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53) 제주4·3 초기부터 경찰에 적극 협조한 대동청년단     

▲ 제주시 오라리 방화사건.

대동청년단 제주도지부 탄생

‘서북청년 민족청년 대동청년 등은 미군과 경찰의 일심동체로써 인민의 생살여탈권을 한손에 틀어쥐고, 각 읍·면·리의 요소에는 인민의 주택과 공공건물을 탈취해서 거기에 사형비밀실을 설치하고 애국적인 인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길가로 지나가는 농어민마저 함부로 붙잡아다가 <당신들은 공산주의자이니 한번 토론해 봅시다>라고 소리지르며 구타 폭행 살해하는 죄악적인 만행을 서슴치 않고 감행하였을 뿐 아니라 낮이나 밤중이나 도시이거나 시골이거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매일과 같이 자행하였다.’-金奉鉉 ·金民柱, 『濟州島人民들의 4·3武裝鬪爭史』, 日本 文友社, 1963년

‘대동청년단 제주도지부가 독청(獨靑)을 중심으로 지난 2일 결성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동일 피선된 역원은 여좌하다.  원장 김충희(金忠熙)씨, 부위원장 김덕준(金德俊)씨 강성건(姜成健)씨, 집행위원 고원찬(高元燦)씨 외 38명, 상임위원 11명.’-제주신보 1947년 10월 10일    

▲ 광복군 성립식에 참석한 지청천.
해방 직후 최초로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제주도(島)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조공’ 제주도위원회는 다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로 개편되었다. 남로당은 미군정청에 합법정당으로 등록되었다. 반면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제주도지단부 결성식은 1947년 9월 30일 제주극장에서 거행하였다. 광복청년회·서북청년회· 대한독립촉성국민일부를 포함한 것이다. 학교마다 대동학생단도 결성하였다. 대동청년단 제주도지부는 1947년 12월 21일 임시대회를 개최하고 고원찬을 의장으로 추천한 다음, 김충희를 고문으로, 김인선을 단장으로 교체하면서 안정을 찾아나갔다. 

우파청년단체의 초기 활동가는 김충희·김인선·고원찬 이외에 고정일(高正一)·김치규(金致奎)·김인옥(金仁玉)·김교연(金敎淵)·장용직(張龍職) 등이며, 지역에서는 애월 문익도(文翊道), 한림 양병직(梁秉直), 대정 강필생(姜必生), 안덕 지동수, 중문 고태휴(高泰休), 서귀포 강성건(姜成健), 남원 정한응, 표선 송방식(宋邦植), 성산 고성중(高成重), 구좌 김대홍(金大洪), 조천 한재원(韓在源) 등이 주도하였다. 이 밖의 우파청년단체로는 이억(李億)·김한익(金漢翊)·김선희(金瑄熙)·김용청(金用掅)이 주도한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 제주지부 조직이 있었는데, 1948년 말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된다. 

▲ 대동청년단 집회.
대한청년단은 1947년 10월 9일 상해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池靑天)이 청년단체들을 통합하여 결성한 반공주의적 우익단체이다. 미군정은 1946년 중반 비밀리에 약 500만 달러와 미군 장비를 지원하고 훈련 고문으로 미군 대령 한사람 등을 특파하여 조선민족청년단, 약칭 족청(族靑) 결성을 지원하였다. 자금은 군정청이 아닌 일본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나왔다. 맥아더 사령부는 차량 지원에서부터 제복까지 모두 지원해 주었다.

1948년 10월 제주4·3 진압을 위해 경비사령부가 창설되면서 대동청년단 제주도지부가 군경 합동작전에 적극적으로 동원되었다. 일부 단원들은 공식적으로 경찰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전국통일학생총연맹(全國統一學生總聯盟)에서도 계몽대를 파견하였으며, 제주학련은 진압당국과의 연계 아래 준(準) 진압조직이 되었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수시로 성금을 거둬 산으로 올렸다. 제주여중인 경우, 주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활동했는데, 대동학생단 소속 학생 11명은 성금을 내지 않았다. 대동학생단은 곧 학련(學聯)으로 개편되었다.    

