박 노인 : 단단히 삐쳤구나. “신은 자신이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어서 어머니라는 존재를 만              들었다”고 하잖아. 그러니 자네도 마누라한테 잘해.

김 노인 : 빙충이 같은 할망구한테 잘 하고 말 것도 없어.

박 노인 :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여성상위시대의 이혼사유’야. 잘 들어!

2·30대 - (남편이 아내에게) 아침밥을 해 달라고 요구할 할 때
40대 - (남편이 외출하는 아내에게) 어딜 가느냐고 물어볼 때
50대 - (남편이 아내에게) 월급을 어디에 썼느냐고 따질 때
60대 - (남편이 외출하는 아내에게) 동행하겠다고 사정할 때
70대 - (남편이 아내에게) 오늘 밤만 합방하자고 제의할 때
80대 - (남편이) 뻔뻔하게 아직도 살아 있을 때

김 노인 : 제기랄! 아니 남편으로서 당연한 권리인 합방을, 그것도 하루만 하자고 제의하는 것도 이혼사유가 된다는 말이야?

박 노인 :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어, 잘 들어!

(돈은 잘 버는데 섹스가 안 되는 남편에게) “인간아, 밥만 먹고 사냐?”
(돈은 못 벌고 섹스만 잘 하는 남편에게) “네가 인간이가? 짐승이제.”
(돈은 못 벌고 섹스도 못 하는 남편에게) “나가 디지라!”

           이 엄정한 기준에 따르면 자넨 자가 죽어야 할 판인데, 이래도 상황파악이 안 되냐?             황혼이혼이 코앞이야, 임마!

김 노인 : 이런 우라질 놈의 세상, 빨리 하직하고 싶다.

박 노인 : 얌마, 그게 어디 맘대로 되냐.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시(詩)가 생각나. 그는 인생을             부싯돌 불꽃같다고 했어. 잠시 왔다가 가는 인생인데 왜 이리 고단할까?

김 노인 : 공자님이 ‘칠십이종심소욕불유거’라고 했어. 70이 되면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              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꼴린 대로 살라는 거야. 이 나이에 내가 누             구 눈치 보고 살겠어?

박 노인 : 그래, 꼴린 대로 살아. 하지만 이건 기억해. 불교 최초 경전 ‘숫타니파파’에 나오            는 유명한 문장이야.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은 사자처럼 /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은 연꽃처럼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문장은 결국 자기 구원에서 타자 구원으로 나가라는 부처의 명령, 곧 수행의 완성을           의미하는 거야.

김 노인 : 미안하지만 난 크리스천이라구. 부처의 명령에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어.

1.jpg
▲ 장일홍 극작가. ⓒ제주의소리
박 노인 :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낼모레 한가위엔 일년           중 가장 크고 밝은 보름달이 떠오르겠지. 그 달은 남녀노           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만인에게, 방방곡곡에 공평히           비칠 거야. 그 공평하게 자애로운 달빛처럼 오로지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게 아니라 어려운 이웃도 돌아보             면서 섬김과 나눔의 삶을 함께 어기영차! 하면서 살아가             자는 거지.

김 노인 : 알았어. 지금 이 순간부터 나도 ‘무소의 뿔처럼’혼자            서 갈테니 아무도 날 잡지 마, 건들지도 마.

김 노인은 술값을 내지 않은 채 보무도 당당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사라져 갔다. / 장일홍 극작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