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그래서 감히 묻습니다. “이 아름다운 자연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정직할 수 있는가”를…

1.jpg
▲ 2013년 11월 어느 날 아침 첨단로7길 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멀리 사라봉과 별도봉이 보입니다. 이 아득한 곳에 어째서 지상 6층 높이의 아파트가 가능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허가권자에게 묻습니다. “이 아름다운 경관에 한 점 부끄럼이 없는지”를… ⓒ 강정홍

아침 산책길입니다/ 한라산을 바라봅니다/ 소나무 향기가 코끝에 스칩니다/ 산새들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습니다/ 어느새 나도 그 일부가 됩니다/ 바람 따라 내 생각도 두둥실 하늘에 닿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집니다/ 한라산이 보이지 않습니다/ 대여섯 걸음 앞도 분간할 수 없습니다/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합니다/ 노루 세 마리의 검은 그림자가 앞을 지나갑니다/ 이미 나는 잔솔밭에 서 있습니다/ 저 멀리서 바람이 달려옵니다/ 억새들판을 가로질러 소나무 숲을 지나고 무덤 위를 스치며…/ 그 기세에 눌려 순간 숨을 죽입니다/ 이때 잔솔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점차 빨라집니다/ 내 주위를 빙빙 돕니다/ 그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인간의 탄식처럼 낮고 삭막한…/ 한시 바삐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떼놓는 순간/ 한 그루의 잔솔이 나를 향해 달려옵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굴렀습니다/
아! 꿈이었습니다.

파헤쳐버린 잔솔

나는 오늘 아침도 이른바 ‘첨단과학단지’ 산책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잔솔밭은 이미 아파트를 짓는다고 파헤쳐지고, 공사장을 가린 철판이 시야를 가로막습니다. 그곳에 터 잡아 살고 있던 노루와, 그 많던 꿩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제는 ‘남의 땅’이 돼버린 이곳을 바라보면서 감상(感傷)에 젖는 건 감정의 낭비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자연을 오로지 ‘생산의 요소’로만 규정하는 폭력성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다 자라지 못한 잔솔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 심는 ‘자연에 대한 감수성’쯤 그 폭력성 앞에선 한낱 웃음거리일 뿐입니다.

한때 ‘망국송’이란 억울한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그러나 소나무는 늘 가까이 있어, 우리와 함께 풍상을 겪어온 나무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금줄에 솔가지를 꽂아 부정을 물리고 사람이 죽으면 소나무 관 속에 누워 솔밭에 묻히는 것이 우리의 일생이라”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 속의 한을 달래주는 것이 바로 은은한 솔바람입니다.(신영복의 ‘나무야 나무야’ 26쪽)

그런 소나무가 재선충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일정 고지 이하의 소나무는 전멸할지 모른다는 우울한 소리까지 들립니다. 이거 어찌합니까. 모진 병에 시달리면서도 자손을 키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매달았던 솔방울마저 터뜨릴 땅이 이미 황폐해 버렸으니…. 그래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정녕, 재선충병으로 떠나간 그 자리에, 여기서 자란 잔솔들을 옮겨 심을 여유가 없었는지…. 아직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는 들리지 않습니다. 나의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자연 속에서의 ‘관계의 신성함’

한라산에 구름이 가득합니다. 한라산이 구름 속으로 들어간 것인지, 구름이 한라산 품에 안긴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꿩 10여 마리가 한꺼번에 날아올라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소나무 숲에서 유난히 시끄럽던 까치들도 그 뒤를 따릅니다. 그냥 그것을 바라보며, 느끼며, 그들과 일체화하는 것, 그게 마냥 좋습니다. 나를 떠나는 순간입니다.

역시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본다는 것은 아직 아름답지 못한 마음속에 아름다운 인식과 사랑을 심는데 있다”는 말은 멋진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에서 우리가 얻는 게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상호 관련성, 그리고 조화로움, 그러나 연약함, 어쩔 수 없는 덧없음, 아픔, 그리고 미학, 약간의 지혜까지 그곳에서 배웁니다. 내 비록 아둔하지만….

당신과 나, 그리고 저들 모두가 언제나 전체의 한 부분입니다. 각각 나름의 온전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 ‘아름다운 제주’의 거주자입니다. 그 ‘장소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것과,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아는 것은 긴밀하게 관련됩니다.