1948년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 또한 대동청년단 단원들이 저질렀다. 당일 오전 9시경 전날 무장대에게 살해된 여인의 장례식이 열렸다. 장례식에는 경찰 3~4명과 서청·대청 단원 30여 명이 참여했다. 매장이 끝나자 트럭은 경찰관만을 태운 채 돌아갔고 청년단원들은 그대로 남았다. 그 중에는 오라리 출신 대청 단원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오라리 마을에 진입하면서 좌파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사람들의 집들을 찾아다니며 5세대 12채의 민가를 불태웠다.

4‧3사건으로 인해 사망한 우익단체원 회원들은 현재 국가로부터 국가유공자 및 유가족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4‧3사건 관련  우익단체 국가유공자는 총 744명이다. 이들은 대부분 경찰과 애국단 출신으로 신고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경찰출신 105명을 제외한 639명이 우익단체원에 해당된다.

▲ 조선민족청년단, 1946년 10월.

좌·우파 정당· 단체의 대결

‘제주도는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층 지도자들과 대중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있다. 좌익인사들은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으며, 소위 좌익분자라고 불리우는 인사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제주도민들은 국내외적 정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익이나 좌익에서 터져 나오는 모든 종류의 선전선동에 쉽게 휩쓸린다. 우익인사들은 ‘빨갱이 공포’를 강조하며 주로 청년단체와 공직에서 좌익인사들의 척결을 통하여 섬을 장악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제주도의 좌익은 반미를 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의 테러는 우익이 선동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제주도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며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다.’- Hq. USAFIK, G-2 Weekly Summary, No. 123, January 23, 1948.   

‘이리하여 인민자위대의 활동지역에는 인민위원회가 나서고 농민위원회, 민애청, 여맹 등 민주주의 사회단체가 급속히 발전하여 마치 해방구와도 같아서 전 인민의 결속은 더욱 더 굳고 전 인민의 사기는 더욱 더 높아가고...........(중략)............사건이 발발되자 남조선 각지에 있는 극악한 강도 테러단 서청, 청총, 대청, 독청 등 약 800명을 동원하여 경찰과 일체가 되어 각 부락에 침입하여 부락청년들을 납치하여 해변 또는 산으로 끌고 가서 총살 학살을 감행하는 동시에 방화, 파괴, 약탈, 강간, 가축도식 등 갖은 야만적 난폭 행동을 다하여 인민들의 놈들에 대한 증오는 골수에 사무치게 되었다......(하략)’-노력인민 1948년 6월 11일

▲ 김포공항에서 지청천 장군을 영접하는 김구, 김규식, 이승만, 프란체스카 도너(1947년 4월 22일).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제주도(島)위원회가 1946년 11월 23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로 개편되면서, 위원장에 일제시대 옥고를 치렀던 안세훈(安世勳)이 맡았다. 초기 주요 활동가로는 김유환(金瑬煥), 김은환(金誾煥), 문도배(文道培), 현호경(玄好景), 조몽구(趙夢九), 오대진(吳大進), 김한정(金漢貞), 이신호(李辛祜), 이운방(李運芳), 김용해(金容海), 김정노(金正魯), 김택수(金澤銖), 문재진(文在珍), 부병훈(夫秉勳), 송태삼(宋泰三), 이도백(李道伯) 등을 꼽을 수 있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3·1절 기념집회를 배후에서 주도하였으며 당원 수는 3,000명 가량으로 늘어났다.   

