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우리 곁으로 온다. 매주 한편씩. 시보다 사람이 큰 시인 김수열. 제주 섬에서 나고 자란 그가 30여년 정들었던 교단을 떠나며 시를 담은 도시락(島詩樂)을 들고 매주 월요일 아침, 독자들과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살다가 시가 된 제주 시인과 그들의 시를 김수열 시인이 배달한다. 섬(島) 시인들이 토해 낸 시(詩)가 주는 소박한 즐거움(樂)이 쏠쏠할 테다. 시 낭송은 시를 쓴 시인이 직접 맡고, 김수열 시인은 시 속에 살아 숨 쉬는 소리를 끄집어내 우리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가까운,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닮은 시인의 목소리로.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가슴을 든든히 채워줄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 산책’에 <제주의소리> 독자들도 함께 동행하길 기대한다. [편집자]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島詩樂) 산책](37) 시간의 옛집 / 한승엽


시간은 훌륭했다
멈추지 않고 변하는 것들은 뼛속까지 신기해 보인다
그러나 기울어져가는 처마 위로 날아든 풀씨가 싹을 틔우는 옛 동네 구멍가게

졸음에 취한 파마머리 아줌마가 화들짝 인사를 해댄다
주인은 바뀌었으나 녹슨 진열장은 그대로이고
과자봉지 집어 들자 먼지 쓱쓱 닦아 까만 비닐에 넣어준다

막대사탕 하나
입에 물고 찾아든 빗물이 새던 슬레이트 지붕의 옛집
어머니께서
어머니의 어머니 머리를 참하게 빗질해 주신다,
처녀 적 주술(呪術)로 골 파인 주름에 생기 불어 넣으시며
먼 옛날 웃음 지으시는 어머니
변하지 않아 더 놀라운 지상의 시간이다


한승엽 : 『문학예술』로 등단. 시집으로 『몰입의 서쪽』, 『별빛극장』이 있음. 김만중 문학상 수상. 

내 유년을 기억하는 옛 동네에도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지요.
수십 년이 지나 다시 찾은 옛 동네, 지금도 그때 그 구멍가게가 있었더랬습니다.
벗들과 어울려 술기운에 찾아간 그 집,
아직도 어린 나를 기억하는 할아버지 같은 아버지 한 분이 계셨지요.
순간 시간은 멈추고 수십 년 전으로 금세 돌아갔지요.
슬레이트 위로 비가 내리던 밤이었지요.

바다도 변하고
바다로 가는 길도 변하고
사람도 달라지고
사람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달라지고 말았지만
그곳에 가면 달라지지 않아 더욱 놀라운 지상의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달라졌지만 달라지지 않은 사람들이 거기 있습니다. / 김수열

김수열: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 어떠랴』, 『생각을 훔치다』, 『빙의』 등이 있음. 제4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 시·시낭송 / 한승엽 시인
* 도시락(島詩樂) 배달 / 김수열 시인
* 영상 제작 / <제주의소리> 박재홍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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