저 소나무가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렸듯이, 저 꿩이 억새밭에 터 잡아 살아가듯, 저 조랑말이 초지에서 새벽의 기운을 즐기듯, 인기척에 놀란 저 노루가 덤불 속에 숨어 숨을 고르듯, 우리 모두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그렇게 살고 있으며, 그리고 죽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갑니다.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큰 것은 큰 것대로 각자 중심에 서서, 그렇게 서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거기엔 혹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생명을 얻고, 그리하여 죽어 다시 땅 전체의 생명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는 것, 그게 바로 ‘자연 속에서의 관계의 신성함’입니다.

2.jpg
▲ 잔솔밭은 이미 파헤쳐지고, 공사장을 가린 철판이 시야를 가로막습니다. 이곳에서 터 잡아 살고 있던 노루와, 그 많던 꿩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자연을 함부로 하는 것은, 외적 자연 그 자체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있는 내적 자연을 억압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개발이 예정돼 있는 곳에 뿌리를 내린 어린 소나무들이지만, 재선충병으로 허전해진 곳에 옮겨 심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강정홍

땅에 책임지는 태도

그렇습니다. 저 빛나는 한라산과, 흘러가는 조각구름과, 아침 햇살을 받아 빛을 발하는 나무와, 들킬세라 바위 아래 몰래 피어 있는 이름 모를 들꽃과, 노루와 꿩, 그리고 까마귀와 까치, 저 산비둘기, 가끔 장단 맞춰 흥을 돋우는 딱따구리, 그 밖의 모두가 있어 아름답습니다. 그 누구도 그들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그 관계성을 자각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 책임지는 태도의 중요성…. 이게 매일 아침 산책길에서 얻는 약간의 지혜입니다.

‘관계의 신성함’을 망각하고, 자연을 그저 ‘타자’로 간주할 때, 바로 문제가 생깁니다. 자연에 대한 사람들의 일방적 지배와, 무모한 개발을 정당화하는 못된 버릇도 거기서 비롯됩니다. 그런 생각은 급기야 제주자연과 제주사람을 분리시킵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있는 내적 자연을 억압합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필연적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부르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초래한다는 말은 그래서 틀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추구하는 ‘살기 좋은 제주도’도 한라산을 비롯한 제주자연과 제주사람의 공존 가능한 삶의 양식을 새롭게 할 때, 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자연의 내재적 가치와, 우리가 그것에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고, 한라산과 그 안의 생명체들을 소중히 여기는 새로운 문화 형성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한라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새로운 이미지 창조도 그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한 자연의식만을 가지고선 불가능합니다. 감정이 이입되어, 우리들과, 저 한라산과, 그곳에서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에 대해 염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한 그루의 잔솔마저 함부로 하지 않는…. 너무 감상적으로 접근하는 것 같지만,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더불어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제주자연을 함부로 하는 것은, 외적인 자연 그 자체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있는 내적 자연을 억압하는 일입니다.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설 수 있도록, 경관을 심의한 분들, 환경영향을 평가하신 분들, 그리고 허가권자에게 그래서 감히 묻습니다. “저 한라산에, 그리고 이 아름다운 제주자연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정직할 수 있는가”를…. 그리하여 “모여앉아 더불어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를…. 멀리 사라봉과 별도봉이 내려다보이는 이 아득한 곳에, 도대체 어째서 지상6층 높이의 아파트가 가능한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정녕, ‘마음속에 조각난 파편’들에 갇혀서 눈앞의 아름다움과 고유한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겠다면, 덧붙여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들은 끝없이 이어질 우리들의 후손을 위하여 어떤 제주를 원하는가” 참으로 주제넘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매우 궁금합니다. 

].jpg
▲ 강정홍 언론인.
“하늘과 숲을 바라볼 때 다시 인간이 된다”는 말을 나는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무심코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리고 숲을 바라봅니다. 그렇습니다. 구름이 흘러가는 파란 하늘과, 까마귀가 요란한 소나무 숲을 바라볼 때, 우리 모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룬 ‘다른 인간’이 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오늘 전하고자 하는 이 글의 주제입니다.
갑자기 장끼가 힘차게 날아갑니다. 그리고 긴 꿈에서 또 다시 깨어납니다. / 강정홍 언론인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