‘성명서/“단군의 혈통을 받은 백의민족의 일원으로서 미력이나마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에 이바지하고자 대동청년단 한 부문을 담당하여 오던 차, 국내 현 실정에 감(鑑)하여 이념통일 운동의 필요성에서 민주독립당 발기인이 되었던 바, 동 당의 정책 및 조직방법 기타에 있어 우리가 주장하여 오던 이념과 배치되는 점이 발견되므로 현 비상단계에 처하여 더욱 느낀바 있어 주저없이 동 당을 탈당하는 바이오니 동지 제현께서는 추호도 의심치 말아주시기 바라며 본인들로서는 최후 일순까지라도 이승만 박사 김구 주석 노선을 사수하며 한사(限死) 투쟁할 것을 맹서하여 자(玆)에 성명합니다. 단기 4281년 1월 25일 강성건(姜成健) 오도현(吳道顯)”’-제주신보 1948년 1월 14일

‘제주도를 시찰한 서울 지방법원 심판관 시찰담에 관하여서 대청 선전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제주도 소요원인의 하나로서 청년단체 행동에 언급하여 단원이 경찰 이상의 경찰권을 행사한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인식부족도 유만부동이다. 청년단체는 살육전이 발단됨에 일반민중과 사회질서를 위하여 자진 희생당한 것이므로 오히려 사회적 동정과 후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청년단체가 경찰에 협력한 것이 과오라면 부득이 이렇게 같이 못하게 한 당국의 불철저한 행정의 책임이 있음을 군정당국은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대동신문 1948년 6월 20일

1945년 12월 26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제주도지부가 발족되고, 위원장에는 박우상(朴雨相)이 맡았다. 이 무렵 우파진영에서 활동한 인물들은 박명효(朴明效), 강지수(康芝洙), 홍순용(洪淳容), 홍순녕(洪淳寧), 김근시(金根蓍), 박종훈(朴鍾壎), 김충희(金忠熙), 김희수(金希洙), 황순하(黃舜河), 문재숙(文在淑), 박치순(朴致順) 등이다. 1946년 3월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 제주도지회(김충희)가 발족되었으며, 1947년 2월 광복청년회 제주도지회(단장 김인선)가 창립되었다. 두 단체가 1947년 10월 대동청년단으로 합쳐졌다.

우파청년단체들이 조직을 강화하는데 제2대 유해진(柳海辰) 도지사와 미 CIC의 역할이 컸다. 유해진은 광복청년회와 대동청년단의 고문을 각각 맡기도 했다. 이밖에 1947년 11월 서북청년회(이하 ‘서청’으로 약칭) 제주도단부(위원장 張東春), 그 해 12월에는 조선민족청년단(이하 ‘족청’으로 약칭) 제주도단부(단장 白璨錫)가 결성되었다. 제주도 우파진영은 1947년 3‧1사건 이후 좌파세력에 대한 검거선풍이 일면서 좌익 활동이 제약을 받게 되자, 더욱 활기를 띠고 세력 확장에 나섰다. 

‘(전략) '동아일보'는 11월 17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3명의 도지사 교체를 발표했습니다..........(중략)......신임 제주도지사: 김충희. 김용하 경질.....김충희: 59살. 제주도 출신. 고등보통학교 졸업. 1948년 대동청년단 제주도지부 단장(이후 대한청년단으로 합병됨),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제주도지부 총무부장,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성공하지 못한 후보자...후략)’-주한미사절단 및 주한미대사관(American Mission in Korea & American Embassy in Korea) 1949년 11월 18일 <항공우편> A-376 (NO. A-376, 1949. 11. 18. 보고)

대동청년단 테러행위

▲ 대동청년단 결단식에 참석한 여학생들.
‘제주도의 대동청년단이 섬의 동쪽 끝에 위치한 5개 마을에서 주민 5명을 구타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방첩대 지구대가 이 사건을 조사중이다.’-주한미육군 971방첩대(971 Counter Intelligence Corps, USAFIK) 주간정보보고(CIC Weekly Activities) 1947년 10월 23일 (제27호)

