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사는 이야기㉝>

알고보면 여행은 대부분의 시간을 길 위에 버리는 일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길 위에서 행복을 줍는다. 낯선 세상과 사람을 만나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을 술과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생의 윤활유와 활력소가 되고 때로는 접착제와 방부제가 되기도 한다.

나의 내면이 더 풍요로워지고 썩어가는 영혼을 치유키 위해 여행을 떠난다. 한 잔의 술과 단 한 번의 사랑에 취하듯이 나는 한 순간의 여행에 취한다.

□ 오! 달콤한 밀월여행

오끼나와 시인협회의 초청으로 제주PEN클럽(회장 박재형) 회원 16명과 동반자 3명 등 모두 19人이 3박4일(11.5~11.8)의 일정으로 오끼나와를 다녀왔다. 특히 이번 여행이 나에게 의미가 깊었던 건 얼마 전에 재혼한 아내(김복자)와 동행이어서다. 여행은 혼자도 좋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기쁨은 배가된다. 60대, 인생의 가을에 찾아온 이 행복을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왜 서양인들이 신혼여행을 ‘허니문’이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꿀처럼 달콤한 밀월여행의 맛을 모른다면 인생을 헛 산 것이다. 추야장 긴긴 밤에 눈물로 베갯잇을 적셔본 사람만이 재혼의 환희를 느낄 수 있으리라.

□ 일본 안의 또 다른 일본, 오끼나와

오끼나와는 ‘일본 안의 또 다른 일본’이라 불릴 만큼 이국적인 정취가 넘치는 휴양지이다. 일본에서 유일한 아열대 해양성 기후지역으로 일년 내내 온난하고 쾌적한 생활이 가능한 곳이다. 그래서 ‘아시아의 하와이’로 불린다. 그러나 수려한 자연경관 속에 아픈 역사의 상흔을 지닌 제주도처럼 이곳도 아프다. 메이지시대(1868~1912) 초기 일본 본토에 복속되기 전까지 오끼나와는 일본과 중국의 영향을 받는 독립국(류큐왕국)이었다.

류큐국은 1429년 쇼하시 王의 삼산통일(三山統一)에 의해 건국되어 멸망하기까지 439년 동안 존속했다. 류큐국은 “중국은 우리 아버지이고 일본은 우리 어머니다”라며 양다리 외교노선으로 중국과 일본 양쪽에 모두 조공을 바치면서 간신히 독립을 유지해 왔다. 일본은 류큐국을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켜 오끼나와 현을 설치하고 고유 언어인 류큐어를 말살했으며 창씨 개명을 통해 류큐국민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박차를 가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일본에 조선을 합방하고 식민지화한 것과 판박이다.

오끼나와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45년 4월 미군은 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함포사격과 폭격으로 이 섬을 초토화했다. 3개월 동안의 전투에서 미군 1만2천명 전사, 일본군 10만 전사, 오끼나와 주민도 8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45~1972년까지 27년간 이 섬은 미군이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됐으나 전체 면적의 20% 정도가 여전히 미군기지로 사용되고 있다. 오끼나와 반환 시기에 일부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여론이 일었으나 독립운동 차원의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항거가 아니어서 묵살되었고 지금은 거의 일본에 동화된 것처럼 보인다.

□ 오끼나와-제주도의 역사적 차별성

수리성(首里城)은 13세기 말부터 14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류큐왕국의 궁성으로 태평양전쟁 시 소실됐으나 1992년에 재건했으며 류큐왕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로 중국과 일본의 문화를 융합시킨 아름다운 건물이다. 왕국의 영화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수리성을 둘러보면서 나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탐라국의 궁성을 복원하여 탐라국의 정통성과 탐라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한편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오끼나와 현립 박물관에는 왕국의 역사와 문화를 조감할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이 보존돼 있는데, 탐라국의 역사와 문화를 실증할 수 있는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탐라국왕의 무덤(왕릉)조차 발견할 수 없다. 세계사와 한국사 같은 거대사를 알기 전에 자기가 낳고 자란 향토의 역사, 곧 미시사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자기역사에 대한 자부심이나 긍정 없이 어찌 정체성과 정통성을 문위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탐라사를 제대로 복원하여 후세에 가르쳐야 한다.

1990년대 신구범 지사 재직 시 대우재단의 후원으로 탐라사정립위원회를 구성했으나 별다른 성과물을 내지도 못하고 연구비만 축낸 전력이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문헌상으로만 존재하는 ‘죽은 역사’가 아니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산 역사’이다. 서양의 역사가들은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이고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며 ‘모든 역사는 만들어진 역사’라고 주장한다. 이는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탐라사를 재정립하고 재조명할 때 유념해야 할 명제들이다.

□ 오끼나와-제주도의 문화적 유사성

오끼나와와 제주도의 유사성은 문화면에서 두드러진다.
첫째, 제주도민의 이상향이었던 ‘이어도’와 비슷한 ‘니라이카나이’라 불리는 유토피아가 오끼나와에 존재하고 있다.
둘째, 제주도의 가옥 구조 중 지붕, 정지(부엌), 돗통시, 돌담, 올레가 오끼나와에도 있고 의복, 음식, 농기구, 어로기구 등 의식주문화와 풍속이 흡사하다.
셋째, 오끼나와 민속공연에서 공연자가 부르는 노래의 후렴구 중에 ‘이여싸, 이여싸!’가 반복되는 게 제주민요(해녀, 어부노래 등 노동요)와 너무 닮았다.

주마간산의 여행지에서 본 필자의 피상적 관찰로도 비슷한 점이 많은데, 학술적 엄밀성을 가지고 연구한다면 더 많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왜 닮은가? 이 지점에서 필자는 고려시대 탐라에 주둔했던 삼별초가 1273년(원종 14년) 여·몽 연합군에게 패한 후, 그 잔당들이 오끼나와로 도주하여 류큐국을 세웠다는 설을 믿게 된다. 이게 아니라면 오끼나와-제주도 문화의 유사성에 대한 논리적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다.

□ 문학의 밤-와규 샤브샤브를 안주로 카~!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문학의 밤’ 행사다. 제주와 오끼나와 문인들이 와규(흑우) 샤브샤브를 안주로 생맥주를 마시면서 환담을 나눴다. 제주시인들-한기팔·김종호·김정자·문무병·나기철·윤봉택·강방영·김정희-과 오끼나와 시인들의 시 낭송이 이어졌다. 평론가 김병택과 소설가 김석희는 필담으로 일본의 털보시인과 소통하는데 성공했다. 수필가 김가영의 통역은 매우 훌륭했다.

이렇게 우리의 여행은 막을 내렸다. 내 생애에 다시 오끼나와를 방문할 수 있을까? 아마도 없으리라. 그래서 나는 말한다. “사요나라, 오끼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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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일홍 극작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번 여행은 개인적으로는 밀월여행이었다. 지난 2014년 10월 28일자 <제주의소리> 칼럼에 ‘60대 이혼남의 뻔뻔한 공개구혼장’이라는 글을 쓴 이후 딱 1년만에 배우자를 만나 소원 성취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지만 어쩌면 이 칼럼이 일조한 것일지도 모른다. 칼럼이 게재될 당시 열화와 같은 격려와 질책을 동시에 보여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안해(내 안의 태양)여! 이제야 내 영혼은 기댈 언덕을 찾았소….” / 장일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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