‘방첩대 제주지구대는 대동청년단원들이 단원모집과 선전목적으로 집회를 열고 있다고 보고했다. 대동청년단원들은 이 과정에서 마을 4곳에서 테러를 자행했다.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은 이 단체가 일으킨 5건의 구타사례를 보고했다. 밝혀진 사람 가운데 3명은 수확기여서 접촉할 수 없었다. 접촉한 1명은 다른 1명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폭행당했다고 주장했다. 조사중이다.’-주한미육군 971방첩대(971 Counter Intelligence Corps, USAFIK) 주간정보보고(CIC Weekly Activities) 1947년 10월 30일 (제28호)

‘테러/ 지난 한 달 동안 비교적 뜸했던 폭력행위가 다시 늘고 있다. 대부분의 폭력행위가 우익 청년단체에 의해 저질러졌고, 지금도 저질러지고 있는 반면 좌익분자들의 공격은 좌익분자들의 소행으로 보고된 2건 중 단 1건이었다. 새로 결성된 대동청년단에 관해서 많은 보고가 들어왔다. 이청천 장군이 결성한 이 단체는 남한의 모든 우익청년단체들로 구성됐다. 이번 보고는 대동청년단의 폭력행위에 대해 처음으로 지적하면서, 이 단체가 다른 관련 우익 청년단체들처럼 테러단체가 될 가능성과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테러행위를 벌일 가능성을 충분히 지적하고 있다. 제주도 방첩대는 1947년 10월 13일부터 19일까지 일주일 동안 제주도 전역에서 단원 모집운동을 벌이던 대동청년단이 제주도 동쪽 끝에 있는 마을 5곳에서 적어도 5명을 공격했다고 보고했다. 방첩대가 이 사건과 관련해 제주경찰감찰청장과 연락을 취한 뒤 폭력행위는 곧 바로 중단됐다.’- 주한미육군 971방첩대(971 Counter Intelligence Corps, USAFIK) 격주간정보보고(CIC Semi-Monthly Report) 1947년 10월 16일~1947년 10월 31일 (NO. 21, 1947. 10. 31. 보고)

‘1947년 10월 16일 제주도의 대동청년단원 30여 명이 정치집회를 열고, 신규단원을 모집하기 위해 섬 일주에 나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들은 현지 경찰의 협조로 마을 주민들을 한데 모아 연설을 듣도록 강요했다. 대동청년단원들은 마을주민이 자신들의 선전 활동에 찬성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가차없이 폭행했다. 5건의 테러행위가 보고됐다.’-주한미육군 971방첩대(971 Counter Intelligence Corps, USAFIK) 격주간정보보고(CIC Semi-Monthly Report) 1947년 11월 1일~1947년 11월 15일 (NO. 22, 1947. 11. 15. 보고)

‘(발췌: 제24군단 <일일정보보고>) 제주지역 전 우익 광복청년단 단장이었으며, 현재 대동청년단 부단장 김인선은 한국의 공산주의는 폭력에 의해서만 근절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테러가 좌익분자들을 약화시키고 있으며, 테러만이 좌익분자들을 한국 정치권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덧붙여서 한국은 험한 정치역정을 걸어왔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이성보다 폭력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제24군단 논평: 좌우익에 의한 테러행위는 지난 4~5개월 동안 한국에서 상당 부분 감소됐다. 이러한 현상은 일정부분 미국인들이 정치단체에 압력을 행사한 데 기인하는 것으로 각 단체들이 비폭력주의라는 미국의 정책에 마지못해 순응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단체를 결성하고, 테러행위를 요구하는 상황이 되면 가차없이 테러를 행사한다. 인용된 우익 지도자의 진술에서 한국인들은 이성보다 폭력을 더 잘 이해하고, 정치단체들은 공격이나 방어 그 어떤 경우에도 테러를 행사할 준비가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지적한 것은 옳다.’-주한미육군 제7보병사단(7th Infantry Division,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7년 12월 5일~1947년 12월 6일 (NO. 281, 1947. 12. 6. 보고)         

‘제주도의 한 비밀정보원이 1947년 11월 26일 대동학생단 소속 단원 20여 명이 우익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의 단원 2명을 체포해 폭행했다고 보고했다. (1947년 11월 27일자 <정보요약>, 제목: 대동학생단의 폭력행위)’-주한미육군 971방첩대(971 Counter Intelligence Corps, USAFIK) 격주간정보보고(CIC Semi-Monthly Report) 1947년 12월 1일~1947년 12월 15일 (NO. 24, 1947. 12. 15. 보고)

▲ 서민호 광주시장이 대동청년단 현판을 수여하고 있다.(광주 중앙초교 교정).

대동청년단 피해

‘(전략)(b) 1948년 4월 1일~21일의 소요들 (제주 관련 부분만 발췌) 이호리 4월 6일: 대동청년단(United Yoyng Men's Party) 간부 3명이 살해당하였다. 신엄리 4월 11일: 대동청년단(Dai Dong Youth Corps) 2명과 경찰 1명이 살해당하였다. Sengsong  4월 8일: 공산주의자 1명이 살해당하였다. 제주읍 4월 13일: 경찰관 1명이 공산주의자 은닉장소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숨졌다. 조천 4월 17일: 대동청년단(Dai Dong Youth Corps) 2명이 살해당하였다. Ecpoachon 4월 17일: 남자 1명과 여자 2명이 폭도들의 공격을 받아 숨졌다. 행방불명 2명. 애월 4월 19일: 경찰관의 삼촌이 살해당하였다(i). Tong Il 4월 21일: 선거사무소 지역위원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 모슬포 4월 21일: 민간인 1명이 폭도들이 경찰서를 공격하는 동안 숨졌다.’-미극동군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군사정보국 정보요약(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Intelligence Summary) 1948년 5월 11일

‘(전략)미국이 한반도를 점령한 이후 제주도에서는 소규모 시민소요가 자주 발생했다. 대부분의 이러한 소요는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한 한국인의 미국 점령정책에 대한 반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소요의 횟수는 3월 후반기 들어 급격하게 늘어난 뒤 계속 증가했다. 반대자들은 경찰, 선거관리와 후보자, 우익인사, 대동청년단(Dai Dong Youth Corps), 연합청년당(대동청년단)(united Young Men's Party) 등에게 공격을 집중했다.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공격한 사례는 단 1건이 보고됐다. 이 공격은 4월 24일 미 비행기가 제주비행장 활주로를 이륙했을 때 저격수들이 사격하여 일어났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선거반대 투쟁에 역점을 둔 민중 소요가 지속될 수 있도록 지도하기 위해 4월에 섬의 북쪽 해안에 상륙한 것으로 보고됐다.(후략)’- 미극동군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군사정보국 정보요약(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Intelligence Summary) 1948년 5월 13일

대동청년단 단원들은 제주4·3 초기부터 무장대의 습격 대상이 되었다. 1948년 4월 3일 당일에도 여러 명의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경찰과 서북청년단 숙사와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였다. 4월 3일 이후에도 일부 마을에서는 단원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이 무장대에 의해 희생당하였다. 단원들은 제주4·3 초기부터 경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서북청년회와 대동청년단이 전위에 서서 군‧경 못지않은 역할을 했다. 또한 주민들에게 민보단을 구성케 하여 마을 경비를 맡겼고, 민보단원 중 청년들은 다시 특공대로 편성해 진압작전에 앞장세웠다. 제주도 폭동의 주모자이자 남로당 지방간부가 1948년 4월 4일 체포되었는데, 그의 진술에 따르면 경찰 살해에 보상금이 걸려있는데 보상금은 순경 1만원, 경사급 1만 5000원, 경위급 이상 2만원이라고 진술했다. 또한 그는 폭동에 사용된 칼은 전라남도 민주애국청년동맹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말했다.

▲ 집단매장지 모습. 유골마다 종이로 번호를 매겼다 .

‘(1) 이호리 - 1948년 4월 6일 새벽 2시 20분 대동청년단원 2명이 소규모 좌익분자들의 습격으로 집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A-1) (2) 봉개리 - 1948년 4월 6일 이른 아침 대동청년단원1명이 숫자 미상의 좌익분자들의 습격으로 집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A-1)’-주한미육군 제6보병사단(6th Infantry Division,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4월 5일~1948년 4월 6일 (NO. 900, 1948. 4. 6. 보고)

‘4월 16일 정오부터 다음 날 정오 사이에 대동청년단원 2명이 조천리 동남방 약 2마일 지점(964-1155)에서 피살되었다. (경찰보고)’-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4월 17일~1948년 4월 19일 (No. 812, 1948. 4. 19. 보고)

‘(1) 폭도 약 50명이 5월 4일 함덕리를 공격해서 대동청년단원 2명을 납치해갔다. (경찰보고) (2) 5월 4일 다이너마이트가 모슬포지서에 투척되었으나 폭발하지는 않았다. (경찰보고) (3) 5월 4일 오후 1시 제주읍 도두리 부근에서 경찰 전화선 복구대가 산능선으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경찰이 응사했으며 저격병 1명이 부상당한 채로 체포되었다. (경찰보고) (4) 5월 5일 새벽 1시 화북리가 습격당했다. 남자 2명, 여자 1명이 피살되었고, 남자 1명은 부상당했다. 피살된 사람 중 1명은 선거관리위원장이었다. 복면을 하고 3~5 명씩 떼를 지어 활동하기 때문에 기습자의 수는 분명치 않다. (방첩대 정기보고 제107호, A-1) (5) 삼양리가 5월 5일 새벽 2시에 공격을 받았다. 이때 대동청년단원 2명이 살해되었다. 화북리 습격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습자들은 3~5명씩 떼를 지어 활동했다. (방첩대 정기보고 제107호, B-2)’-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5월 5일~1948년 5월 6일 (No. 827, 1948. 5. 6. 보고)

▲ '오라리 방화사건의 실체' 설명문.

투표 미달로 재선거를 치른 북제주군 갑· 을구 

‘5월 10일의 총선거에 반대하고 무장폭동을 일으킨 제주도 폭동사건에 대하여 대동청년단 총본부에서는 17일 다음과 같이 대청에서 특파된 단원과 폭도들이 투쟁하는 중간보고의 입전(入電)을 발표하였다. 과반 선거 반대를 기치로 하여 폭동을 야기 시킨 제주도 폭동사건의 폭도는 상당한 무장인원수로서 계속 총화(銃火)를 교화(交火) 중 그들은 지방의 유력한 단세(團勢)를 가진 대동청년단을 투쟁대상으로 공격하여 왔다. 제주도 대청은 총동원 응전하고 있던 중 초기에 벌써 대청원 사자(死者) 9명, 중상자 17명의 다대한 희생을 내었거니와 17일 대청본부에 입전한 바에 의하면 15일 현재 단원피살 14, 중상 51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청 중앙본부에서는 현지특파원에 격려전(電)을 발하는 동시에 사태의 급속한 수습을 위하여 계속 특별응원부대를 파견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한다.’-대동신문 1948년 4월 13일

‘공고/서기 1948년 5월 10일 선거할 국회의원 후보자로서 당선거구에 등록된 자 좌와 여함/ 공고함/ 서기 1948년 4월 14일/ 국회의원 제주도 남제주군선거구 선거위원회/기/주소 : 제주도 남제주군 서귀면 서귀리 610번지/ 성명 : 강성건(姜成健)/ 연령 : 당 34세/ 직업 : 실업(實業)/ 소속정당 또는 단체 : 대동청년단’ -제주신보 1948년 4월 18일 

‘15일 중앙선위(中央選委)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소요중인 제주도에서는 10일 총선거 투표를 실시하였다는데 14일까지 판명된 개표결과는 북제주 갑구의 등록인수 3만3100명중 투표자 1만1110명(무효투표 940명)으로 최고득점이 독촉(獨促) 양귀진(梁貴珍) 3,647표, 을구는 2만 800명 등록인중 9788명(무효투표 1115명)이 투표하여 최고득점이 대동청(大同靑) 양병직(梁秉直) 3776표라 한다. 그리고 남제주는 아직 하등의 보고가 없다. (후략)’-자유신문 1948년 5월 16일

‘대동청년단 발표에 의하면 총선거를 전후하여 좌익계열의 테러 파괴 등을 방지하고자 분투하다가 희생된 제주도 및 경주군하 대동청년단원의 6월 2일 현재 피해상황은 다음과 같다 한다.
△제주도 사건 : 피살자(판명분) 50여명, 부상자 60명, 소실 파괴가옥 250여호, 납치당한 자 미상. (후략)‘- 대동신문 1948년 6월 3일

‘(정보요약 특별호)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입후보자들의 신청서를 접수하였을 때 입후보자들이 공언한 소속 정당에 따라 여러 정당에 의하여 선출된 국회의원의 수는 다음과 같다고 알려왔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우익) 54 한국민주당(우익) 29 대동청년단(우익) 13 조선민족청년단(우익) 5 소수독립정당들 11 무소속 88’-미극동군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군사정보국 정보요약(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Intelligence Summary) 1948년 5월 30일 

제헌의회는 1948년  5월 10일 총선을 통해 구성되었다. 200명이 의원정족수였다. 제주4·3사건으로 제주도 지역구 2개는 선거가 이루어질 수 없어서 198명이 당선되었다. 당선된 의원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4명, 한국민주당 29명, 대동청년단 12명, 조선민족청년단 6명, 대한독립촉성농민총동맹 2명, 기타 단체 11명, 무소속 84명이었다. 

제주에서의 ‘단선· 단정 반대’는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킨 무장대의 주요 슬로건이다. 최종 건거인 등록 결과 제주도 등록률은 64.9%로 전국 평균 91.7%에 훨씬 못미쳤다. 투표율도 제주도는 62.8%로 가장 낮았다. 이 중 남제주군 선거구는 86.6%(총선거인수 37,040명 중 32,062명 투표)의 투표율을 보인 가운데 무소속 오용국(吳龍國)이 당선 확정되었다. 그러나 북제주군 갑구는 43%(총선거인수 27,560명 중 11,912명 투표), 북제주군 을구는 46.5%(총선거인수 20,917명 중 9,724명 투표)의 투표율로 과반수에 미달되었다. 

제주도는 5‧10선거를 거부한 남한의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국회의원 재선거는 꼭 1년 후인 1949년 5월 10일에 실시되었다. 5·10 재선거는 1949년 5월 10일 양 선거구에서 치러졌다. 북제주군 갑·을구 2개 선거구에 대한 국회의원 재선거는 갑구에서는 홍순녕(洪淳寧)이, 을구에서는 양병직(梁秉直)이 당선되었다. 특히 도외 인사로 민주국민당 선전부장 함상훈(咸尙勳)과 서북청년회 중앙단장 문봉제(文鳳濟)가 입후보하여 관심을 끌었다. 

‘(전략)국내 정치/ 이제서야 평화를 찾은 제주도 북부지역의 선거는 친정부 성향으로 보이는 2명을 국회에 추가하는 결과로 끝났습니다. 이들은 독촉의 63살 홍순녕과 대동청년단의 41살 양병직입니다. 전 외무부장관 장택상은 제주도에서 입후보했다가 철회했습니다. (후략)’-주한미사절단 및 주한미대사관(American Mission in Korea & American Embassy in Korea) 1949년 6월 13일 <급송문서> 제346호 (NO. 346, 1949. 6. 13. 보고) / 김관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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